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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May 27. 2024

어떻게 내가 무엇을 모른다는 것을 알 것인가?

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

지난 글에 이어 틱낫한의 <고요히 앉아 있을 수만 있다면>의 2장 <고통을 알아차리고 안아 주기>를 읽고 제 삶을 위해 쓰는 글입니다.


직시란 말이 떠올린 개인적인 경험

한 줄의 글이지만, 많은 생각을 떠오르게 하는 글입니다.

고통을 변용시키는 기술의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의 고통으로 되돌아와 그것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변용(transforming)시키려면 먼저 마주해야 합니다. 당연한 이치죠. 하지만 작년에도 <외면(外面)하기와 직면(直面)하기>에 썼듯이 외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지어 알면서도 말이죠.


먼저 직시와 직면의 차이를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직시는 直(곧을 직)과 視(볼 시)[1]를 씨말로 하는 낱말로 다음 풀이를 가집니다.

「1」 정신을 집중하여 어떤 대상을 똑바로 봄.
「2」 사물의 진실을 바로 봄.

직면 풀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直(곧을 직)과 面(낯 면)[2]으로 구성된 낱말입니다.

    어떠한 일이나 사물을 직접 당하거나 접함.  

의미 차이가 미묘한 뉘앙스 수준이라 여겨집니다. 직면이란 단어가 저에게 연상시키는 느낌은 2017년 즈음의 말습관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가 당시 <계획은 개나 주자>는 구호와 함께 동료들과 지인들에게 자주 인용한 타이슨의 명언이 있습니다.

출처: 구글 이미지 검색


저에게 타이슨의 명언은 두 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명언을 인용하는 일과 별개로 제 개인적으로는 '일단 한 대 맞고 시작하자'라는 뜻을 갖고 있었습니다. 정확하게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TDD의 Fail과 삶의 직면(直面)에 대하여>에 있는 기록과 대학 시절 후배의 증언(?)에 따르면 시행착오를 피하려고 지나치게 노력하는 제 성격에 바탕이 된 듯합니다.


그래서, 시행착오를 피하려 하지 말고 과감하게 부딪히자고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과정에서 타이슨의 명언을 활용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떻게 내가 무엇을 모른다는 것을 알 것인가?

그런데 직면 대신에 직시라고 하면 최근에 <문제의 근원은 대부분 당신 안에 있다>를 쓴 덕분인지 로널드 럼즈펠드의 숨은 천재성이라고 이름 붙은 4 사분면이 떠오릅니다.

메타 인지 작동을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을 보이게 해야 한다는 생각과 더불어 말이죠.

실타래를 풀려면 실이 엉켜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시작할 수 있다


끝없는 머릿속 대화

다음 줄 역시 몇 가지 생각을 떠오르게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밤낮으로 끝없이 머릿속에서 대화를 진행합니다.

가장 먼저는 바로 <우리는 숨을 쉬는 유기체이고, 동시에 욕망하는 인간이다>를 쓰면서 만난 문장(포기말)입니다.

살아가는 바탕이 숨을 쉬는 일에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육체노동이 줄고, 지식 노동과 과잉 소비가 늘어나면서 숨 돌리는 것을 잊은 듯한 세태 인식도 떠오릅니다.

한국인은 일을 하다가 숨이 차거나 막히면 '숨 좀 돌리고 하자'

그리고, 어쩌면 이렇게 묻따풀 하는 힘의 기원이라고 할 수도 있을 20년 전 경험도 떠올라 관련 기록을 인용합니다.

발표가 끝나자마자 대표님 전화가 왔다. 어땠냐고 물으셨다. 발표 결과를 묻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여유가 어떤 조건에 다다르면 그때야 생기는 것인 줄 알았는데, 노력해서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고 고맙다는 말을 했다. 아니, 그렇게 기억하지만, 실제로 뭐라 답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벌써 18년이 지난 일이니까.

한편, 머릿속 대화 즉, '속말'이 가질 수 있는 어두운 면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너 게임과 마음챙김

다시 책으로 돌아갑니다.

과거를 되새김질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호흡을 멈추는 일은 없듯이, 고통스러운 상황이 올 때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위 다발말[3]을 읽자 <새롭게 길들여지는 습관의 방향과 관성력 키우기>를 쓴 덕분에 <이너 게임>과 <고요히 앉아 있을 수만 있다면>를 닮은 꼴로 볼 수 있게 됩니다.

물론, 당연히 차이는 있습니다. <이너 게임>은 응용할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테니스 코칭을 전제로 한 훈련이니까요.

이너 게임이란 선수가 집중력 상실이나 긴장, 자신감 저하, 자책과 같은 장애물에 맞서 마음속에서 펼치는 경기를 말한다. 간단히 말하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는 걸 방해하는 모든 정신적 습관을 극복하는 것이다.


사랑의 구체적 실체는 제대로 된 피드백

글이 길어져서 다음 다발말에 대한 묻따풀로 이 글은 마쳐야겠습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 그리고 다음 순간 일어나는 일에 강하게 집중할 수밖에 없지요. 붓다께서는 음식 없이 살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비단 살아 있는 존재의 육체적 존속뿐 아니라, 마음의 상태에 대해서도 진실입니다. 사랑은 늘 함양되어야 지속될 수 있습니다. 고통 또한 그것을 붙잡고 계속 먹이를 줄 때 지속됩니다.

이 책의 글들을 이해하는 배경에는 수년에 걸쳐 세 번이나 읽은 <당신이 옳다>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 아직 제 말로 분명하게 요약할 수는 없는데, 다행히 <사랑의 구체적 실체는 제대로 된 피드백>에서 인용한 덕분에 이명수 님의 명언으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구체적 실체는 제대로 된 피드백이란 생각을 자주 한다.


그리고 <당신이 옳다>의 실천과 관련하여 두 가지 생각을 더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둘째 아이의 눈물을 통해 배운 교훈을 나 스스로에게도 적용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첫 포기말의 다음 매듭말[4]이 영향을 받은 연상입니다.

자신의 고통으로 되돌아와 그것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렇게 받은 피드백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직시란 점입니다. 쓰면서 보니 두 번째는 <당신이 옳다>가 <대체 뭐가 문제야>와 결합을 이뤄서 알려준 내용입니다.

이렇게 고통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앞서 인용한 고통의 지속을 막을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고통 또한 그것을 붙잡고 계속 먹이를 줄 때 지속됩니다.

이는 <지금 이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리게 하는 힘>에서 인용한 고통을 키우지 않는 일과 연결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고통의 씨앗에 물을 주지 않음으로써 말이지요.


주석

[1] 한자 사전을 찾은 결과 일부입니다.

[2] 한자 사전을 찾은 결과 일부입니다.

[3]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구절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다발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4]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어구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매듭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난 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 연재

(16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16. 올바른 정의를 찾는 것은 문제 해결사의 의무다

17. 변화 속에서 차원을 달리할 수 있게 해 주는 로드맵

18. 나만의 스코어보드가 없다면 실패하는 투자다

19. 불편을 겪는 사람의 문제가 되게 하라

20. 허상의 문제로 다루는 힘 그리고 유머라는 지능의 날개

21. 누구를 불편하게 할 것인가? 그것이 내 문제라면?

22. 가치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23. 고통을 다루는 방법: 욕심과 고통과 임자를 연결시키기

24. 고통과 행복은 언제나 변하는 유기물적인 것이다

25. 메타 인지, 본성의 무관심성 그리고 실천적으로 바라보기

26. 문제의 근원은 대부분 당신 안에 있다

27. 지금 이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리게 하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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