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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Mar 06. 2023

나를 점검할 수 있는 신호, 감정

<당신이 옳다>를 읽고 배운 내용 실천하기 10

이 글은 지난 글에 이어 <당신이 옳다>의 5장. 공감의 허들 넘기에서 '다정한 전사가 되어'와 '좋은 감정 vs 나쁜 감정'을 읽으며 감명을 받은 부분을 인용하고 생각을 덧붙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붙인 험한 딱지

판단자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하면 어떤 불행이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문장입니다.

자신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판단자의 입장에서 모질게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던 그녀 자신의 공감 허들과 싸운 것이다.

최봉영 선생님 덕분에 알게 된 임자란 표현이 구실을 할 듯합니다. 제가 이해한 '임자'는 '줏대와 잣대'를 갖는 생각의 주체입니다.[1] 스스로가 임자가 되지 않고 '판단자'의 가치(줏대와 잣대)를 그대로 수용하면 나도 모르게 '자신의 마음에 험한 딱지'를 붙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붙인 험한 딱지'란 표현은 너무나도 멋집니다.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란 개념이 있는데, 충조평판을 막아낼 심리적 장치가 없다면 이렇게 가장 소중한 '자신의 마음에 험한 딱지'를 붙이네요. 가치는 지극히 주관적입니다.[2] 충조평판은 기본적으로 상대의 주관적인 평가입니다. 그걸 그대로 평가로 받아들이면 내 입장을 고려되지 않은 수용이 되어, '험한' 내용이 될 확률이 클 듯합니다.


다정한 전사가 되어

그래서, 저자는 다정한 전사가 돼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에 다정하고, 무엇에 단호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아이가 다음과 같이 행동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어리바리한 아이가 불안하게 밥을 먹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발달이 유난히 늦을 뿐 아이는 이해받고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저자는 아이에게 '다정'하고 식당 주인에게 '단호'하게 대처했다고 합니다. 테이블 회전이 문제가 되면 비용을 부담하는 식으로 식당 주인의 불편함을 다스렸다고 합니다.

양자 모두가 이해받고 존중받으며 양자 모두가 부당한 대우나 불필요한 요구를 받지 않고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선, 어디에서 다정하고 어디에서 전사가 되어야 하는지 잘 생각해야 한다.


불편한 감정이 '나쁜' 감정은 아니다

내 감정을 인정하고 스스로 공감하는 과정이 생략되어 쌓였을 때 벌어지는 현상으로 보입니다.

시어머니와 유치한 감정싸움이 피곤했고 그러다 보니 아이들에 대해서도 짜증이 늘었다. 이런 일상을 대범하게 넘겨보려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럴수록 스스로가 위선적으로 느껴졌다. 짜증과 자기혐오를 오가며 보면 어느새 아이들은 돌아가며 병이 났고 후배의 죄의식은 커져만 갔다.

주어진 문제를 풀라는 일에 익숙한 모범생처럼 세상을 살아가면 아래와 같은 일을 겪기 쉬워 보였습니다.

자기의 사회적 역할을 자기 자신과 과도하게 동일시를 한 결과다. 사회적, 직업적 소임은 때와 장소에 따라 갈아입어야 하는 옷처럼 한 존재의 삶에서 상황과 여건에 따라 달라진다.

남다른 통찰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이 따로 있다고 여긴다.

기억은 떠오르지 않지만 감정에 끌려 후회할 행동을 했던 경험은 많이 있습니다.

나쁜 감정을 어떻게 해서라도 좋은 감정으로 전환시킬 수 있어야 멘털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항상 긍정적인 마음으로 사는 건 좋은 일인가. <중략> 때론 위험하기도 하다. 긍정적 감정은 자기 합리화와 기만이 만들어내는 결과일 때도 있고 자기 성찰의 부재를 뜻하는 신호이기도 하다. 성찰이 깊고 스스로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면 불안하고 흔들리게 된다.


성장은 불안(Fear Zone)이라는 문을 통해서만 가능

왜 불안을 전제로 하는 걸까요?

복잡한 갈래 길들을 바라보며 인정하고 통합하는 과정은 불안을 전제로 진행되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심리적 토대는 더 튼실해진다. 이럴 때의 불안은 건강과 불안, 건강한 혼란이다. 입체적 통합을 위한 필수 과정이다.

감정을 다루는 일에 매우 서툴지만, 경력 개발 과정에서는 매우 비슷한 경험이 있는 듯합니다. 저는 경력을 쌓는 과정에서 네 번의 좌절이 제 직업 인생에 얼마나 큰 도약의 기회가 되었는지 자주 상기하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제가 썼던 글 <도전하고 실패해도 편안하게 성장하기>에 인용한 그림에서도 성장은 불안(Fear Zone)이라는 문을 통해서만 가능한 듯이 묘사합니다.

'심리적 토대는 더 튼실'해지는 일도 성장의 일환이라고 보입니다.


나를 점검할 수 있는 신호, 감정

감정이 나를 살피라는 신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정은 좋고 나쁘고, 옳고 그리고의 이분법으로 판단할 대상이 아니다. 감정은 한 존재의 지금 상태를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바로미터다. <중략> 끊임없이 움직이는 감정은 내 존재의 상태를 시시각각으로 반영하는 신호다.

한편으로는 이걸 모르고 살고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 어리석게 느껴집니다. 또한, 공교롭게 오늘 아침 주고받은 페이스북 대화도 떠오릅니다.

감정이 아나리 몸을 살피는 일에 대해서 게으르다는 말씀이었는데, 감정 또한 비슷하게 대우한 듯합니다. '서두르며 게으르게' 대했습니다.

모든 감정에는 이유가 있고 그래서 모든 감정은 옳다. 불안을 느낀다면 '이러면 안 되는데' 할 게 아니다. '내가 지금 불안하구나, 왜 그런 걸까?' 곰곰이 나와 내 상황을 짚어봐야 한다. <중략> 불안 신호를 따라 '나'를 점검해봐야 한다. 불안을 따라가다 보면 근원이 나오고 그러면 근원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한 존재의 핵심

표피적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으로 감정을 긍정적, 부정적으로 가르는 시각은 한 존재의 핵심에 다가가는 일, 누군가에게 깊이 공감하는 일을 막는 큰 걸림돌이 된다.

과연 감정은 내 존재의 핵심에 도달하게 이끌까요?

에너지 솟구치게 해서 뭐 하려고요. 다시 가르치려 들려고요? (웃음) 내가 지금껏 아들한테 괜한 용을 썼다는 느낌이 더 깊고 강해져야 더 이상 그러지 않게 돼요. 그러니 더 마음껏 위축되세요. 에너지를 끌어올리려 하지 마세요.

아... 내 이야기가 아니지만, 문장을 (다시) 읽으면서 과거에 내가 (무모한 일을 시도하며) 좌절했던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더 마음껏 위축되세요.'라는 말이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있다니 놀랍습니다.


슬퍼하는 걸 나쁘게 보지만 않아도

내 정서적 욕구와 내 정서적 결핍을 온전히 공급받고 충전받으며 삶의 동력을 여유 있게 확보하는 일은 전쟁일 수밖에 없다.

왜 전쟁일 수밖에 없을까? 아직 공감하지 못한 이유는 운이 좋아서일까? 아직 삶의 많은 부분이 눈이 들어오지 않은 탓일까?


나는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경지라고 생각되는 문장입니다.

나와 다른 주파수를 갖고 있던 사람의 소리를 듣다가 어느 순간부터 서로의 주파수가 일치하면서 잡음이 사라지고 또렷한 소리가 들리는 합일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가 없어지고 모든 것이 명징해지는 평화를 느낀다.

문득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와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석

[1] 맞춤법 익히느라 자주 쓰는 표준국어대사전의 '임자' 뜻풀이는 빈약하기만 합니다. '물건을 소유한 사람' 정도만 있는데, '줏대와 잣대를 소유한 사람'도 추가될 필요가 있겠네요.

[2] 저에게는 회사를 설립하고 기업 가치에 대해 다년간 고찰하면서 배운 바입니다.


지난 <당신이 옳다>를 읽고 배운 내용 실천하기 연재

1. 가족의 존재에 관심을 두는 행동하기

2. 우울과 무력감은 삶 그 자체일 뿐, 병이 아니다

3. 존재 증명을 위해 몸부림치는 그의 고통에 공감하기

4. 공감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

5. 세상사에서 그 자신으로 초점을 맞추고

6. 칭찬이나 좋은 말 대잔치와는 다르다

7. 감정에 집중하기

8. 사람의 감정은 항상 옳다

9. 자기 보호를 잘하는 사람이 타인을 도울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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