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
지난 글에 이어 <테니스 이너게임>의 제3장 '자아 1을 조용히 시키기' 중에서 '자연적 학습의 발견' 그리고 '현상태를 인식하기'를 읽고 느낀 점을 씁니다.
지난주에 있었던 북토크 영향인지 '자연적 학습의 발견'이라는 소제목을 보는데 '아기 발걸음'이 떠올랐습니다. 어쩌면 아기 발걸음이 '자연적 학습의 양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를 간결하게 전하는 저자의 포기말(=문장)이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 판단의 기미는 없었다.
그리고 판단 없는 눈으로 목격한 사실을 보고 테니스 학습자가 보인 반응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본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놀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제 그가 진정으로 알지는 못했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진정으로 안다'는 말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잭에게 백핸드에 관한 단 한 마디의 조언도 해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랬더니 잭은 '백핸드의 문제점에 집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판단은 우리의 향상에 전혀 필요 없지만 감정을 이끄는 허상의 일은 주목할 만합니다.
다음 다발말들을 보며 XP에서 배운 아기 발걸음을 넘어서 제 아이가 걸음마를 배울 때 장면으로 가서, 그 느낌과 결부시켜 봅니다.
'자연적 학습'이라는 이 놀라운 과정에 동참했다는 사실만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잭이 자신의 백핸드를 교정하려는 노력을 멈추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시작한 순간, 그의 백핸드를 옭아매던 사슬이 마침내 풀렸다. <중략> 그러한 상태에서만 우리는 현상을 직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판단 결과에 따른 교정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스스로 원하는 본보기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새로운 저의 아기 발걸음 설명에 추가해야겠습니다.
아기 발걸음이란 판단 결과에 따른 교정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스스로 원하는
본보기를 향해 나아가는 자연스러운 학습법입니다.
다음은 '현상태를 인식하기' 중에서 밑줄 친 내용입니다.
공에 시선을 두고 있는 상태에서 라켓 헤드를 쳐다볼 수는 없다. 느껴야 하는 것이다. 느낌을 통해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아는 것은 어디에 있는지 느끼는 것과 다르다.
'아하' 하는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쏟아졌습니다. 하나는 내가 물리적으로 볼 수 없는 모습을 보는 일이 얼마나 유용한지를 깨닫는 순간입니다. 다시 말해 눈에 보이는 행동을 할 때 상대방이 판단 없이 내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이미 <아이들의 시선에서 보기>를 쓴 후로는 이를 배웠고 조금씩 익히는 단계란 생각도 할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감정의 발견>에서 말하는 '메타 모먼트'도 이와 비슷한 효과를 주는 것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또한,
<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이라는 연재의 시작이기도 했던 <당신이 옳다>에서 강조하는 '공감의 필요성'에 대해 미심쩍었던 부분이 분명해지는 듯합니다. 참, 오래 걸렸네요. <린 분석> 독서 모임을 할 때 '공감은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비판하던 동료의 말도 생각이 납니다. 공감은 결국 눈으로 볼 수 없는 내면을 읽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꼭 익혀야 할 기술이 분명한 듯합니다.
다음 내용은 읽자마자 제가 어제오늘 했던 피드백 방식을 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레슨을 할 때 수강생들이 어떤 부분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무관하게 본인의 움직임을 보고 느끼도록 격려하는 것이 가장 유용한 첫 단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다 잘 인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인턴사원에게 협업 시스템을 통해서 전달한 댓글의 의견에 판단이 있었는지 생각하게 되고,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비슷하게 행한 바에 대한 떠올리기도 하고 앞으로의 각오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리고 저 스스로에게 어떤 방식으로 노력을 기울일지 보여주는 다발말(=구절)을 봅니다.
하지만 현실을 그대로 직시하기 위해서는 검은색(부정적)이건 분홍색(긍정적)이건 간에 판단의 색안경을 벗어야 한다. 그래야만 놀랍고도 아름다운 '자연적 발전'이 날개를 펼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저는 아름다운 '자연적 발전'이 일어나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아온 듯도 합니다. 다만, 사전에 그걸 의도하고 기다리지는 못했을 뿐. 다시 한번 '농부의 마음'을 몰랐던 제 경험이 떠오릅니다.
다음 포기말은 제 경험을 다르게 해석하는 단초를 제공합니다.
자아 1은 '옳은' 행동을 하려고 하며 뭐가 옳은지 그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는 초조해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애자일을 채택하지 못했던 문제도 확고한 사전 계획 때문인데, 이는 마치 신념화된 자아 1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 해 봅니다. '납기'라는 미신이 어쩌면 자아 1에 완전히 사로잡힌 상태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겠네요.
다음 포기말을 읽으며 다시 한번 '판단에 초연해지자'라고 각오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에 대해 답하지 않은 채 그 순간 라켓이 어디에 있는지 관찰하라고만 한다. <중략> "맞고 틀리는 건 지금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바운드될 때 라켓을 관찰하기만 하세요."
하지만, 배우는 사람은 제 주변 사람들이 의례 그러하듯 계속해서 판단을 원할 수 있습니다.
"네, 그런데 라켓은 어디 있었죠?" 내가 묻는다.
"그건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때 라켓을 뒤로 뺀 것 같았는데... 아닌가요?"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없는 상태를 불편해한 나머지 '판단하는 마음'은 제 나름의 기준을 세운다.
'제 나름의 기준'이 의미 있는 경우는 딱 하나인 듯합니다. 바로 불확실성을 다루기 위해 전략적 로드맵이 필요할 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세우는 이정표가 그것인 듯합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최종 목표와 실제 과정이 중요할 뿐 이정표는 불확실성을 대응하기 위해 상징으로써만 기능합니다. 절대적인 가치는 아예 없다고 봐야죠.
계속해서 책에서 밑줄 친 내용을 봅니다.
긍정적으로 판단하며 멈추는 대신, 나는 선수로 하여금 라켓을 관찰하면서 바운드되는 순간 정확히 어디 있는지를 알려달라고 한다. 한 발짝 떨어져서 유심히 라켓을 관찰하다 보면 결국 라켓의 움직임을 점점 잘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러면 굳이 교정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스윙을 할 때 자연스러운 리듬이 생기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판단이 남겨둔 생각보다는 실행과 작업 기억이 만드는 리듬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또 지난주에 있었던 북토크 영향으로 <Tidy First?>에서 번역했던 '리듬' 챕터의 내용이 머릿속에 느낌으로 스쳐갑니다.
저자는 누구에게나 자연적 학습 과정은 내재되어 있다며 이를 위해서는 작동하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자연적 학습 과정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실수를 교정하는 오랜 습관을 버려야 한다. 즉, 판단하지 않으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아야 한다.
(46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46. 어째서 우리는 그런 기술들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47. 감정 과학자가 되는 법
48. 이해와 연민 길러 내기
49. 부드러운 소통 그리고 마음챙김이라는 감성 능력 개발방법
51. 교만을 다스릴 연민을 키우고, 마음챙김을 익히기
54. 행복은 개인적 문제가 아닙니다
58. 케네디에게 침착함, 허심탄회함, 명료함을 배우자
59. 과정은 몸에 배어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
61. 판단이 부르는 일반화 본능의 무용함 혹은 해로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