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따풀 2024: 함께 말 차리기
지난 글에 이어서 <한국인에게 나는 누구인가> 책의 '04. 저와 우리' 내용을 묻고 따지고 풀어봅니다.
다음 포기말[1]을 읽으면 저와 우리가 각각 '온인 나'와 '쪽인 나'를 바탕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한국인은 나를 두 가지로 나누어서 저 또는 우리라고 일컫는다. 저는 낱낱으로 따로 하는 나를 말하고, 우리는 모두로서 함께하는 나를 말한다.
앞서 '닫힌 우리'에 대해 다뤘지만, 그 외에도 갈래가 있다고 합니다.
한국말에서 우리는 나와 남이 임자로서 함께하는 것을 말한다. <중략> 우리에는 몇 개의 갈래가 있다.
첫째 갈래는 '따로 하는 우리'입니다.
첫째, 우리 : 따로 하는 우리 <중략> 예컨대 한국인이 '우리 고장', '우리 세상'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아무런 뜻도 같이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와 남이 시간과 장소를 함께하는 정도로 매우 느슨하게 엮여 있다. <중략> 저마다 따로 하는 남남의 상태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둘째는 '같이하는 우리'입니다.
둘째, 우리 : 같이하는 우리 <중략> 어떤 뜻을 같이하는 상태로서 함께하고 있는 우리를 말하는 경우 <중략> 나와 남은 뜻을 같이하는 만큼 책임을 지는 동시에 권리를 갖는다.
셋째는 '닫힌 우리'입니다.
셋째, 우리 : 닫힌 우리 <중략> 함께 어울려서 하나 된 모두를 이루고 있는 우리 <중략> 이러한 우리에서 나와 남은 우리를 위해서 하지 않을 때 비난이나 처벌을 받는다.
'함께 어울려서'란 표현이 있기에 '닫힌 우리'에 갸우뚱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로 든 표현인 '우리 남편', '우리 가족만을 위해서', '우리 회사만을 위해서' 따위를 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어릴 적에는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듯했던 전체주의 사고가 떠오릅니다.
마지막은 '열린 우리'입니다.
넷째, 우리 : 열린 우리 <중략> 우리의 밖에 남아 있는 나머지 것들과 다시 함께하려고 하는 우리 <중략> 동심원을 그리면서 계속 밖으로 커져 나가는 열린 우리 <중략> 열린 우리는 고루고루와 두루두루를 통해서 우주의 끝까지 뻗어나갈 수도 있다.
과거에 드러커의 기사들을 읽은 탓인지 열린 우리를 구현한 실체적 공동체가 피터 드러커가 말한 기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련 기록을 찾아보니 다음 포기말에 가장 가까운 내용이네요.
사람들에게 공동 목표, 공동 가치, 올바른 구조, 지속적 훈련과 발전을 제공해 함께 성과를 내고 변화에 대응하도록 하는 일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다.
최근 일상에 대해 음미[2]하던 시간 때문인지 다음 문장이 의미심장하게 여겨집니다.
나와 남이 달라지면 우리 또한 달라진다.
더불어 디지털 기반으로 소통하고 협업을 하는 생활상 때문에 '알람' 기능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관련 기록을 찾다가 '알람'과 정확히 같은 기능을 하는 인간의 행위가 '울음'이란 사실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다발말[3]은 낯선 내용이지만 흔쾌히 동의하게 됩니다.
한국인은 어울림에 바탕을 둔 우리 속에서 나와 남의 지위를 계속 바꾸어 가기 때문에 나를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것으로 본다. 이 때문에 한국인에게 나는 끊임없이 일어나는 존재로서 매우 역동적이다. 한국인은 이러한 역동성이 줄게 되면 처지고 가라앉아 우울에 빠진다.
그리고 관련된 단어로 흥과 신이 떠오릅니다. 흥은 興(일어날 흥)[4]을 활용한 한자어입니다.
재미나 즐거움을 일어나게 하는 감정.
반면 신은 토박이 말입니다.
어떤 일에 흥미나 열성이 생겨 매우 좋아진 기분.
남과 님이 이런 관계에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한국인은 나와 남이 우리를 이루고 있을 때, 내가 남을 나보다 더 살뜰하게 여길 때, 남을 님으로 높여서 부른다.
선생님, 교수님, 사장님 따위로 단어를 구성하는 씨말이 아니고서는 ‘님’이란 말은 잘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인터넷 회사 주도로 널리 퍼진 '님 문화'로 사람 이름 뒤에 붙여 쓰는 일이 익숙해졌다는 사실이 제가 '님'에 대해 겪고 아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님에는 모르고 있던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담겨 있는 듯합니다.
내가 남을 님으로 끌어올려서 우리로서 함께 어울리게 되면, 나는 님이 갖고 있는 고움과 미움을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
얼마 전 만난 지인에게 이 책을 소개했더니 정에 대해 물었는데, 그때 제가 답을 하지 못한 일이 떠오릅니다.
나는 고운 것과 미운 것을 함께 정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님을 기리고 받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고운정과 미운정이다. 나에게 님은 좋아도 님이고 나빠도 님이며, 즐거워도 님이고 괴로워도 님이다.
글자로 다시 만난 지금을 기회 삼아 <낱말의 뜻을 깊고 넓게 묻고 따지는 일의 소중함> 실천을 위해 사전[5]을 찾아봅니다.
「1」 느끼어 일어나는 마음.
「2」 사랑이나 친근감을 느끼는 마음.
고운 것과 미운 것을 '느끼어 일어나는 마음'이 각각 고운 정과 미운 정이 된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를 기억한 총체적인 마음을 다시 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전에는 부정적인 어감의 설명은 없지만, 친근감 중에서는 미움을 포함한 마음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중학교 때인가 심금을 울리던 김소월의 시를 다시 만납니다.
김소월은 이러한 님을 <진달래꽃>에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이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라고 읊고 있다.
하지만, 김소월의 시를 읽으며 '님을 기리고 받드는 마음'을 제 경험에서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님을 기리고 받들어 우리로서 함께 어울리는 일은 나를 더욱 큰 나로 만들어 나가는 지름길이다.
반면에 지금은 이 글을 읽으며 <결혼은 사랑을 배우는 학교에 입학하는 일이다>에 담았던 가장으로서 더욱 큰 나로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제 각오와 맥이 닿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1]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문장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포기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낱말의 뜻을 깊고 넓게 묻고 따지는 일의 소중함> 실천을 위해 사전을 찾아봅니다.
「2」 어떤 사물 또는 개념의 속 내용을 새겨서 느끼거나 생각함.
씨말로 吟(읊을 음)과 味(맛 미)가 쓰였습니다. 한자 사전도 찾아봅니다.
[3]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구절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다발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4] 한자 사전을 찾은 기록을 남깁니다.
[5] 한자어로는 情(뜻 정)입니다. 한자 사전에서 찾은 내용을 보관합니다.
(51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51. '되다'와 삼국시대의 풍류(風流)를 알게 하는 실마리
55. 과연 사람의 말이 서로 엮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58. 나와 남은 모두 난 것으로서 서로 기대어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