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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Mar 07. 2024

소통의 가장 기본은 한쪽의 소리에 경청하는 마음가짐

묻따풀 2024: 함께 말 차리기

다시 <얽힘 상태와 의미를 두루 따지는 분별 그리고 대화>에서 다룬 이순석 님의 댓글로 돌아가 봅니다. 지난 글까지의 흐름은 첫 번째 포기말[1]에서 가지가 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다시 두 번째 풀이말을 봅니다.


누구나 존귀한 존재이고 싶어 하는 욕망

'각자는 존귀한 존재'라는 뜻밖의 매듭말[2]이 등장하는 포기말입니다.

그런 분별에서 누구나 각자는 존귀한 존재이고 싶어 하는 욕망을 읽을 수 있습니다.

글을 쓰고 있는 요즘 둘째 아들이 매일 자신이 '주인공'이란 말을 합니다. 얼마 전 유치원 졸입식을 하고, 곧 초등학교 입학식을 합니다. 2년 전에 형의 졸업식과 입학식을 보면서 자신도 기다렸다고 해서 무척 놀랐습니다.


두 달 전에 <당신이 옳다>를 읽고 쓴 <충조평판 닥치고 '니가 옳다'라고 말하자>를 복습하는 기분입니다. 마흔이 넘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알 수 있던 이야기들입니다. 그전에는 자기중심적으로 살았구나 깨닫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한편,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자세를 갖추려고 마음먹은 일도 아이의 뒷모습에 담아 썼던 글 <우리는 처음부터 개성을 가진 존재다>에 담겨 있습니다.


자기 존재가 귀한 줄 아는 사람들

다음 다발말[3]로 나아갑니다.

3.
각자가 존귀한 그 존재들은 자신들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기에, 또 함께 또 다른 존귀한 존재를 만들 수 있음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우리는 언제나 끊임없이 소통을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묘한 포기말입니다.

각자가 존귀한 그 존재들은 자신들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기에, 또 함께 또 다른 존귀한 존재를 만들 수 있음도 알고 있습니다.

의식을 말하는 것인지 무의식을 말하는 것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의식의 바탕을 말하는 듯한 불교적인 표현이란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그래서 의미를 한정합니다. 자신들이 존귀한 존재임을 알거나 알려고 노력하는 상태(의식)로 제한합니다.


나 자신을 찾아가는 일 = 나 자신으로서 살아가기

그랬더니 떠오르는 그림이 있습니다.

여기서 '존귀한'은 누구의 기준일까요? 일단, 자신의 잣대로 한정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각자의 '또 다른 존귀한 존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인공물일 수도 있고, 더러는 생각의 결과가 흘러가서 다른 이에게 정착하는 경우일 수도 있고, 심지어 아이를 낳는 일이 사례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통의 가장 기본이 한쪽의 소리에 경청하는 마음가짐

다시 다음 다발말로 갑니다.

4.
소통의 가장 기본이 한쪽의 소리에 경청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일 것이기에, 우리는 언제나 각자에게 좋은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좋은 느낌을 가진 상대는 서로의 뜻을 맞추는데 상대적으로 적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역시 포기말 단위로 풀어봅니다.

소통의 가장 기본이 한쪽의 소리에 경청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일 것이기에, 우리는 언제나 각자에게 좋은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언제나'라는 표현은 당위를 말하는 것일까요? '노력합니다'가 아니라 '노력해야 합니다'라고 써야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을 듯합니다. 바람직한 태도를 지칭하는 말로 이해하고, 포기말을 다시 봅니다. '소통의 가장 기본이 한쪽의 소리에 경청'이라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무시하는 일입니다. 12년 전에 제가 경청이 불가능한 상태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 사회에 휩쓸려 살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 후로 노력을 기울였으나 아직도 자신 있게 경청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마음에 넣고 실천하고 있는 중이기는 합니다.


존비어를 보는 새로운 시각

긴 여정[4] 끝에 드디어 이순석 님의 메시지가 명확해집니다.

5. 그런 시선에서 보자면, 존비어는 각자의 존귀함에 맞추려는 깨어있는 섬세한 말솜씨라고 사료됩니다.

아마 댓글을 처음 볼 때는 제 스스로의 감정과 치우침이 있어 글을 그대로 보고 읽는 직면을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라도 직면해서 생각해 보면,  <우리는 처음부터 개성을 가진 존재다>를 쓰던 마음 자세라면 각자의 존귀함을 바탕을 두고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그 상태라면 한국 사회의 통념과 무관하게 '각자의 존귀함에 맞추려는 깨어있는 섬세한 말솜씨'를 구사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5]


계속합니다.

6. 그러한 것을 얽힘을 살피지 못하는 이들의 관점에서는 존비어가 마치 계급을 가르는 말로 녀기는 것이 아닌가 사료됩니다.

사회적 잣대를 자신의 잣대로 받아들이고, 단편적으로 사람들을 평가하는 이들의 행태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7.
각자가 존귀한 이들의 시선에서는 헤아리고(商)-뜻을 만들고(工)-뜻을 실현하고(農)-실현된 것을 운용(士)하는 수순이 보이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의 눈에는 명령하는 이(士)가 있고-생성하는 이(農)가 있고-도구를 만드는 이(工)이 있고-장사하는 이(商)이 있을 뿐이지 않을까 사료됩니다.

물리적으로는 같은 장면을 보아도 어떤 현상으로 볼 것이냐는 각자의 몫입니다. 하지만, 공동체가 하나의 현상으로 정의하는 일을 민주적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주석

[1] 왜 포기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왜 매듭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3] 왜 다발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4] 아래 포기말에서 느낀 사무침을 얻기 위해 <얽힘 상태를 읽는 것에서 시작한다>에서 시작해 이 글까지 무려 여섯 편을 글을 쓰면서 묻고 따지고 풀었던 시간이 작용했습니다.

[5] 물론, 제가 그렇게 하더라도 상대는 그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건 다른 문제로 다뤄야 할 문제이고 이 글의 범위 밖의 문제입니다.


지난 묻따풀 2024: 함께 말 차리기 연재

(31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31. 묻고 따져서 그러한 까닭에 맞는 것을 찾아서 굳게 믿기

32. 새롭게 꾀할 수 있는 힘 vs. 공명정대한 중도

33. 얽힘 상태와 의미를 두루 따지는 분별 그리고 대화

34. 오락가락하는 마음의 안과 밖이 맺는 관계

35. 분별은 다각도의 분석으로 볼 수 없던 얽힘을 보는 일

36. 새로운 차원을 공감하고, 얽힘을 풀어내고 얼개를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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