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상을 차릴 알고리듬
SNS가 해롭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고, 저 역시 비슷하게 느낍니다. 하지만, 페북의 효능감 또한 체감하기 때문에 아예 접을 수는 없네요. 아침에 김영식 님의 <깨달음과 자기 효율>을 읽고 자기 성찰 과정에서 활용해 보려고 메모해 두었는데, 이를 실천하는 기록입니다.
일단 지난 글을 통해 아침 루틴을 강화한 일은 잘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더불어 주말에는 너무 당연하게 아침 루틴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합니다. '주말까지 꼭 해야 하나?' 싶었는데, 나도 모르게 마음 안에 불만이 쌓이고 분노가 다른 사람을 향해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게 됩니다. 이걸 해소하는 데 약간의 시간 투자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분명 습관화할 가치가 있습니다.
얼마 전 습관이 바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기록을 남긴 것이 떠올라 제 글 검색을 해 봅니다. 그러다가 다른 글인 <내 감정을 살피고 태도를 가꾸고 습관을 만들어가는 일>을 찾습니다. 아이들 교육에 대해 떠올리는 순간, 그와 동시에 수행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더불어 병행하는 일이 반복도 되고, 시간적 연관성이나 동기에도 적절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생각에 그치지 않고 실천하기 위해 아침 기도 대신하는 암송을 해 봅니다.
그렇게 행한 후에 다시 김영식 님의 <깨달음과 자기 효율>을 읽습니다.
수행을 통하여 삶의 본질과 문제를 간파하고 에고로부터 많이 놓이며 편해지는 도반들과 교류하다 보면, 자기가 토한 토사물을 주워 먹듯 다시 자기 생각에 속아서 쩔쩔매다가 돌아오는 모습을 적지 않게 목격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 굳이 '토사물'이라고 했을까 생각하다가 새로운 행동이 습관이 되기 전까지 원하지 않아도 과거의 행동이 만들어 내는 원치 않는 작용의 결과에 영향을 받는다는 생각을 합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제가 누군가를 탓했던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다음 다발말(=단락)은 반만 이해되는 듯하여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수행의 결과는 지금 그대로 아무런 문제가 없어 완벽하다는 사실을 체득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지금 이대로 완벽하다는 것은 '나'라는 착각 때문에 생기는 괴로움을 다루는 관점이다.
그랬더니 '나라는 착각'이라는 매듭말(=구절)이 <제정신이라는 착각>에서 배운 내용을 소환했습니다. 이내 머릿속에서 섞이면서 '자아'의 한계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다음 포기말을 받아들이는 데에 도움을 줍니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생명체는 계속 엔트로피를 거슬러 올라가며 극한의 효율을 지향한다. 깨달음도 이 효율의 수단일 뿐이다. 이 거슬러 오름은 괴로움과 무관하다.
세상은 내 안위와 생각과는 무관하게 운행(?)됩니다. 깨달음과 자기 효율이라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개념이 만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다음 포기말(=문장)을 보며 감탄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나'라는 착각의 과잉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 깨달음이지만, 깨달았다고 진화가 멈추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일상을 차릴 알고리듬 관점에서 배울 내용이 다음 포기말에서 주어지는 듯합니다.
인류는 깨달음과 무관하게 그 진화의 길을 걷는 중이고 깨달은 사람은 착각을 가장 효율적으로 쓰도록 진화된 것이다.
착각을 가장 효율적으로 쓰라?! 착각이란 개념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박문호 박사님 덕분에 읽은 <제정신이라는 착각>이 배경 지식이 됩니다. 그리고, 진화의 의미도 박문호 박사님 팟캐스트를 들으며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효율적으로 쓰도록'이라는 매듭말이 바로 <감정의 발견>을 읽으며 감정 과학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이유란 사실을 깨닫습니다. 스스로의 인식이 믿음에 기초한 착각이기도 하고, 이는 또 몸과 어우러지고 우리를 둘러싼 환경의 산물이기도 하여 감정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매 순간 알아채는 것입니다.
이렇게 써 놓고도 또 어리석은 일을 반복하겠지요.
깨달았다는 것은 자랑할 일이 못되지만, 효율이 높아졌다면 '스스로 뿌듯'해 할 만하다.
하지만, 가끔 뿌듯해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행복을 창조하는 기술을 배워나가는 일은 효능감 있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이를 위해 아이러니하게 <제정신이라는 착각>을 만드는 의식을 잘 살펴보아야 하는 듯합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랑스러워야 하고 그러기 위하여 의심과 비판이 깨어있어야 한다.
약간의 시간 간격을 두고 다시 김영식 님의 <두 개의 세계 - 생각의 세계와 생각 아닌 것의 세계>란 글이 올라왔습니다. 제목만 보아도 <현상적 세계와 물리적 세계를 구분하기>를 쓰게 했던 박문호 박사님 영상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식은 오류를 내포한 혹은 편향이 기본값인 현상적 세계란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마치 이런 연상을 넘어서 더욱 정교한 인식을 배울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먼저 '생각 아닌 것의 세계'에 대한 김영식 님의 설명입니다.
말이 소거된 세계이다. 인간은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는 말(언어)과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으며 그것이 생명 현상의 본질이다. 말이 없으므로 판단이 없고 지금 이대로 완벽하다. 괴로움은 말을 쓰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가려우면 긁고,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잔다. 저절로 일어나고 사라져서 말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문화와 인문 이전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흔히 말하는 무의식의 세계와도 많은 부분 부합할 듯합니다. 반복해서 읽는데 다음 포기말(=문장)에서 멈추게 됩니다.
말이 없으므로 판단이 없고 지금 이대로 완벽하다.
'충조평판' 없이 들어야 굿 리스너가 되는 이치를 알게 되는 듯합니다. 하지만, 마치 문화적 활동 없이 오로지 생물체로서만 역할하라는 듯도 합니다. 욕심이라는 원동력을 꺼 버리라는 듯하기도 합니다.
다시 김영식 님의 글을 보겠습니다.
시공간이라는 가상의 좌표에 사건과 사물을 서사적으로 배치한 관념계이고 환각계다. 환각을 통하여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대단히 효율적이다.
환각을 대상으로 '생산성'을 말하고 '효율적'이라는 평가하는 일은 놀랍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본 일이 없는 탓이겠죠.
또다시 <현상적 세계와 물리적 세계를 구분하기>를 쓰게 했던 박문호 박사님 영상이 떠오릅니다.
자극에 대응하는 현상이지만, 실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하므로 없는 것을 지켜야 한다. 이 부조리로 인한 가짜 괴로움이 생긴다. 괴로움의 본질은 환각 사회가 개인을 착취하려는 가스라이팅이다.
'실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이라는 표현이 멋집니다. 반면에 박문호 박사님 영상을 보지 않았다면 '무슨 말이야' 싶었을 듯합니다. 그리고 마침 <확신이 나를 가스라이팅 하지 않도록>에서 '가스라이팅'이란 표현을 써서 더욱 와닿습니다.
또한, 최근에 배운 '행복 창조 기술 기술'도 바로 이렇게 환각으로 만들어진 괴로움에 대응하는 방법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김영식 님의 글에 따르면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나'를 버려야 하는 듯합니다.
'나'는 종이호랑이며 허구이다. 독립적인 주체가 아니며 환각계 내에서 연기적으로 작동하는 배우일 뿐이다. 그런데 '나'가 삶의 주체라고 착각하고 능력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빠져 자신을 착취하게 되는데 그것이 괴로움이다.
하지만, 어려운 점은 어디까지 '나'인지 알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테니스 이너 게임>에서 힌트를 줍니다. 스스로에게 지시하고, 판단하는 자아를 가급적 끄는 것이죠. 다시 생각해 보니 이는 스스로에 대한 충조평판을 꺼야 하는 듯도 합니다.
<제정신이라는 착각>을 소개하던 <월말김어준> 박문호 박사님 강의에서 우리는 자연이 아닌 인간 문제도 인과를 적용하여 착각을 만든다고 이해되는 말을 합니다.
생각의 세계는 연기로 작동되는 것이므로 '나'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 세계에서 '나'는 저절로 떠오르는 몽상적 독백일 뿐이다. 실재로는 과거 행적들의 관성에 의하여 지금이 결정되고 내일이 결정되니 '나'가 할 일이 없다. "그러면 어제 잘하지 그랬냐?"
앞선 다발말은 그 내용을 떠오르게 합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데 괴로워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게 됩니다.
어떤 상태든 '나'가 할 일이 없는, 연기적으로 완벽한 상태이다. 연기적으로 완벽하게 당할 일이 저절로 일어났다 사라진다.
그리고, <부자 아빠 시리즈 6권>에서 들었던 미스터리 한 말 '미신'의 의미도 다시 깨닫는 듯합니다.
뒤이어 인용하는 대발말에는 얼핏 고수(高手)로 인식했지만 고수(鼓手)에 비유하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말과 괴로움에 속지 않게 된 사람은 고수(鼓手)로 살아간다. 고수는 판소리나 산조에서 장단을 치는 사람이다. 장구나 소리북과 추임새로 창 하는 사람을 돕고 청중의 분위기를 이끈다. '얼씨구!'를 날릴 타이밍과 힘을 선택하는 것은 고수의 자유의지이다. 고수는 춘향전의 월매를 띄워주기도 하고, 변학도를 변명하기도 하며, 춘향의 고집을 힐난하기도 한다. 뛰어난 고수는 그날 컨디션이 남달리 좋은 월매를 판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관중의 동의를 얻어낼 수도 있다. 고수는 스토리를 바꾸지는 않고서도 춘향전을 월매전으로 보여줄 수 있다.
그렇다면 목표로 해야 할 이미지가 '풍성하고 자유로운 좀비'일까요?
그러므로 그는 충분히 풍성하고 자유로운 좀비이다. 투트랙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11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13. 본성을 따지는 일에서 최고의 씨앗들에 물을 주는 일로
16. 조심스럽게 관찰하면 서두르지 않을 수 있을까요?
17. 시행착오가 보여주는 지도 그리고 추진력을 찾는 질문
18. 내가 가진 능력의 축을 믿고 꾸준히 행하고 인내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