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
페이스북 계정을 바꾸고 나서도 페벗이 되어 주신 이명수 님의 글을 읽다가 한번 읽고 말기에 아쉬워서 글을 씁니다. 한편으로는 <우연하게 찾아온 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의 바탕이 된 <당신이 옳다>의 저자이신 정혜신 님의 실전(?) 이야기가 나오니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행스러운 사실은 명수 님의 글을 읽기 전에 준비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지난주에 동료들과 <당신이 옳다> 2장을 주제로 대화를 하면서 아래와 같이 고해[1]를 했습니다.
그러고 났더니 평소에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리액션'에 대해 공감하며 읽고 사무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알 수 없는 만남은 어제까지 살아온 과정이 총체로 작용하는 일이란 점을 또 깨닫습니다.
이제, 이명수 님 글을 살펴봅니다.
집밥 좋아하는 아내의 리액션이 있어서 가능했다. 아는 사람은 다 알다시피 혜신은 리액션 대가다. 유느님이라는 재석급을 뛰어넘는다. 차원이 다르다. 불멍 물멍 하늘멍처럼 누군가 말에 맞장구치는 혜신의 눈빛, 으응하는 추임새, 끄덕임 등만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 공감멍 방송하자는 권유를 받았을 만큼 눈빛 표정 몸짓이 완벽한 공감 그 자체다.
그렇구나. 깨닫습니다. 리액션은 누군가에게 무언가가 되도록 욕망하게 만듭니다.
그런 대가의 공감 리액션을 집밥처럼 상용하는데 내가 집밥 요리사가 안될 까닭이 한 가지라도 있나. 그녀의 집밥 리액션은 거의 답정너 수준이다. 매번 고무 지지 찬양 선동의 영역 어디쯤에 있다. 내가 미슐랭 2성급 셰프쯤이라 믿게 하고 내가 혹시 타고난 엄마성있는 사람이 아닌가 상상하게 한다. 착시현상이란 걸 알면서도 기꺼이 앞치마 두르게 하는 힘이 있다. 가스라이팅이라면 그것조차 기꺼이.
그걸 분명하게 알게 해 주는 이명수 님의 말솜씨를 감상하며 저도 가스라이팅됩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명언이 기어이 발사됩니다.
사랑의 구체적 실체는 제대로 된 피드백이란 생각을 자주 한다.
리액션은 가스라이팅에만 그치지 않고 명언 제조를 위한 양식으로 작용한다는 점도 관찰합니다. 여기서 저는 명언을 보자 엉뚱하게도 2016년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잊어본 적이 없는 타이슨의 명언을 가져와서 대입하고 싶어 졌습니다. 막상 해 보니 폭력적 이미지는 영 어울리지 않습니다.
물러서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 보았습니다. 그럭저럭 마음에 듭니다.
다시 이명수 님의 글로 돌아갑니다. 명언을 설명하는 부연이 이어집니다.
치유자 혜신이 주구장창 주장하는 것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것보다 그 말을 듣는 상대방이 그렇다고 느끼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비로소 사랑이다. 그러니까 사랑의 본질은 피드백이고 리액션이다.
<말이 말을 걸어 글로 쓰는 이야기>를 연재하며 말을 그대로 놓아두면 한이 없다는 점을 배웠습니다. 이쯤에서 좋은 글을 섭취하고 가스라이팅 된 생각을 정리합니다. 마감을 하면 먼저 정혜신TV를 구독합니다. 제가 구독하는 두 번째 유튜브 채널이네요.[2]
두 번째 마감 행위로 다음 포기말[1]은 기록으로 남겨 둡니다.
제대로 된 리액션이 있을 때 개별적 존재의 잠재력은 무한대로 커진다.
최근에 읽은 HBR 기사 연구 내용과 통하여 조만간 별도 글로 쓸 때 인용하는 일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1] 저는 북경에 있을 때, 약 3년 동안 가톨릭 신자 생활을 했습니다. 가톨릭 의식 중에는 고해성사(告解聖事)라는 것이 있는데 이를 지칭합니다 하지만, 저는 평소에 지인들에게 솔직하게 제 이야기를 털어놓기 때문에 굳이 신부님께 고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왔기에 이런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2] 구독하면서 <당신이 옳다> 페이스북 페이지도 발견합니다. 책 마케팅은 이렇게 하는 걸까요? 나중에 한번 살펴봐야겠네요.
[3] 왜 포기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