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영회 습작 Mar 04. 2023

자기 보호를 잘하는 사람이 타인을 도울 자격이 있다

<당신이 옳다>를 읽고 배운 내용 실천하기 9

이 글은 지난 글에 이어 <당신이 옳다>의 4장. 경계 세우기를 읽으며 감명을 받은 부분을 인용하고 생각을 덧붙입니다.


우리는 모두 개별적 존재

책 179쪽에 나온 소제목은 아주 친근한 표현이다. 다행히 책을 읽기 전에도 북경에서의 '개취 인정' 경험 때문에 배운 소중한 진리眞理이다.


자기 경계를 지키지 못하면 자기 보호도 못하지만 동시에 타인의 경계를 침범하는 상대적인 가해자가 된다.

경계란 표현을 들으니 자동으로 2019년에 읽은 책에 대한 기억이 소환되었다. 책 제목은 명확하지 않았는데, 페이스북 검색을 해보니 '바운더리 심리학'이란 표현이 눈에 띈다.

뒤이어 인용한 문장은 얼핏 당연한 말인 듯도 하지만, 그 의미대로 사는 일은 또 다른 일이다.

사람이 개별적이고 독립적 존재라는 말은 사람은 자기가 처한 상황과 관계의 변화에 따라 주체적으로 끊임없이 적응해 가는 존재라는 의미다. 노인이나 어린아이, 성인 누구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관계를 읽는 시간>이란 책을 읽으면서 94년 처음 대학에 들어갔을 때 나에게 전체주의를 강요하는 학교의 분위기에 스스로 아웃사이더 선언을 했던 때가 기억났다. 그렇게 강요받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은 탓에 바운더리 혹은 자기 경계를 못 만든 성인들을 위한 책이 시중에 많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 보호가 먼저다

1994년 나는 외톨이가 되더라도 나를 보호하기로 결심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편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렸지만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아니, 서로 자기네 그룹(?)에 들어오라는 집단주의 경쟁을 하는 듯하였다. 그래서, 그 어디라도 전체주의 대열에는 합류하지 않기로 저항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저자는 온전한 공감은 건강한 경계 인식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한다.

공감은 본래 상호적이고 동시적인 것이다. <중략> 상호성과 동시성을 잃으면 공감도 없다. <중략> 공감은 상대를 공감 '해주는' 일이 아니다. <중략> 공감은 너도 살리고 나도 구한다. 그래서 공감은 치유의 온전한 결정체다. 이 온전함의 토대는 오로지 자기 보호에 대한 감각에서 시작되고 유지되며 자기 보호는 자기 경계에 대한 민감성에서 시작된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공감이 '해주는' 일이라고 알고 있었다. 완전한 무지였다.

탈진의 가장 흔한 이유는 공감 강박이다. <중략> 자기가 동의하지도 않는 일을 견디다가 화나 미움이 생긴다. 예외 없이 죄책감이 뒤따른다. 피해자를 미워하는 자신이 나쁜 사람처럼 느껴져서다.

경계에 대한 인식 부족 혹은 전체주의 사회의 압박을 못 이긴 결과로 나타나는 증상일 듯하다. 저자의 진단은 이렇다.

공감의 상호성, 동시성을 외면한 결과다.

그래서 경계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자기 보호에 민감한 사람만이 끝내 타인을 공감하는 일을 감당한다.

내가 당장의 행복부터 추구하겠다고 결심한 2014년 언저리의 경험이 스쳐 간다. 20년. 어쩌면 내가 사회에서 부대끼며 자존감을 키운 세월인지도 모르겠다.


자기 보호를 잘하는 사람이 타인을 도울 자격이 있다

이러한 말은 내가 할 수 없는 말이다.

"그 사람 변호해 주는 말은 나중에 하세요. 지금은 충분히 더 화내도 돼요. 그동안 얼마나 화를 삼켰겠어요." <중략>

나는 나만 보호할 수 있다. 이것을 함께 하는 이웃에게도 확장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또다시 읽으려는 이유다. 아래 문장을 읽는 순간 위축되고 미안했던 마음이 바뀌었다.

자기 보호를 잘하는 사람이야말로 누군가를 도울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가족들도 외면하고 나만 보호하며 살았다는 생각에서,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다음 단계로 나아가자는 희망으로 감정이 일순간에 바뀌었다. 신기하다.

그런 마음이 들 때는 그럴 만한 개인적인 이유가 있어서다. 그러니 내가 어떤 마음 때문에 그러는 건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지 두 사람 모두를 공감하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할 일이 아니다.


헌신과 기대로 경계를 넘지 마라

저자는 모든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고 말한다.

누군가를 때리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을 공감한다는 것은 그의 분노, 분노를 유발한 상황과 그 상황에 처한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이지, 폭력적 행동 자체를 받아들이고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건 별개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식을 표현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런데 미성년자 흡연에 대해 학교나 우리 사회가 갖는 편견이나 규율까지 엄마가 어떻게 할 순 없어. 거기부터는 엄마가 도울 수가 없네.

그리고 조심할 성격의 개념을 지적한다.

'헌신성'이란 덕목은 의외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를 쉽게, 소리 없이 허문다.

아래 문장들이 등장하는 절의 소제목은 '나와 내가 아닌 것 구분하기'이다. 제목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아들에게 해주었던 칭찬과 인정은 아들 존재 자체와는 상관없는 무의미한 독백이었다. <중략> 하지만 그녀는 아들이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을 때도 아들의 고통에 주목하거나 눈길을 포갠 적이 한 번도 없는 무정한 엄마였다. 자기 세계 안에 갇혀 있던 엄마에게 타인에 대한 공감이란 가능하지 않은 것이었다.

지난 글에 인용했던 빙산의 일각이 만나는 장면이 또 연상된다. 아래 그림은 내가 만남이라는 순간의 연속으로 삶을 묘사한 것이지만, 시간의 흐름 대신에 두 점의 만남이 한순간에 드러난 두 사람의 만남이라고 가정하면 또 다른 연상을 할 수 있다.

드러난 점 아래에 있는 거대한 빙산의 존재다. 존재는 상대가 알 수 없는 거대한 그런 것이다. 그러니 메시지를 보내고 다시 받아서 주파수를 맞추는 행위 중에 비로소 나라는 한계를 벗어나 소통 가능한 상태가 되는 그런 것일 수 있겠다.


갑을 관계에서도 을인 '나를 드러낼 수 있나

나는 IT컨설턴트로 살면서 계약서에는 '을'이었지만 인간적으로는 상하 관계를 거부했다. 그런 나를 수용하는 클라이언트들과 협업했다. 관습과는 매우 달랐지만, 내 방식을 버릴 수는 없었다. 저자의 표현을 빌면 나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으로만 직업적으로 타인을 도왔다고 할 수 있다.[1]

갑질이 넘쳐나는 사회라서 오히려 경계에 대한 개념이 반드시 필요하다. <중략> 경계란 개념은 이상향이 아니라 구체적이며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것이다. 사회적 관계에서는 너와 나를 갑과 을로 나눌지 모르지만 심리적으로 모든 사람은 갑 대 갑이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경계를 세우는 데 서툰 이들에게 경계를 드러내면 당황했던 경험이 스쳤다.


종종 상대를 제압하려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듯하다.

나만 있고 너는 없다는 듯 살아가는 사람은 상대방의 '나'를 무너뜨리는 사람이다.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인간이다.

두려운 사실은 나도 종종 그런 언사를 무의식적으로 한다는 사실이다. 훈련하여 감지하기 위해 이 책을 될 때까지 곁에 둘 예정이다.


자기를 지켜낸 힘으로 먹고살 수 있다

나의 직업 생활 20년은 그 증거다.

그가 나를 의식할 수 있도록 내 존재감을 드러내야 한다. <중략> 그것이 유일하고 근원적인 방법이다.  <중략> 그가 나를 의식해야 그의 일방성이 주춤하기 시작한다. 비대칭적이고 일방적인 관계가 대칭적이고 상호적으로 서서히 변한다. <중략>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끊어야 한다. 먹고사는 힘은 자기를 지켜내는 힘에서 만들어진다.

컨설팅 회사 다닐 때, 나는 자기들 일을 시키는 업체의 일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과거에 몸담았던 회사의 대표이사가 고객들과 골프를 치는 것이 유리하다는 조언도 거부했다. 나는 기술 개발 즉, 고객에게 팔 수 있는 전문성을 기르는 동시에 현재 풀고 있는 문제(프로젝트)를 완수하기에도 버거웠기 때문이다.


골프를 치라는 말은 단순히 어떤 행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직업적으로 자기를 선명하게 지키는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조언이었다고 받아들였다. 내 표현으로, 직업적으로 성인의 관계는 모두 '물물교환과 같은 거래'의 형식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신경 쓰느라 거래할 기술력을 놓치면 말짱 헛일이라 믿었다.


직업적 관계가 아닌 부분에 지극히 서툰 나에게 아래 문장은 미션과 같다.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그 관계가 기쁨과 즐거움이거나 배움과 성숙, 성찰의 기회일 때다. 그것이 관계의 본질이다.

다행스러운 일은 책을 첫 번째로 읽은 직후 나는 '사랑방'이라는 모호한 꿈을 꾸기 시작했고, 조금씩 실천하고 있다.


지난 <당신이 옳다>를 읽고 배운 내용 실천하기 연재

1. 가족의 존재에 관심을 두는 행동하기

2. 우울과 무력감은 삶 그 자체일 뿐, 병이 아니다

3. 존재 증명을 위해 몸부림치는 그의 고통에 공감하기

4. 공감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

5. 세상사에서 그 자신으로 초점을 맞추고

6. 칭찬이나 좋은 말 대잔치와는 다르다

7. 감정에 집중하기

8. 사람의 감정은 항상 옳다


주석

[1] 이런 방식의 경험은 갑을 관계를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클라이언트에게 놀라움을 선사한 듯하다. 가깝게 지낸 클라이언트는 나에게 '자기보다 더 자기 회사 일을 열심히 하는 신기한 사람'이라는 말을 했다. 내 생각에는 '열심히'가 아니라 '주체적인' 부분을 감지하고, 그렇게 표현했다고 믿는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나는 내 경계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는 경계가 흐릿한 사람이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작가의 이전글 북경에서 알게 된 동료들과 관계 지속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