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따풀 2024: 함께 말 차리기
지난 글에 이어 계속해서 <한국인에게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따지고 풀어봅니다.
다음 포기말[1]을 읽을 때는 3년 전과는 달리 바탕 지식이 생겼다는 점에서 뿌듯해집니다. (죄송합니다. 저만의 이야기라서)
한국인이 말하는 '나'라는 말 또한 다른 것과 함께 엮임으로써 뜻을 갖는다.
결정적으로 작년에 <한국말은 어떻게 나눠지는가?>를 쓸 때 저는 생소했던 '앛씨말'과 '겿씨말'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며 취미인 과학의 영향으로 원자핵과 전자의 관계를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뜻의 골자를 지닌 씨말인 앛씨말과 씨말이 '원자처럼' 온전한 형태를 갖춤과 동시에 다른 말과 이어 붙어 '분자처럼' 더 큰 말의 구실을 하게 하는 요소가 바로 겿씨말입니다. 생소하기 이를 데 없지만, 한편으로 자연과 닮아서 너무나 놀라운 패턴입니다.
일단, 제 자랑은 그만하고 다음 포기말로 나아갑니다.
이들과 '나'가 어떻게 엮여 있는지 살펴보면 나의 바탕을 알 수 있다.
지난 글에서 언급한 '빙산과도 같은' 나의 바탕을 깜깜이로 두지 않고 말을 열쇠로 하여 풀어볼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됩니다. 말은 느낌(알음것) 상태의 지식을 알알이 풀어 주는 단초가 되니까요!
계속해 볼까요?
한국말에서 나는 '나다'와 뿌리를 같이하는 것으로서, 나는 '난 것'이나 '나 있는 것'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위 포기말에 <한국사람에게 사람이란?>을 쓸 때 익힌 한국말 '사람' 속에 담긴 속성을 섞어서 표현하면 나는 살아 있는 존재인 동시에 나처럼 다양한 것을 살려가는 존재입니다. 자연과 누리와 연결된 '쪽인 나'로 조화롭게 살려 나가도 좋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타고난 욕망 때문에 어떻게든 살려나갈 것입니다. 조심하지 않고 내 생각에만 휩싸이면 세상에 나뿐인 '온인 나'에 도취되어 스스로 만든 고통에 빠질 우려도 있습니다.
암튼 어떻게 살든 분명 나는 '난 것'이고, '나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다른 나 있는 것들처럼 말이죠.
그리고, 다음 다발말[2]을 보면 '나이'라는 익숙한 말의 바탕에 숨겨진 엄청난 비밀이 폭로되는 듯합니다.
나이는 나의 모든 것을 통째로 담아내는 말이다. 지금의 나는 흘러가는 시간 속에 있는 한 순간의 나를 말할 뿐이고, 나의 모든 것은 나이에 담겨 있다. <중략> '나고 나서'에서 앞의 '나고'는 처음에 난 것을 말하고, 뒤의 '나서'는 처음에 난 뒤로 이제까지 이어져 온 과정을 말한다. <중략> '나서'와 '나다'와 '나'와 '나이'가 하나로 엮여 있음을 잘 보여준다.
나이의 age를 번역한 한국말도 아니고, 장유유서나 따지던 권위주의 시대의 등급 따위의 의미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의 역사를 담고 있는 놀라운 말이었습니다. 몇 해 동안 나를 만들어 왔는가? 혹은 다른 쪽들과 수많은 인연과 영향으로 인해 빚어져 왔는가를 담은 말이었습니다.
이어서 다음 다발말을 보면 고향이 그저 향수나 지연을 따지기 위함만은 아니란 생각도 해봅니다.
나는 난 것으로 있기 위해서 반드시 난 데가 있어야 한다. 난 데는 나 있는 것이 비롯한 터전으로서 나 있는 모든 것은 언제나 난 데를 가져야 한다. 예컨대 난 데가 없이 하는 말은 터무니가 없는 말로써, 그것의 뜻을 제대로 살필 수가 없다.
계속 다음 다발말을 봅니다.
한국말에서 어떤 것의 난 데를 밝혀 주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다'이고 다른 하나는 '낳다'이다. '내다'는 어떤 것이 밖으로 모습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말하고, '낳다'는 어떤 것을 이루어서 밖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내다와 낳다는 어떻게 다를까요?
한국말에서 '내다'는 '나+이+다'가 줄어든 말로써, 어떤 것을 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임자가 어떤 것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책의 예제를 떠나서) 바로 떠오르는 일상 표현은 '화를 내다' 또는 '돈을 내다' 따위입니다. 이제 낳다 설명을 볼까요?
한국말에서 '낳다'는 '나+히+다'가 줄어든 말로써, 임자가 어떤 것을 이루어서 밖으로 모습을 드러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내다'의 이면에는 보다 깊은 바탕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하느님과 어머니는 모두 난 데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나게 하는 방법에서 다르다. <중략> 한국인은 세상에 널려 있는 모든 것을 하느님이 낸 것으로 말하는 일이 많다.
난 데와 나를 어떻게 연관 지을 지에 대한 단초를 제공하는 포기말[2]들을 보겠습니다.
나는 언제나 난 데와 이어져 있다. 난 데는 내가 비롯한 터전이자 뿌리로서 내가 누구인가를 밝혀주는 실마리이다. <중략> 한국말에서 난 것이 난 데와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잘 보여주는 말이 '나오다'와 '나가다'이다.
난 데와 나와의 관계는 기본적으로는 나의 뿌리와 관계에 대한 맥락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나아가서 이렇게 연결을 짓는 방식을 확장할 수 있습니다. 난 데가 있으니 남이라는 사건과 결과인 나가 있는 것이겠죠. 난 후에 살아가는 과정에서도 나는 시간이라는 인식에 따라 혹은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인과라는 흐름에 따라 어딘가에서 나오고 어딘가로 나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풀어 보고 나면, 다음 다발말이 의미하는 바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한국인이 말하는 난 것과 난 데와 낸 것과 낳은 것은 내가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것과 함께하는 것임을 말한다. 이는 나라는 존재가 낱낱으로 따로 하면서 모두로서 함께하는 존재임을 말한다.
[1]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문장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포기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구절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다발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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