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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Mar 14. 2024

임자는 한국말로 푼 자아 개념입니다

묻따풀 2024: 함께 말 차리기

4주 전에 받은 지인의 질문이 마음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또렷이 생각이 정리되지도 않아서 묻따풀을 못하다가 최봉영 선생님과 통화 후에 묻따풀 하는 글입니다.


임자가 자아인가?

아마 그런 듯합니다.


표준국어대사전 자아(自我) 풀이는 최봉영 선생님께 배운 임자의 뜻과 같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2」 『철학』 대상의 세계와 구별된 인식ㆍ행위의 주체이며, 체험 내용이 변화해도 동일성을 지속하여, 작용ㆍ반응ㆍ체험ㆍ사고ㆍ의욕의 작용을 하는 의식의 통일체. ≒, 셀프, 에고, 자기.

다만, 통화로 들은 최봉영 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한자어로 쓰면 한국말이 지닌 바탕치를 잃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한편, 국어라는 이름으로 한국말을 다루는 학계에서는 임자를 최봉영 선생님과는 다른 편협한 범위로 정의합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사람과 말을 쓰는 일을 차리는 일에 도움을 주는 '한국말 인문학 관점'에서 임자를 묻고 따집니다.


자아 대신에 임자라고 하면, 스스로(自)의 줏대(Identity)가 되어 쌓아 간 잣대의 총합이 내가 인식하는 나(我)가 됩니다. 최봉영 선생님에 따르면 한국말에서 무언가 이루는 이는 중력의 반대 방향으로 표현한다고 합니다. '공덕을 쌓다' 혹은 '무언가 이루다' 따위의 말은 위를 향해 나아가고 쌓는 일로 표현한다고 합니다. 논리적으로 그럴듯하고, 직관적으로 그러한 듯합니다.


다른 것을 머리 위에 니고 있는 님

'쌓다'와 '이루다'가 임자와 무슨 관계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최봉영 선생님의 글을 빌어 설명합니다.

‘님자’에서 ‘님’은 ‘니다’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말이다. ‘님’은 ‘니고 있는 것’으로서, ‘어떤 것이 다른 것을 머리 위에 니고 있는 것’을 말한다.

'머리 위에 니고 있다'라고 볼 수 있는 이유는 녀김의 결과를 뇌 속에 기억으로 쌓아 두는 것을 한국말로 묘사한 방식이라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일단, 선생님 글을 더 살펴보기 전에 주관적인 인식은 각자의 뇌에 보관한 개별 산물이란 점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박문호 박사님 책의 일부를 인용합니다.

138억 년 전 빅뱅에서 시작해 언어 상징을 통한 가상 세계의 출현에 이르는 우주의 진화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박문호 박사님에 따르면 인류가 언어 상징 즉, 말을 갖게 되면서 가상 세계가 출현했다고 합니다. 다른 기사를 인용해 부연을 대신합니다.

가상세계는 인공지능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감각에서 지각을 생성하면서부터 지구라는 행성에서 출현했다. 지각은 그 자체가 세계를 흉내 낸 환각이며, 대상에 대한 지각을 상징인 언어로 표상하는 과정이 바로 생각이다. 그리고 상징은 뇌가 스스로 내부적으로 생성한 자극이다. 그렇다면 생각도 그 자체로 환각이다. 우리는 감각의 자극으로 환각에서 벗어날 때 물리적 세계와 심리적 세계가 공존하는 현실 세계에 참여하게 된다.


인식에 종속된 각자의 잣대

다시 최봉영 선생님 글을 봅니다.

‘님자’가 갖고 있는 ‘자’는 저마다 따로 하는 것이다. ‘님자’는 이러한 ‘자’를 남과 함께 할 수 있는 ‘잣대’로 만들어서,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그위(公共)의 것'이 되도록 한다. 예컨대 사람들이 ‘한 뼘’, ‘두 뼘’이라고 말하는 ‘뼘’은 저마다 따로 하는 ‘자’를 말한다. 사람마다 ‘한 뼘’, ‘두 뼘’의 길이는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이 ‘한 뼘’, ‘두 뼘’을 넘어서 막대를 가지고 ‘한 자’, ‘두 자’를 잴 수 있는 ‘자’를 만들게 되면, '그위(公共)의 것'이 되어서,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잣대’로서 자리하게 된다.

최봉영 선생님이 말하는 '그위(公共)의 것'이 되게 하는 일이 의미의 단위나 도량형을 만드는 일이라 할 수도 있겠네요. 인식의 개별성에 대한 문제는 운 좋게 최근 <같은 현상도 서로 다른 일로 인식할 수 있으니 차리기>에서 써 두었습니다.


말을 어떻게 묻고 따질 것인가?

대략적으로 임자에 대해 풀어 본 듯합니다. 그런데, 인식이 서로 다르면 어떻게 말을 써서 소통을 하는지를 되짚어 볼 필요가 생깁니다. 이에 대해서는 최봉영 선생님의《말을 어떻게 묻고 따질 것인가?》에서 도움을 청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말을 만들어 배우고 쓴다.”에서 ‘사람’은 말을 만들어 배우고 쓰는 임자를 말한다. 사람이라는 임자가 있지 않으면 말을 만드는 일이 있지 않기 때문에 배우고 쓰는 일도 있지 않게 된다. 사람들은 ‘말을 만들어 배우고 쓰는 일’을 통해서 ‘사람’이라는 것으로 불릴 수 있게 되었다.

위 다발말[1]은 한국말이 만들어 준 기본 바탕에 대한 설명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인식에 따라 각자의 의미가 다를 수 있음을 인지하고 대화를 해야 합니다. 이는 이미 <같은 현상도 서로 다른 일로 인식할 수 있으니 차리기>에서 상세하게 다룬 내용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각자의 지성과 이성적 역량 그리고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감정과 공감이라는 차원을 빠트리면 대화가 성공하는 경우는 매우 제한적입니다.


주석

[1]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구절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다발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난 묻따풀 2024: 함께 말 차리기 연재

(31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31. 묻고 따져서 그러한 까닭에 맞는 것을 찾아서 굳게 믿기

32. 새롭게 꾀할 수 있는 힘 vs. 공명정대한 중도

33. 얽힘 상태와 의미를 두루 따지는 분별 그리고 대화

34. 오락가락하는 마음의 안과 밖이 맺는 관계

35. 분별은 다각도의 분석으로 볼 수 없던 얽힘을 보는 일

36. 새로운 차원을 공감하고, 얽힘을 풀어내고 얼개를 만들기

37. 소통의 가장 기본은 한쪽의 소리에 경청하는 마음가짐

38. 한국말 포기말의 5가지 바탕 얼개

39. 사람이란 무엇인가? 일상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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