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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Apr 30. 2024

나와 남은 모두 난 것으로서 서로 기대어 살아간다

묻따풀 2024: 함께 말 차리기

지난 글에 이어 계속해서 <한국인에게 나는 누구인가>의 '03. 나와 남' 내용을 묻고 따지고 풀어봅니다.


세상은 하나인 나와 수많은 남들

한국인은 세상에 난 뒤로 이제까지 나도 있는 하나의 남을 임자로서 일컬어서 나라고 말하면서, 나의 밖에 남아 있는 나머지의 남을 모두 싸잡아서 남들이라고 부른다.

언뜻 보면 당연한 소리 같은데, 다음 포기말[1]이 추가되면 의미가 명확해집니다.

나라는 임자의 처지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세상은 하나인 나와 수많은 남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어지는 다음 다발말[2]에서 공감의 토대를 설명하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사람이 어떤 것을 나와 남으로 나누기 이전에 나와 남은 남과 남으로서 같은 것이다. 이런 까닭에 남과 남이 나와 남으로 나뉘더라도, 나와 남이 갖고 있는 같은 뿌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사전에서 공감을 뜻을 찾는 일로 <낱말의 뜻을 깊고 넓게 묻고 따지는 일의 소중함>을 실천합니다. 共(함께 공)과 感(느낄 감)을 씨말로 합니다.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

씨말의 바탕을 이해하려고 한자 사전도 찾아보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현재(차원)를 공감하기

자연스럽게 사티어의 빙산 의사소통 모델이 떠오르는 내용입니다. 검색해 보니 비슷한 느낌이 들어 쓴 글이 <새로운 차원을 공감하고, 얽힘을 풀어내고 얼개를 만들기>에 있습니다.

<당신이 옳다>의 다발말 그리고 이를 시각화한 그림이 눈에 띕니다.

감정적 반응 그 자체가 공감은 아니다. <중략> 공감을 '정서적 공감'과 '인지적 공감'으로 나눈다면 그 비율이 2:8 정도로, 공감이란 것은 인지적 노력이 필수적인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중략> 악의가 없어도 얼마든지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그래서 공감은 배워야 할 수 있는 것이다.


공감은 윤리적으로 묶어 주는 바탕

함께 하는 바탕이 윤리의 바탕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나와 남을 윤리적으로 묶어 주는 바탕이 된다.

윤리의 뜻도 묻고 따져 봐야겠죠. 倫(인륜 륜)과 理(다스릴 리)를 씨말로 하는 낱말입니다.

「1」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거나 지켜야 할 도리.

한자 사전도 찾아봅니다.

윤리의 또 다른 풀이에 있는 것처럼 도리를 구체적으로 풀어내는 내용 이전에 공감하는 행위가 더 중요한 바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3]

「2」 『철학』 인간 행위의 규범에 관하여 연구하는 학문. 도덕의 본질ㆍ기원ㆍ발달, 선악의 기준 및 인간 생활과의 관계 따위를 다룬다. =윤리학.


이웃하기에 대한 인식

불교적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누리에 쪽인 나로 함께 하는 한국인의 사고의 바탕이 드러나는 포기말입니다.

나와 남은 모두 난 것으로서 서로 기대어 나고, 피고, 지고, 살고, 죽는 일을 되풀이하는 관계에 있다.

하지만, 저는 북경에서 3년간 성당 전례위원을 하면서 배운 '이웃하기'라는 말에 담은 경험과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야 내가 바람, 물, 풀, 나무의 힘을 빌려서 나를 나답게 만들어 갈 수 있다.

이웃하기는 한편으로는 소프트웨어 개발에 있어 가장 골치 아프지만 중요한 의존성(dependencies) 관리 업무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나는 언제나 하나이지만 나의 밖에 있는 남은 적어도 하나 이상이다. 실제로 나의 밖에 있는 남은 아무리 헤아려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더불어 나를 보는 관점이 다양하고 나에게 기대하는 역할이나 모습도 다양하다는 점을 제가 종종 잊고 산다는 사실도 깨닫습니다. 하지만, 앞서 빙산 이미지와 함께 살펴본 대로 한 사람이 하나의 차원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이를 다시 반추할 수 있습니다.


생활에서 활용하는 다양한 본보기

다음 다발말을 읽으면서는 그렇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한국인은 내가 기대고 있는 남을 잣대로 삼아서 내가 남처럼, 남만큼, 남같이, 남보다, 남부럽지 않게, 남 못지않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때 남은 나를 비추고 재는 거울이자 잣대이다.

처음에는 '본보기'라는 단어가 떠올랐고, 자연스럽게 내가 성장할 때 어깨너머로 참고했던 7분의 멘토가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그런 멘토들만 본보기가 아니었습니다. 연봉 책정을 할 때 기준으로 삼은 사람들도 있고, 부러운 마음이 들게 하여 나를 이끌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국 내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남을 보고 나의 잣대로 삼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인 듯합니다.


주석

[1]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문장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포기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구절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다발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3] 물론, 객관적으로 윤리를 연구하는 일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축적된 객관적 산물 이전에 주관적으로 그리고 실제로 관계에서 공감이 작동해야 그런 산물도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묻따풀 2024: 함께 말 차리기 연재

(51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51. '되다'와 삼국시대의 풍류(風流)를 알게 하는 실마리

52. 바람, 덕분 그리고 되는 일의 바탕

53. 내가 있기에 세상의 모든 것은 인식될 수 있다

54. 나를 나답게 만드는 삶의 차림판

55. 과연 사람의 말이 서로 엮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56. 한국말 '나이'의 바탕에 있는 엄청난 비밀

57. 나의 갈래 그리고 내다, 나답게, 사람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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