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따풀 2024: 함께 말 차리기
지난 글에 이어 <한국인에게 나는 누구인가> 책의 '욕심과 다스림' 내용을 묻고 따지고 풀어봅니다.
욕심을 채우는 일은 대상에서 비롯하는 맛과 임자로서 구실하는 맛을 아울러 갖게 된다.
위 포기말[1]은 <사람이 눈으로 무엇을 보는 것>에서 느낀 양방향성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는 시력(視力)과 지력(智力)을 사용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마주해야 보이기 때문에 마음을 쓰는 일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이에 대해서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않을 것인가?>에서 다시 다룬 바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무시(無視)가 무심(無心)이라는 버릇으로 굳어지기도 하고, 반대로 바탕을 알고 싶은 마음이 묻따풀로 이어지기도 함을 깨달았습니다.
탐욕이라고 불러야 할 듯한 포기말입니다.
사람이 임자로 구실하는 맛에 빠져들게 되면, 임자로서 구실하는 맛을 위해서 대상에서 비롯하는 맛을 억지로 만들어서 욕심을 채우는 일까지 하게 된다.
우리 사회가 욕심을 부정적으로 세뇌하려고 했다는 의심이 있는데, 사전에서 흔적을 찾아보기로 합니다. 욕심과 탐욕의 차이를 비교하는 것으로 말이죠. 먼저 욕심(欲心)의 풀이입니다.
분수에 넘치게 무엇을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 ≒심욕, 욕기, 욕념.
다음으로 탐욕(貪慾)의 풀이입니다.
「1」 지나치게 탐하는 욕심. ≒도모.
전에 살펴봤지만 이미 욕심에 '분수에 넘치게'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탐내거나'도 있습니다. 탐욕의 첫 번째 씨말이 貪(탐할 탐)이란 점을 떠올리면 사전 풀이는 순환 참조에 가깝고 욕심과 탐욕을 같은 뜻으로 본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대중 정치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인 '내로남불'이 떠오릅니다. 저는 우리 사회에서 내로남불이 두 가지 상이한 의미로 쓰인다고 생각하는데, 그 기저에는 유교적 문화에 대한 모호한 태도가 깔려 있다고 믿습니다. 다만, 이에 대한 이야기는 글이 장황해질 우려가 있어 자제합니다.
대신에 아들 공부에 활용하려고 보관해 둔 영상의 한 장면으로 설명을 대신합니다. 인스타 추천에서 본 영상에서는 아들 공부를 시킬 때 엄포나 위협 대신에 욕구와 욕망을 활용하라고 말합니다. 도덕을 강조할수록 인간에 대한 무지는 더 깊어지는 듯합니다.
그래서 책에 나오는 다음 포기말(문장)을 꼭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욕심은 나를 나답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이미 지난번에 글 제목을 <욕심과 다스림: 추진력인 욕심을 바로 알기>라고 지은 시점에 이미 제 마음은 분명해졌습니다.
책으로 돌아가 다음 다발말[2]을 보겠습니다.
이런 까닭에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욕심이 나고 차는 바탕인 마음을 갈고닦아야 한다. 마음을 갈고닦는 일은 마음에 나고 차는 욕심을 추스르고 가다듬는 일을 말한다. 욕심을 추스르고 가다듬기 위해서는 때때로 마음을 비울 수 있어야 한다. 마음을 비움으로써 욕심을 맑고 밝게 만들 수 있다.
제가 인상 깊게 보았던 다수의 책과 글에서 이를 다른 말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김영식 님은 이를 '생각 걷어차기'라고 했습니다. 최근에 읽는 <고요히 앉아 있을 수만 있다면>에서는 이를 '마음 챙김'이라고 합니다. 테니스 동작을 바탕으로 하기에 개념보다는 행위 위주라 개념을 지칭하는 말을 딱 떠오르지 않지만 <이너 게임>도 비슷한 상태를 지향합니다.
一球二無를 말하는 야신 김성근 감독님의 책에도 비슷한 느낌을 주는 글이 있었습니다. 바라보는 방향과 표현 방식은 달라도 많은 현명한 사람들이 욕심을 다스리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인용한 다발말 뒤에 이따르는 부연 중에서 유독 다음 매듭말[3]에 눈이 갑니다.
욕심의 임자로서 그것을 차례로 다스려 나가야 한다.
자연스럽게 연상된 두 기억은 최근에 쓴 글과 '차리다'라는 말입니다. 먼저 <일상을 차리기 위해서는 우선 조심해야 한다>는 김영식 님이 페북에 쓰신 <조심하게 되는 것>에서 비롯한 것인데, 차분하게 상황을 인식하는 힘에 대한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놀라운 우연으로 최근 읽는 <고요히 앉아 있을 수만 있다면>에서 배우는 '마음 챙김'과 관련이 깊다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마음 챙김'은 최봉영 선생님 주장으로는 한국말 '차리다'에 담긴 내용입니다. 하지만, 말을 듣는다고 모두 같은 것을 떠올릴 수는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차리다에서 알고리듬으로 나아간 나의 기록> 따위에서 한국말 '차리다'에 담긴 힘을 제 삶에 실현하도록 노력 중입니다.
이제 다스리다를 다루는 다발말[4]을 보겠습니다.
다스리다'는 다+사리다/다+살오다'에 뿌리를 둔 낱말로서, 어떤 것을 불이나 물에 다 살라서 하나로 이루 게 하는 일'을 말한다. 사람이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몸과 마음을 이루고 있는 낱낱의 것들을 다 살라서 하나의 나로 온전히 이룰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다스리다가 다 살라서 이루는 일을 뜻하다니 놀랍습니다. 처음 듣는 설명이지만 납득이 되는 음운적 연관성이 보입니다. 더불어 수도 없이 쓴 말인데, 그 어원을 전혀 들은 바 없다는 점에 놀라는 것이겠죠? 다시 책으로 돌아가 몇 개의 포기말들을 더 인용합니다.
사람이 나를 제대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내가 갖고 있는 다스림에 대한 욕심까지 다 살라서 하나를 이루게 해야 한다.
선택과 집중을 말하는 듯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포기말을 더 인용합니다.
사람은 내가 가진 본디의 자질을 다 이루어서 나다움의 길로 나아감으로써 모든 사람과 함께할 수 있는 사람다움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1]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문장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포기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구절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다발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3]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어구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매듭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4] 아래 아 따위를 포함한 한국말 고어 표현은 일부가 훼손되어 인용되었습니다.
(61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