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
지난 글에 이어 <테니스 이너게임>의 제3장 '자아 1을 조용히 시키기' 중에서 '긍정적인 사고는 괜찮은가?' 를 읽고 느낀 점을 씁니다.
저자는 부정적인 사고를 긍정적 사고로 전환하도록 조언하는 책과 기사가 넘쳐나지만 이는 일시적인 효과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부정적 최면'을 '긍정적 최면'으로 대처하는 것은 단기적 측면에서만 약간의 도움이 될 뿐 그 효과는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탄산음료나 과자, 알코올에 비유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해롭다고 알고는 있지만, 제 경우 알면서도 끊임없이 섭취하는 대상이니까요. 하지만, '감정 과학자'로 입문했기에 감정을 정보로 활용하면 술보다는 빨리 끊을 수 있을 듯한 희망이 있습니다.
칭찬의 역작용에 대해 예를 드는 장면입니다.
단순한 사실만을 언급한 발언이지만 만족감을 드러내는 어조였다. 나는 그들을 칭찬하고 있었고, 그들을 지도한 나 자신도 간접적으로 칭찬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다음 차례의 여성이 말했다. "아니, 제가 칠 차례에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어떻게요!" 반쯤 농담 섞인 발언이었지만 그녀는 약간 긴장하고 있었다.
코너가 바뀌면 무대에 오르는 인물이 바뀌는 유튜브 프로가 떠올랐습니다. 앞사람의 퍼포먼스가 좋으면 뒤에 올라오는 사람이 긴장하겠다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칭찬도 결국 판단이고, 그 판단 자체가 우리를 옥죄는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자주 목격하면서도 인지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한 평가를 무시하려고 노력했지만 의식하고 위축되기도 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판단의 영향을 과하게 받는 경우를 설명합니다.
그녀의 '판단하는 마음'이 실제로 일어난 일조차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왜곡한 것이다.
저 역시 분명하지 않으나 비슷한 경험이 있었음을 떠올립니다. 주변의 시선에 위축되어서 상황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죠.
오전에 만났던 둘째 아이의 모습 중에 하나가 전형적인 자아-정신의 원형이었구나 싶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자아 1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볼 수 있게 되었다. 언제나 인정받기를 바라고, 거부당하는 것을 못 견디는 이 예민한 자아-정신은 칭찬을 비판으로 간주한다.
앞으로 그런 장면을 만났을 때에도 (자아 1의 등장으로) 판단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사실을 받아들이게 유도해야겠습니다.
자연스럽게 <선과 악은 해로운 경우가 많은 개념이다>를 떠올리게 하는 포기말(=문장)입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정해지면 집중력 분산과 자아 정체성의 분열은 필연적인 결과이다.
더불어 2019년 즈음으로 기억하는데, 도올 선생의 강의에서 '나쁠 악'이라는 풀이의 해로움에 대해서 역설하는 강렬한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한때 도올 선생의 <노자가 옳았다>를 읽고 유튜브 강의도 본 일이 있습니다. 지금처럼 따져 묻듯이 공부하지는 않았고, 여행하듯 훑어보는 식이었습니다. 당시 강의에서 들은 내용 중에 우리말 한자에는 원래는 '나쁠 악'이라는 풀이는 없고, '미워할 오'만 있었다고 했습니다. 굉장히 흥미로운 풀이였습니다. 저는 경험에 따라 대체로 선악 구분이 사고력을 해치고, 집단에 분열을 일으키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악의 이분법적 사고의 해로움을 저자는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집중력 분산'과 '자아 정체성의 분열'로 말이죠. 저에게 '집중력 분산'은 다시 틱낫한 스님의 '현존을 막는 일'로 그대로 대응됩니다. '자아 정체성의 분열'은 다시 <환각이 만들어 내는 괴로움에서 한발 떨어져 보기>를 쓰면서 김영식 님의 글에서 옮겨 온 '환각'과 그대로 대응됩니다.
스스로 선악을 따지거나 내 앞에 선악을 따지는 사람을 만났을 때, 현존에서 멀어져서 스스로의 환각계에 집착하는 모습으로 인식할 수 있다면 <감정의 발견> 표현으로는 '감정 과학자'가 될 수 있고, 김영식 님의 표현으로는 '충분히 풍성하고 자유로운 좀비'로 살 수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 <테니스 이너 게임> 어휘로는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는 방법이죠.
그리고 다음 포기말은 김영식 님이 쓰신 '충분히 풍성하고 자유로운 좀비'를 묘사한 글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자아-정신 없이 자발적이면서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과정이다.
마블 시리즈와 같은 SF 영화가 왜 선악 구분에 집착하는지를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 그리고, 국가나 종교 따위의 허상이 어떻게 인간이 쉽게 인간성과 목숨을 저버리는 데 이용되는지도 알게 됩니다. 선악 구분의 또 다른 이름은 이데올로기라 여겨지기도 합니다.[1]
처음 이 포기말들을 볼 때는 난감했습니다.
"칭찬은 결국 가면을 쓴 비판과 다름없어요. 둘 다 내 행동을 조정한 거죠."
'그럼, 칭찬을 하지 말라는 말인가?' 싶은 생각 때문이었죠. 그런데, 다시 읽어 보니 아이의 행동을 보고 있다가 내 마음에 들면 칭찬하고, 그렇지 않으면 나무라는 상황을 떠올려서 그 의미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음 말은 여전히 분명하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나의 사건을 긍정적으로 판단한다면 긍정적이 아니거나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는 사건도 존재하게 된다. 판단의 과정에서 부정적인 요소만을 제거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아직은 경험(?)이 더 필요한 듯합니다. 그 경험에 대한 힌트를 주는 반가운 다발말(=단락)을 만납니다.
판단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건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판단을 배제하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사실에 어떠한 것도 더하거나 빼지 않는다는 의미다. 왜곡되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을 보면 된다. 그래야 마음이 더욱 평온한 상태에 놓일 수 있다.
기억이 분명하지 않지만 신기하게도 <내가 과학을 공부하는 이유>에 썼던 과학에 대한 이끌림으로 공부해 온 여정이 느껴졌습니다. 분명한 목적이 아니라 강한 이끌림에 의해 접해왔으니까요.
그리고 다음 다발말을 볼 때는 왜 빌 게이츠가 이 책을 추천했는지 짐작이 가는 듯했습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동료들은 간과할 수밖에 없었던 세부 사항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여자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이 여자가 몽유병 환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즉시 상식적으로 대응했다. 옆자리 남자에게 운전대를 맡기고는 차 밖으로 걸어 나와 여자의 어깨에 자신의 외투를 걸쳐주었다. 그녀를 부드럽게 깨우면서 몽유병 증세를 보이는 것 같다고 말한 다음, 그녀의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보상을 받았지."
그리고 이 일화에 대한 저자의 해설이 이어집니다.
이너 게임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기술은 '비판 없는 인지'라 할 수 있다. <중략> 우리에게 내재된 자연적 학습 과정과 실행 과정은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판단하는 자아의 의식적인 분투에서 나오는 간섭이 없는 상태에서, 잠재된 능력을 선보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1] 하지만, 주제와 멀어져서 이를 따져 묻지는 않겠습니다.
(51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51. 교만을 다스릴 연민을 키우고, 마음챙김을 익히기
54. 행복은 개인적 문제가 아닙니다
58. 케네디에게 침착함, 허심탄회함, 명료함을 배우자
59. 과정은 몸에 배어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
61. 판단이 부르는 일반화 본능의 무용함 혹은 해로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