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
이 글은 틱낫한의 <고요히 앉아 있을 수만 있다면>의 1장 <고통을 다루는 방법>을 읽고 제 삶을 위해 쓰는 글입니다. 먼저 이 책은 <듣기의 말들>과 <욕쟁이 예수> 두 권의 책에서 인용된 내용을 보고 알게 된 책입니다.
결과적으로 종교인이 아닌 제가 목사님이 쓴 글에서 스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격입니다. 이러한 공교로움을 <욕쟁이 예수> 내용에서 목사이기도 한 저자가 다룬 내용이 있습니다.
교계에서 이런 글을 찾지 못해 다시 한번 틱낫한 스님에게 신세를 지는 점이 아쉽다. "그냥 대지 위를 천천히 걸어라. 차가운 아스팔트가 아니라 아름다운 지구별 위를 걷는다고 생각하라. 다음, 생각을 놓아 버리고 그냥 존재하라. 숨을 들이쉬면서, 마음에는 평화. 숨을 내쉬면서, 얼굴에는 미소. 그대 발걸음마다 바람이 일고, 그대 발걸음마다 한 송이 꽃이 핀다. 나는 느낀다.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경이로운 순간임을. 당신이 이미 도착했다.You have arrived."
책을 뒤따라 읽기 전에 박총 작가님의 <욕쟁이 예수>를 읽고 바로 따라 한 행동이 있으니 바로 고무장갑을 끼지 않고 맨손으로 설거지를 하는 일입니다.
틱낫한 스님은 <깨어 있는 마음의 기적>에서 설거지를 즐기는 비결을 두고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의 온 마음과 몸을 다하는 것"이라고 했다.(이럴 수가. 우리는 바울이 한 말과 똑같은 말을 노승에게서 듣는다.)
자, 이제 책 내용을 보겠습니다.
행복을 즐기는 데 있어 고통이 제로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실은, 행복의 기술이란 고통을 잘 겪어 내는 기술이기도 하지요.
음, 최근 불안이 만들어내는 고통이 일종의 굴레가 되었던 경험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저에게 꼭 필요한 책이란 생각과 함께 '행복의 기술'이란 매듭말[1]이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기술'이란 점에 쉽게 수긍하게 된 데에는 과거에 '감사 목록 쓰기'를 통해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인지하는 기술을 익힌 경험이 깔려 있습니다.
이번에는 '변용'이라는 낯선 표현이 들어간 다발말[2]을 만납니다.
고통은 변용이 가능하니까요. 입을 열어 "고통"이라 말하는 순간, 고통의 반대편이 동시에 이미 거기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고통이 있는 바로 그곳이, 행복이 있는 자리입니다.
인식을 하면 한계도 알게 된다는 말일까요? 책 뒷면을 보면 변용에 대한 영어 표현은 'Transforming'이란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어 변용을 사전에서 찾아볼까요? 뜻밖의 풀이입니다. 變(변할 변)과 容(얼굴 용)을 씨말로 하는 낱말입니다.
용모가 바뀜. 또는 그렇게 바뀐 용모.
일단, 의구심을 다른 수단으로 푸는 대신에 책을 계속 보기로 합니다.
행복의 기술이란 동시에 고통을 잘 경험하는 기술이기도 합니다. <중략> 고통을 어떻게 하면 잘 경험하는지 아는 것은 진정한 행복을 깨닫는 데 필수적입니다.
앞으로도 자주 고통을 견뎌야 한다고 믿기 때문인지 꽤나 반가운 말들입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포기말[3]입니다.
우리가 행복한 상태와 고통스러운 상황 양측 모두를 잘 파악하고 거기 지혜롭게 관계 맺는 방법을 배울 수만 있다면, 삶은 더욱 즐거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래전에 읽은 윤구병선생님의 '있음과 없음' 덕분에 빛이 있어야 어둠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고, 거기서 나아가 '고통과 행복'의 관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행복한 상태와 고통스러운 상황 양측 모두를 잘 파악'해야 한다는 매듭말을 거듭 읽다 보니 요즘 읽고 있는 <대체 뭐가 문제야>와 결합이 일어나 다음 포기말이 머릿속에서 튀어나옵니다.
문제란 바라는 것과 인식하는 것 간의 차이다
몇 가지 질문이 이어집니다.
고통과 문제는 어떻게 다른가?
바라지 않으면 고통도 사라지는가?
정교하게 인식하면 고통도 달라질 수 있는가?
질문에 답을 하는 대신에 두 단어에 대해 사전을 찾아봅니다. 먼저 고통은 씨말에 따르면 苦(괴로움)과 痛(아픔)입니다.
몸이나 마음의 괴로움과 아픔. ≒고한.
괴로움과 고통의 차이를 앍고 싶어서 괴로움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순환 참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몸이나 마음이 편하지 않고 고통스러운 상태. 또는 그런 느낌. ≒고.
한자 사전을 찾아볼 필요가 있네요. 괴로움은 '쓴 맛'에서 비롯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아픔은 번져나가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문제도 사전을 찾아봅니다. 問(물을 문)과 題(제목 제)를 씨말로 합니다.
「3」 해결하기 어렵거나 난처한 대상. 또는 그런 일.
고통과 비슷하게 볼 수 있지만 씨말에서 분명한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다음 풀이를 보니 문제가 '고통'을 유발할 수 있는 것으로 관계를 지어 볼 수도 있겠습니다.
「4」 귀찮은 일이나 말썽.
하지만, 문제는 전혀 다른 뜻도 있습니다.
「5」 어떤 사물과 관련되는 일.
낱말의 바탕을 알아 가는 중에 마침 또 묻따풀 했던 내용인 <욕심과 다스림: 추진력인 욕심을 바로 알기> 경험이 중첩됩니다. 여기서는 문제가 야기하는 고통을 '불편'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 불편을 야기한 출처가 바로 누군가의 욕심이란 사실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누구의 욕심으로 발생한 누구의 불편인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면 누구의 불편이 사라지고, 누가 행복해질 것인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아마 이런 식의 사고 작용이 '행복한 상태와 고통스러운 상황 양측 모두를 잘 파악'하는 일과 닮은 꼴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글로 다 쓰지 못한 내용을 그림으로 그려 보았습니다.
이렇게 그린 그림이 바로 인용한 포기말속의 '거기'를 나타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행복한 상태와 고통스러운 상황 양측 모두를 잘 파악하고 거기 지혜롭게 관계 맺는 방법을 배울 수만 있다면, 삶은 더욱 즐거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한편, 고통을 느끼던 즈음에 썼던 <일상은 단편이 아니라 선물처럼 주어지는 시간의 연속이다>이 자연스레 떠올랐습니다. 바로 일상에서 위에 그린 그림과 마주할 수 있다면 고통을 피하지 않고, 직면(直面)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불어 '지혜롭게 관계 맺는 방법'이 바로 정혜신 선생님의 표정이 보여주는 다정한 전사의 태도로 차분하게 이를 포용하는 과정에서 익힐 수 있는 기술이란 생각을 합니다.
글이 길어져서 다음 편으로 남은 내용을 넘깁니다.
[1]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어구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매듭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구절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다발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3]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문장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포기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11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13. 끝없는 사슬로 나타나는 문제
14. 부적합을 발견하지 못하다
15. 문제의 본질 파악하기
17. 변화 속에서 차원을 달리할 수 있게 해 주는 로드맵
20. 허상의 문제로 다루는 힘 그리고 유머라는 지능의 날개
21. 누구를 불편하게 할 것인가? 그것이 내 문제라면?
22. 가치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