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들과 함께 배우기
제 말이 아닙니다. 페벗 김성완 님이 작년에 쓰신 글입니다. 너무 멋진 말이라 보관해 두었는데, 벌써 4달 가까운 시간이 흐른 후에 이 말에 감명을 받았던 이유에 대해 써 보려고 합니다.
저에게 첫 배움은 육아에 대해 관성적으로 하지 않고, 인지하고 배우며 적극적으로 행동할 필요를 깨닫는 일이었습니다.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큰 아이가 아주 어릴 때 중국에 살던 시절에 아내의 깨우침이 시작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 이후 익히고 배운 내용은 2021년 <육아란 무엇인가?>로 기록한 바 있습니다.
다행스럽게 아이를 낳고 한동안 내가 아이를 대할 때, 아내가 나를 자꾸 제지했다. 제지당할 때는 불편한 마음이 있었지만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내면에 질문을 해보면 여지없이 '아무런 기준도 없이 그냥' 그렇게 한 것이었다.
육아를 관성적으로 하지 않고, 내가 무의식적으로 하려는 일에 대해 스스로 물어보고 행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게 실패하면 사후에 반성을 했습니다. 그래서 얻는 것이 많은 분들이 말씀하시는 <세대간 트라우마를 끊어내는 일>을 하고 있다 생각합니다.
그렇게 아이를 온전히 인격체로 대한 후에는 둘의 개성이 그대로 보였습니다. 나도 모르게 획일화에 익숙해졌던 스스로가 변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직업적으로 문제 해결에 속하는 대화는 워낙 익숙합니다. 도리어 그게 해가 된 것인지 공감을 바탕에 두는 대화 능력은 매우 부족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아내와 마찰이나 갈등이 있을 때,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아내라는 가장 중요한 관계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제가 그런 노력을 할 수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다년간 <당신이 옳다> 를 읽으면서 충조평판 즉, 상대에 대한 평가를 멈추고 공감하는 훈련을 했습니다. 아직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인지 없이 충조평판을 입에서 발사하는 빈도는 많이 줄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뇌과학으로 배우는 대화라는 작용>에 정리한 대로 뇌과학에 대한 학습 결과로 이론적 모델은 머릿속에 마련했습니다.
이런 고려가 없이 대화를 했던 40년 넘는 시간이 있었기에 습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아직 더 연습과 시간이 필요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내와 사랑이 무엇이냐를 두고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답이 없는 문제죠. 저는 연애할 때 강렬하게 끌리는 느낌도 사랑이라고 믿었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릅니다. <이기적 유전자>로 기억하는데 취미로 과학을 공부하는 탓[1]에 그때의 강렬함은 유전자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합니다.[2]
반면에 결혼을 한 후에 가장이 되고, 아이와 아내와 함께 펼쳐지는 일상에 대응하려다 보니 부족한 능력을 확인했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면 이런 노력을 할 동기가 없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페북 광고로 발견한 다음 이미지를 보면 저만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랑이 행동하고 습득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 듯한데, 검색해 보니 아예 비슷한 문구를 제목으로 하는 글도 있었습니다.(읽어 보지는 않았습니다.)
Love Is Not A Feeling, It's An Ability
한편, 아이들을 통해서 배우는 내용도 많습니다. 저뿐 아니라 육아를 하는 아내나 주변 사람들을 보면 항상 인내심의 한계에 도전받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런 부분과 달리 아이들의 눈과 말을 통해서 배우는 내용도 있습니다.
첫째 아이가 찍은 영상과 사진을 통해 우리가 다른 관점에서 다른 마음의 바탕을 가지고 세상을 본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우친 일이 있습니다. 한 번의 경험으로 숙지할 수 없을 듯해서 글로 쓰고, 훈련을 통해 습관으로 배양하려고 합니다.
언젠가는 아이에게만 적용하는 것을 넘어서면 좋겠지만, 가장으로서 마주하는 아이는 강력한 자기 변화의 동력을 제공합니다.
둘째 아이가 강렬한 경험과 함께 저에게 알려준 교훈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 마음은 짐작하지 말고 물어보기>인데요. 과거의 습관이 또 나타날 수 있어서 사진으로 저장하고 자주 인용하고 떠올리곤 합니다.
[1] 그 외에도 나이나 결혼 생활 그리고 가장이 된 조건 따위가 작용했겠죠.
[2] '크다'의 비교값을 위해서 <임자는 한국말로 푼 자아 개념입니다>에서 썼던 '자아나 임자보다'라는 표현을 쓰려다가 글이 길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생략합니다.
8. 아이들의 시선에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