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옳다>를 읽고 배운 내용 실천하기 12
이 글은 지난 글에 이어 <당신이 옳다>의 6장. 공감 실전을 읽으며 감명을 받은 부분을 인용하고 생각을 덧붙입니다.
저자는 자기 결론이 담긴 질문을 하고 있지 않나 돌아보라고 합니다.
누군가를 공감하기 위해 누가 재가 돼버리는 것은 공감이 아니라 감정 노동이다. 공감을 잘못 이해하면 그렇게 탈진만 한다. 공감은 한 사람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공감은 너도 있지만 나도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되는 감정적 교류다.
그리고 뜨끔하게 하는 문장이 뒤따릅니다.
궁금해야 질문이 나온다. 궁금하려면 내가 내린 진단과 판단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의 틈이 있어야 한다.
내가 누군가와 함께 있음이라는 존재 인식이 약해지면 나도 모르게 듣지 않는구나 깨닫습니다. 시골 농부님의 표현을 빌면 생각을 좇는 일에 급급해 서두르면 스스로 귀를 막아 버리는 효과가 생기는 듯합니다.
존재를 무시하고 생각에 휩싸여 '생각의 틈'이 없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네요.
저에게는 아래 문단이 '공존을 느끼는 시간'을 갖으라는 팁으로 들립니다.
공감은 내 생각, 내 마음도 있지만 상대의 생각과 마음도 있다는 전제하에 시작한다. 상대방이 깊숙이 있는 자기 마음을 꺼내기 전에 그의 생각과 마음을 나는 잘 알 수 없다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관계의 시작이고 공감의 바탕이다.
조급함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엄마와 아들도 각자 개별적 존재들이라서 서로가 느끼는 감정은 당연히 다르다. 엄마가 아들이 느끼는 감정을 이상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고 인정해 주는 느낌을 아들에게 전달할 수만 있으면 된다. 그게 공감이다.
다음 문장은 공감을 의무로 생각해 나를 지우거나 위선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읽었습니다.
나도 네 마음과 똑같다고 말하지 않았다. <중략> 관심을 갖고 그의 속마음을 알 때까지 끝까지 집중해서 물어봐 주고 끝까지 이해하려는 태도 그 자체다. 그것이 공감적 태도다. 공감적 태도가 공감이다. 그 태도는 상대방을 안전하게 느끼게 하고 믿게 하고 자기 마음을 더 열게 만든다.
저자는 타인을 공감하려면 '나'에 대한 공감을 먼저 하라고 조언합니다.
누군가의 속마음을 깊이 주목하고 귀 기울이기 시작하면 반드시 자기 내면의 여러 마음들이 떠오른다. 타인에게 귀 기울이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고통이자 축복이다.
저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왔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만날 수 없다. 자기 모습만 무한 투사하며 불안해하게 된다. 이미 아들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 된다. 내 상처 속에 매몰돼서다.
실천한다고 생각하면 어렵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물러서지 않고 해보고 싶은 미션입니다.
아들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 줬다. 해석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조언이나 계몽도 하지 않았다. 아이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거울처럼 비춰줬다.
다만, 저에게는 사례자의 경우와 달리 아들만이 아니라 '가능한 모든 지인'이 될 듯합니다.
그리고 다음 문장은 읽을 때는 실천을 위해 '상대를 잘 살피는 일에 몰입'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의 감정선을 같은 라인에서 제자리 뛰기 하며 함께 호흡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끌고 나가지 않고 함께 제자리에 있어 줘서 좋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공감'이라는 말이 선명하게 새겨집니다.
내게 무엇을 요구하고 기대하는 마음 없이 여유 있게 내 존재 자체에만 관심을 갖고 주목하고 있다는 느낌은 아이의 입장에서 더할 수 없이 안전하고 편안하다. 엄마의 그런 태도는 아들이 자기 말을 계속할 수 있게 하는 힘을 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공감이 그것이다. 아이에게도 배우자에게도 사회적 관계의 누군가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원리다.
나에게도 작은 칭찬을 하려고 합니다. 이 책을 다 읽었던 그날 '온 체중을 실어 사과하기'란 문구를 마음에 새기며 제가 작년에 상처를 준 사람에게 찾아갔습니다. 비록 '온 체중'을 싣지는 못했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으니 스스로를 격려하려고 지난 기록을 찾아 올립니다.
저자는 엄마가 2차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우선 가장 먼저 보호하고 돌봐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그것부터 생각해야 한다.
아마도 다음 문장을 실천하려면 자기 안의 죄책감보다 딸을 우선시할 수 있어야 할 듯합니다.
충분히 사과하고 난 후에 "그동안 학교 다니면서 네 마음은 어땠니?"라고 묻기 시작해야 아이가 자기 마음을 말할 수 있다.
그 순서를 지키려면 당연하게도 생각에 쫓겨 서두르는 상태를 벗어나야 합니다. 다음 문장을 읽으며 '끊고 또 끊었던' 저의 과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세히 묻고 듣다가 궁금하면 더 자세히 묻고. 몰랐던 일, 몰랐던 아이의 감정이 나오면 "그랬구나, 네가 그때 엄마에게 말했던 건데 내가 무시했었구나" 다시 사과하고 또 인정하고. 그렇게 묻고 또 물어야 한다.
2차 가해가 무슨 말인지 알게 해주는 소제목입니다.
엄마는 몰랐겠지만 엄마에게 거부당해서 얘기를 더 할 수 없었을 뿐이다. 상처를 떠올리고 말해서 힘든 게 아니라 내 상처가 거부당하는 느낌, 거부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아픈 것이다.
내 속 얘기를 잘 꺼내는 입장에서는 제가 가해자로 살았구나 싶은 내용입니다.
이중 삼중으로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기 전까지 상처를 다시 꺼내기가 어렵다. 심약한 사람들만 그런 게 아니라 누구나 그렇다. 안전하다는 느낌만 있으면 상처받은 사람은 어떤 얘기보다도 그 얘기를 하고 싶어 한다.
육아를 하면서 배우는 내용입니다.
부모인 내가 자식을 사랑했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라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아이가 느껴야 사랑이다.
두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내가 육아하는 방법을 모르는 이유는 우리 부모님과 제 주변에서 조언하는 분들도 육아를 몰랐기 때문에 잘못하던 행동을 내가 별생각 없이 따라 하다 아내 덕분에 깨달았던 순간이 떠오릅니다. 무안했지만, 감정을 그대로 보고 행동 변화를 시작했던 순간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상대에게 전달이 되게 하는 일은 내 방식대로 열심히 행동하는 일과는 다른 일이란 사실도 요즘 깨닫습니다.
책에서는 '아무리 자녀라도'라는 수식이 있는데, 저는 도전적으로 사람에게는 충조평판하지 않는 습관을 죽기 전에 갖추고 싶습니다. 물론,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앞으로 가기만 한다면 좋겠습니다.
공감이란 나와 너 사이에 일어나는 교류지만, 계몽은 너는 없고 나만 있는 상태에서 나오는 일방적인 언어다. 나는 모든 걸 알고 있고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들이다. 그래서 계몽과 훈계의 본질은 폭력이다. 마음의 영역에선 그렇다.
10년쯤 전에 책을 만났지만, 소화는 한참 뒤에 했던 <비폭력 대화>가 이 책을 만나게 해 준 교두보였다는 생각이 스쳐갑니다.
존재에 집중해서 묻고 듣고, 더 많이 묻고 더 많이 듣다 보면 사람도 상황도 스스로 전모를 드러낸다.
사티어의 빙산 의사소통이 떠올라 찾아본 내 글 <오늘의 문제만 우아하게 해결하기>에서 뜻밖의 힌트를 만납니다.
오랫동안 익힌 직업 공간에서의 '애자일' 역량을 대화할 때는 '이 자리의 문제만 우아하게 해결하기'로 바꿔보자는 것입니다. '이 자리의 문제'란 공감하기니까 그걸 단초로 조급함과 서두름을 이겨보자는 것이고, 이때 나의 내면은 '우아함'을 인지할 수 있을 듯합니다.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함은 발동이 되겠지만, 자제하면서 버티다 보면 마음이 그 자리의 우아함을 인지하고 스스로 자제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희망을 품어 봅니다.
누군가의 속마음을 들을 땐 충조평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충조평판의 다른 말은 '바른말'이다. 바른말은 의외로 폭력적이다. 나는 욕설에 찔려 넘어진 사람보다 바른말에 찔려 쓰러진 사람을 과장해서 한 만 배쯤은 더 많이 봤다. 사실이다.
그 옛날 TV에서 박완서 선생님이 평론가를 혼내던 장면이 떠오르는 문장입니다.
고통받는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내 체중을 실어 공감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고 멀리 떨어져서 깃털만큼의 무게도 얹지 않은 채 손쉽게 손가락으로 지시만 하고 있을 때가 많다.
더불어 촛불집회에 대해 갖고 있는 내면의 미안함도 함께 떠올랐습니다.
아래 문장은 '그렇구나' 깨닫게 하기도 하고, 공감에 대한 나의 깊은 무지도 알게 합니다.
공갈 젖꼭지의 존재를 알고 난 후에 엄마에게 배신감을 느끼지 않듯 자신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준 엄마의 행동에 대해 고마운 마음이 생길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거의 백 퍼센트다.
다음 문장을 읽으며 사람의 생각에 갇혀 '삶과 사람'을 보지 못하는 장면이란 사실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현명했던 엄마를 어리석은 엄마로 만든 것은 옳고 그름, 진실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음 문장에서 쓰인 '게으름'은 어쩌면 집단주의(?) 혹은 이데올로기에 이끌리는 상태인 줄도 모르는 상태인 줄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게 계몽자의 게으른 자세다. 교육의 거죽을 쓰고 있지만 폭력이다. 아직도 많은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가르쳐야 할 것 중 으뜸이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이런 관성적인 도덕 강박은 사람 마음에 대한 깊고 입체적인 이해를 방해한다.
'관성적 도덕 강박'을 묘사한 부분에서는 '예의범절을 개나 주나'고 살아온 저에게도 아직도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게 되는 무장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조급함이 이를 잊게 하는 듯합니다.
나만 생각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아이도 생각이 있다. <중략> 나만 여러 생각과 걱정을 한다고 여긴다면 아이를 한 개별적 존재로 바라보지 않어서다. 나도 생각하고 아이도 생각한다. 아이도 나와 같은 한 개별적 존재다.
저도 평소에 실천하지 못하지만 <모래사장의 아이를 바라보며 느끼는 존재에 대한 생각>을 할 때는 그렇게 한 개별적 존재로 아이를 바라보았습니다. 정작 공감이 필요한 순간에 하지 못한다는 숙제를 극복해야죠.
한 전직 대통령의 어머니는 평생을 자식에게 정직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 어머니는 실제로 그렇게 사셨다 들었다. 하지만 그 아들인 전직 대통령은 새빨간 거짓말로 온 나라를 속이고 엄청난 뇌물을 수뢰한 혐의로 감옥에 갇혔다. 계몽은 계몽이고 사람은 사람, 서로 별개였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계몽이 아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계몽은 계몽!
날씨는 하루하루의 바람과 습도, 주변의 기압 등 주변 모든 상태와의 상호 작용을 거치며 계속 달라진다. 사람 마음도 그렇다.
3. 존재 증명을 위해 몸부림치는 그의 고통에 공감하기
7. 감정에 집중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