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
지난 글에 이어 <테니스 이너게임>의 제3장 '자아 1을 조용히 시키기' 중에서 '판단하지 않기'를 읽고 느낀 점을 씁니다.
다음 포기말(=문장)에서 지난번 읽을 때는 몰랐던 내용이 보이는 듯합니다.
각 선수가 느끼는 '좋음'과 '나쁨'은 샷 자체가 지닌 특성이 아니라는 점이다.
두 가지 생각이 펼쳐집니다. 하나는 개성을 인정하던 순간의 느낌이 떠오릅니다. 이건 생각이 아닐 수도 있겠네요. 아직 완전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니까요. 다만, 판단이 바로 개성을 무시하는 행위가 되기 쉽다는 점은 그 느낌이 동반하는 생각이라 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좋다, 나쁘다 판단하는 습관을 버리는 것>을 쓰고 난 직후 다시 '판단하지 않기'에 대한 문장을 만났는데 여전히 어색하고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의심이 든다는 점입니다. 그럴수록 정성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이리라 마음을 먹습니다.
조금 더 저자의 설명을 보겠습니다.
판단한다는 것은 일련의 사고 과정을 유발하는 첫 단추와 같다. 첫째로 선수는 그의 샷이 좋은지, 나쁜지 판단하게 된다. 나쁘다고 판단한다면 뭐가 문제인지를 생각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어떻게 교정을 해야 하는지 자신에게 지시한다. 그리고 이렇게 지시를 내리면서 과도하게 노력을 하게 된다.
긴 시간 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사고 과정이자 행동 절차입니다. 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이렇게 하고 있지만, 그것이 문제라고 여기지 않고 있기도 하죠. 그리고 저자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 내면에서 이런 문제가 진행되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합니다.
자아 1은 몇 개의 샷에 대한 평가를 마친 다음 이를 일반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2020년 읽었던 <팩트풀니스>에 일반화 본능이 있었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당시 메모한 기록을 찾았습니다.
내가 살던 곳에서 평범한 것을 기준으로 삼은 일반화가 무용지물이거나 오히려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살던 나라를 벗어난 후에 이를 깨달은 <팩트풀니스> 저자의 경험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의 교재는 내 것보다 3배 더 두껍고, 그들이 나보다 교재를 3배 더 많이 읽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이때의 경험을 세계관을 바꿔야 했던 인생 최초의 순간으로 기억한다. 그전까지는 스웨덴 출신이라는 이유로 내가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중략> 나는 서양이 세계를 지배하는 날이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잠시 <테니스 이너 게임>에서 벗어나 <팩트풀니스>의 6장 일반화 본능에서 밑줄 친 내용을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안나는 지금까지 50개국이 넘는 나라의 약 300개 가정에 사람을 보내 사진을 찍었다. <중략> 구글에서 ‘화장실’, ‘침대’, ’스토브’를 검색해 보라. 4단계에 해당하는 이미지가 나올 것이다. 다른 단계의 일상생활을 보고자 할 때 구글은 도움이 안 된다.
대륙으로 구분하는 내용이 별반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나(저자와 함께 활동하는 가족)는 동질성이 높은 더 나은 범주를 찾으려 했고, 그래서 '달러 스트리트'라는 것을 개발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다음 내용은 달러 스트리트의 효용성을 설명하는 다발말(=단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게 중국 문화군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천만에!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 어디든 2단계 나라에서는 흔히 물을 그렇게 끓인다. 그것은 소득의 문제다. <중략> 이런 상황에서 “아프리카 나라들은…” 이라거나 “아프리카의 문제는…” 이라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데도 사람들은 늘 그런 식으로 얘기한다.
몇 시간 전에 달수네 영상을 보다가 한국의 토트넘 팬이 런던의 토트넘 팬보다 숫자가 많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캡춰했던 사진이 떠올랐습니다.
둘 다 우리가 흔히 짐작하는 상식 혹은 확신에서 보편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오류라는 점에서 비슷하게 연상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다수라는 모호한 말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다수는 정확히 얼마일까? 거의 모두라는 뜻일까, 아니면 절반이 약간 넘는다는 뜻일까?
어제 아들이 '크다'라는 말을 할 때 제가 했던 반응과도 유사하네요. 생각해 보면 기억을 하기 위해 아이가 물은 것일 수도 있고, 무의식 속에서 뇌는 그렇게 우리(?)를 자극할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저자는 예외 사례를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누군가가 예를 달랑 하나만 내놓고 집단 전체에 대해 결론을 내리려 한다면, 그에 해당하는 예를 더 제시하라고 말해야 한다. 아니면 상황을 뒤집어서 반대 사례 하나가 나오면 정반대 결론을 내리겠느냐고 물어봐야 한다. 안전하지 않은 화학물질 하나를 기준으로 모든 화학물질이 안전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겠다면, 안전한 화학물질 하나를 기준으로 모든 화학물질이 안전하다고도 결론 내릴 수 있겠는가?
또한, 범주화 자체가 지니는 한계도 지적합니다.
1단계부터 4단계까지의 삶이 모두 섞여 있는 튀니지에 가면, 짓다가 만 집을 볼 수 있다. 수도 튀니스에 사는 살리 집안의 집처럼. 그런 집을 보면 튀니지 사람은 게으르거나 되는대로 산다고 결론 내리기 쉽다. <중략> 스웨덴에서 이런 식으로 집을 지었다면, 계획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이라거나 집주인이 도망쳤으려니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스웨덴 상황을 튀니지에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한편, 일반화 욕망에 빠지면 탁상공론을 시작하는 듯도 합니다.
우리 머리가 어설프게 일반화를 해도 쉽게 눈치채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논리 전개는 맞는 것 같다. 난공불락처럼 보이는 논리에다 좋은 의도까지 합쳐지면 일반화 오류를 찾아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다음 다발말은 10년이란 긴 시간 동안 선진국이나 고학력이 주는 확신이 사실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릴 수도 있다는 놀라운 교훈을 전합니다.
나는 질식을 막고 목숨을 구하기 위해 10년 넘게 똑바로 누운 많은 아기를 내 손으로 직접 엎드려 눕혔다. 홍콩에서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도 18개월이 더 지나 마침내 그 방식이 뒤집힐 때까지 유럽과 미국의 많은 의사와 부모가 그랬다. 광범위한 일반화 때문에 수천 명의 아기가 죽었고, 그중에는 그런 일반화가 잘못되었다는 증거가 나온 후에 목숨을 잃은 아기도 있었다. 광범위한 일반화는 좋은 의도라는 명분 뒤에 쉽게 숨을 수 있다.
<테니스 이너 게임>의 '판단하지 않기'를 다루다가 <팩트풀니스>의 6장 일반화 본능 인용으로 흘러갔습니다. 이렇게 의식의 흐름 대로 글이 흘러가게 둔 이유는 어쩌면 <환각이 만들어 내는 괴로움에서 한발 떨어져 보기>를 쓴 직후이기 때문이란 생각을 합니다.
<확신이 나를 가스라이팅 하지 않도록>을 쓸 때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인간을 포함한 동물은 행동 전에 판단을 하도록 진화했고, 그리하여 우리의 뇌는 일종의 예측 기계란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김영식 님의 <깨달음과 자기 효율>에 따르면 <제정신이라는 착각>은 다시 환각을 만듭니다.
수행의 결과는 지금 그대로 아무런 문제가 없어 완벽하다는 사실을 체득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지금 이대로 완벽하다는 것은 '나'라는 착각 때문에 생기는 괴로움을 다루는 관점이다.
그 환각이 바로 <테니스 이너 게임>의 자아 1과 관련이 있고, 자아 1은 판단을 위해 복잡한 정보를 무시하고 일반화하는 본능을 작동시키는 듯합니다. 두 가지 근거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예측 기계로 작동해 바로 답을 내야 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범주화해야 기억할 수 있기 때문에 뇌의 메커니즘에 따른 것이란 점이죠. 물론, 이 둘은 근거를 댈 수 없는 추정에 불과하나 제가 책 내용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으로는 충분한 가치를 지닙니다.
(46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46. 어째서 우리는 그런 기술들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47. 감정 과학자가 되는 법
48. 이해와 연민 길러 내기
49. 부드러운 소통 그리고 마음챙김이라는 감성 능력 개발방법
51. 교만을 다스릴 연민을 키우고, 마음챙김을 익히기
54. 행복은 개인적 문제가 아닙니다
58. 케네디에게 침착함, 허심탄회함, 명료함을 배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