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따풀 2024: 함께 말 차리기
지난 글에 이어서 <한국인에게 나는 누구인가> 책의 '05. 나와 나다' 내용을 묻고 따지고 풀어봅니다.
다시 보아도 놀라운 내용입니다.
한국인은 낱낱의 존재를 나는(生) 것으로 말할 뿐만 아니라, 존재가 나는 시간과 공간 또한 나는 것으로 말한다. 한국인은 낱낱의 존재가 나기 위해서 시간인 때가 나야 하고, 공간인 틈이 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근거로 제시한 포기말[1]에 다시 한번 감탄합니다.
한국인은 때에 초점을 맞추면 '때때로 궁부한다'고 말하고, 틈에 초점을 맞추면 '틈틈이 공부한다'고 말한다.
이어서 존재에 대한 표현도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한국인이 '~이/가 나다'에 담아내는 존재의 드러남은 매우 근원적인 것이다. 존재는 때, 맛, 빛, .... 멋, 말로써 드러나 다른 것과 함께 어울려 끊임없이 일어남으로써 존재다운 것으로 나아갈 수 있다.
여기서 '존재다운'을 읽을 때는 언젠가 최봉영 선생님께 들을 말씀 때문인지 '아름다움'이 연상되었습니다. 그리고, '드러나 함께 어울린다'는 표현은 고스란히 <우리의 터전인 '쪽인 나' 그리고 變-易-化>의 주제를 관통하는 듯했습니다.
제가 쓴 글이지만 다시 훑어보니 '쪽 팔리다'의 뜻이 조금은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우리를 이루는 쪽으로 혹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나를 보기 때문에 '쪽 팔린다'라고 하는 것이군요.
한편, 다음 포기말은 최봉영 선생님이 말씀하신 사람의 정의를 떠올리게 합니다.
존재가 불, 열, 싹, 내, 맛, 멋, 말 따위로 드러나는 것은 생명의 드러남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한국사람에게 사람이란?>에서 그 내용을 찾아봅니다.
한국말에서 사람은 ‘살다’, ‘살리다(살+리+다)’에 바탕을 두고 있는 말이다. 사람은 온갖 것이 가진 살리는 힘을 살려서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임자를 말한다.
마침 최봉영 선생님이 어제 페이스북에 올린 ⟪‘살다’와 ‘살리다’와 ‘사람’과 ‘살’⟫이란 글도 있습니다. 과거에 기록하신 글에 업데이트가 있었을까요? 이 글을 쓴 후에 뒤이어 풀어보기로 하겠습니다.
뒤이어 '날'에 이런 심오한 뜻이 있었다는 사실은 부끄럽게도 처음 책을 읽었을 때도 눈치채지 못했던 듯합니다.
모든 생명은 해가 빛과 불로써 나고 지는 것에 기대어서 나고 지는 일을 이어나간다. 한국인은 해가 나고 지는 일을 온전히 이룬 것을 날이라고 부른다.
손때[2]를 묻히는 일로 기억도 만들 겸 <낱말의 뜻을 깊고 넓게 묻고 따지는 일의 소중함> 실천을 위해 사전을 찾아봅니다. 다양한 풀이가 있지만 '나'와 연관시킨 흔적은 없습니다.
「2」 하루 중 환한 동안.
표준국어대사전의 분명한 한계를 보면서 <나를 나답게 만드는 삶의 차림판>에서 인용했던 최봉영 선생님의 글이 떠오릅니다.
학자들에게 한국말은 그냥 일상적으로 쓰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한자 사전에서 日(날 일) 자를 찾아보니 '빛'이 바로 '드러남' 그 자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됩니다.
어렴풋하게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빛'도 비슷한 의미로 유대인들의 사회에서 발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더불어 <일상은 단편이 아니라 선물처럼 주어지는 시간의 연속이다>을 썼던 그날(!)의 감성도 되돌아봅니다. 그리고 그날은 간과했던 '하면 되는'이라는 정혜신 님의 말씀 속의 단어가 다시 눈에 띕니다. '하면'은 빛을 활용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주어진 일상(日常)은 새로운 날이나 드러내서 '하면' 된다는 말씀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최봉영 선생님께 한국말 '하다'의 기원을 들었던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포기말입니다.
생명은 해의 힘에 기대어서 나이인 살을 먹어간다. 해는 본디 ㅎ+ · +ㅣ, 곧, '하는 이' 또는 '하게 하는 이'로서 모든 것이 일어나게 하는 바탕과 같다.
해가 날을 만드니 정말로 중요한데, 왜 한국말 '날'이나 '해'를 통해서는 배우지 못했을까요? 태양신을 중시하던 서양의 문화는 배우면서 말이죠. 다시 한번 다음 말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학자들에게 한국말은 그냥 일상적으로 쓰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다음으로 또 신묘한 포기말(문장)이 이어집니다.
시간의 뉘가 겹겹이 쌓여 가는 것을 좇아서 생명의 뉘가 겹겹이 쌓여 간다.
뉘라는 말이 생소해서 사전을 찾아봅니다.
쓿은쌀 속에 등겨가 벗겨지지 않은 채로 섞인 벼 알갱이.
어릴 적에 봤던 뉘를 떠올릴 수 있었지만, 또 '쓿다'라는 모르는 단어가 등장하네요.
거친 쌀, 조, 수수 따위의 곡식을 찧어 속꺼풀을 벗기고 깨끗하게 하다.
'쓸다'와 어원이 비슷할 듯한데, 지금은 안 쓰는 말이 되어 버린 듯합니다.
시간의 뉘와 생명의 뉘의 연관성 그리고 앞서 살펴본 일상을 개념은 얼마 전에 본 페벗 님의 다음 말씀과 섞여 하나의 생각을 만듭니다. 오늘 어떻게 사느냐가 쌓이면 습관으로 굳어져 나의 행동을 지배한다는 생각이죠.
[1]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문장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포기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학습법과 창의성 모두 기억이 핵심이다>에서 인용한 박문호 박사님의 말, '내 감정의 손때를 묻히라는 겁니다'에서 유래합니다.
(51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51. '되다'와 삼국시대의 풍류(風流)를 알게 하는 실마리
55. 과연 사람의 말이 서로 엮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58. 나와 남은 모두 난 것으로서 서로 기대어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