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옳다>를 읽고 배운 내용 실천하기 11
이 글은 지난 글에 이어 <당신이 옳다>의 5장. 공감의 허들 넘기에서 '충족되지 않은 사랑에 대한 욕구'와 '내 안에 남아 있는 콤플렉스'를 읽으며 감명을 받은 부분을 인용하고 생각을 덧붙입니다.
약간의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문장입니다.
마음은 사랑 욕구가 채워져야 움직인다. 사랑과 인정 없이는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다.
살아가는 법을 알게 되었다고 느낀 것은 어떤 일에 몰입할 때인데, 그러면 그 순간들이 '사랑과 인정에 대한 욕구'를 채워줬던 걸까요? 주변의 요구를 물리치고 온전히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도 된다는 '인정'이었을까요? '사랑'과는 당장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반면 요즘은 사랑에 대한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불편하고 불만이 쌓인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욕망을 잘 절제해서라거나 욕망 자체가 줄어서가 아니다. 그런 사람은 충분히 사랑받고 깊이 인정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욕구로부터 자유롭고 연연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가장 어려운 숙제가 바로 사랑과 공감의 관계 맺기라고 합니다.
사랑 욕구를 일생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으려면 고도의 인간관계 능력이 필요하다. <중략> 나와 또 다른 존재 간에 공감적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삶의 동력원을 확보하는 일이다.
'고도의 인간관계 능력'이란 표현이 약간의 좌절을 주기도 하고, 나에게 주어진 숙제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기도 합니다. '고도의'라는 말은 관계가 깊어질수록 공감이 힘들어지는 현상을 바탕으로 하는 표현인 듯합니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사람은 더 많이 오해하고 실망하고 그렇게 서로를 상처투성이로 만든다. 서로에 대한 정서적 욕구, 욕망이 더 많아서 그렇다.
저자는 나의 개별적 욕구와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그만큼 좌절이나 결핍이 쌓인다고 말한다.
내가 받을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 더 빼앗기고 휘둘리는 건 더 억울한 일이다. 부아가 치민다. 줄 것은 주지 않으면서 계속 요구만 하고 있다는 생각, 이게 사람들이 자기 가족이나 연인처럼 관계가 밀접한 상대에게 갖는 공통적인 감정이다.
부끄럽게도 내 상태도 비슷한 듯합니다. 도리어 이럴 때 이 책을 만나서 다행이다 싶네요.
서로의 사랑에 대한 욕구를 지겨워하지 않고 비난하지도 않고 정면으로 마주한 채 기꺼이 공급하며 공급받는 일은, 우리 모두가 자기 삶의 동력을 마련하는 일이다.
수영 못하는 것이 콤플렉스인 남자가 아들에게 수영 강습을 강요하는 일에 대한 묘사입니다.
오랫동안 허기진 사람이 자기가 먹어야 할 밥을 배부른 옆 사람에게 억지로 먹이는 격이다.
아래 문장은 <자기 보호를 잘하는 사람이 타인을 도울 자격이 있다>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자신에 대한 성찰을 건너뛰고 타인의 마음을 공감하는 일로 넘어갈 방법은 없다.
뒤늦게라도 자신에 대한 성찰을 한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는 갈등 해소가 가능하다는 단서를 남기는 듯한 문장입니다.
엄마가 자기의 상처를 의식하고 마음을 쓰고 있었다는 걸 알면 안심이 된다.
내가 아이에게 자주 해주고 싶은 말입니다.
너는 그동안 사랑을 많이 받고 현명하게 잘 자랐다. 네가 그렇게 판단하면 언제나 그게 옳은 거다.
평가자로 기준을 넘어서해주고픈 말이 아니라 (후회 없이) 사랑을 많이 주고 내 삶 안에서 현명함을 견지했다면 해줄 수 있는 말이기에 스스로의 목표 설정입니다.
'그렇구나.' 하며 지난 일을 회상하게 하는 문장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안전하다고 느껴야 자신이 놓인 상황을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볼 수 있다.
누군가에게 조직의 리더로서 직면하라고 조언을 넘어 강요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그때의 신념은 '변명을 피하기 위해 먼저 직면(直面)하라'는 말로 기록으로도 남겨져 있습니다. 이를 깨닫는 순간 제가 '사회적인 안전함'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운이 좋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확하게 누군지 알 수 없는 도움에 의해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더불어 저를 오래 지켜본 지인이 저에게 '대단한 용기'를 지녔다고 말할 때, 굉장히 어색했던 장면이 또 떠오릅니다. 저의 내면은 안전함을 느꼈기에 용기라고 생각하지 않은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내디딜 수 없는 발걸음으로 비췄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래 문장을 다시 읽으며 섣불리 평가자가 되지 말자고 각오합니다.
내가 선택했어도 열 번 백 번 무를 수 있고 바꿀 수 있다. <중략> 사람마다 다르고 상황마다 다르다. 그걸 인정해 줘야 한다. 바꿔도 된다는 충분한 인정을 받은 사람이 가장 빠르고 가장 안정적으로 자기의 최종 선택지에 닿는다.
아래 문장을 읽을 때는 불현듯 '생각 걷어차기'가 떠올랐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상처를 준 것이 아니라 아들에게 상처를 주고 공감해 주지 못했던 그녀의 판단에 전사처럼 대응한 것이다.
나의 상처를 엉뚱한 사람에게 강요하는 듯한 행동을 쉽게 할 수 있구나 깨닫게 하는 문장입니다.
공감을 받지 못하고 넘어간 상처는 일방적 계몽과 충고의 형태로 상대방의 마음에 칼로 꽂히기 쉽다.
(지겹게 했지만) 또 반성할 수밖에 없는 문장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말이어도 일방적인 계몽과 교훈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 아무리 옳은 말이어도 듣는 이에게 강박 관념으로 남거나 상처만 주고 튕겨 나가는 경우가 더 많다. 그저 겉보기에 좋은 말일뿐이다.
내일 회의 시간 준비 메모에 위 내용을 기록해 두어야겠습니다. 사람을 집단의 구성 요소로 보기보다는 개별성을 띈 존재로 대하도록 노력하기로 마음을 먹어 봅니다.
3. 존재 증명을 위해 몸부림치는 그의 고통에 공감하기
7. 감정에 집중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