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상을 차릴 알고리듬
지난 글에서 다루다 만 페벗 김영식 님의 글 <수행>을 마저 묻고 따져서 풀어봅니다.
문장 즉 포기말[1] 단위로 보겠습니다.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 수행의 목적입니다.
생로병사란 표현은 평소 제가 잘 떠올리지 않는 개념입니다.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제 일상에 관념적으로 끼치는 영향의 빈도는 높지 않다는 말입니다.
다음 포기말로 이어지면서 '생로병사'를 그냥 우리 삶의 보편적 틀로 이해하고, 표현 자체는 무시합니다.
생로병사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즉, 모든 괴로움으로 글을 읽기로 합니다.
대번에 공감할 수는 없으나 몇 번 읽다 보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난다고 표현을 했지만, 괴로움이 그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과 점차 무관해지는 것입니다.
괴로움은 내장 어딘가에서 비롯한 것일 수도 있고, 감각기관과 결부된 느낌에 따른 것이거나 과거 기억이 가져온 자극이 혼재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걸 꼭 당장의 내 문제로 볼 것인지를 우리는 판단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전에도 김영식 님의 글로 비롯해서 썼던 <일상을 차리기 위해서는 우선 조심해야 한다>와 이어지는 내용인 줄도 모르겠습니다.
다음 포기말로 갑니다.
무관해진다는 것은, 괴로운 줄을 알기만 할 뿐 그것을 어찌하려고 조작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조작하지 않는다? 무시하는 걸까요? 다음 포기말을 보면서는 평소 괴로움을 조작하는 행동을 했을 법한데 분명하게 떠올릴 수 없습니다.
그러는 이유는 조작하지 않을수록 괴로움이 오히려 더 빨리 그치기 때문입니다.
앞서 썼던 <어떻게 내가 무엇을 모른다는 것을 알 것인가?>의 내용 일부와 럼즈펠드의 4 사분면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아직 '나'를 조작하려는 노력이라는 말을 제 경험과 연결하지 못하는 듯합니다.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일은 노력한 결과로 얻는 것이 아니라 '나'를 조작하려는 노력이 그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제가 익숙한 표현으로는 외면(外面)하는 일이 '조작'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의구심을 만드는 포기말입니다.
사실은 누구든지 이미 벗어나 있는 상태이고 예외가 없기 때문에 진리라고 합니다.
이미 벗어나 있는 상태인데, 왜 벗어나야 한다고 느낄까요?
그렇지 않다며 부인하고 외면하다가, 조작하여 얻으려고 하니 그르칠 뿐입니다.
역시나 '조작하여 얻으려 한다'는 말이 경험과 결부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이해하고, 무관해지는 습관이 생기며, 그 이해와 습관을 보호하고 유지하다 보면 저절로 끝나는 일입니다.
어렴풋하게 어디선가 읽은 내용이 떠오릅니다. 동물은 쉬어야 할 때가 되면 그대로 쉬는데, 인간은 그걸 모른다고 했던 듯합니다. 한편, '동물'로 제가 쓴 글을 검색하다가 <생각 과잉 상태와 생각 걷어차기>에서 인용했던 김영식 님의 글을 다시 찾았습니다.
야생의 동물들은 초식과 육식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대단히 조심스럽습니다.
조심스럽게 관찰하면 서두르지 않을 수 있을까요?
서두르지 않으면 오히려 빠르고 쉽습니다.
[1]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문장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포기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5. 일상에 마주하는 감정과 문제를 비슷하게 인식하는 법
10. 동기부여를 일관성 있는 흐름으로 바꿀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