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
지난 글에 이어 틱낫한의 <고요히 앉아 있을 수만 있다면>의 1장 <고통을 다루는 방법>을 읽고 제 삶을 위해 쓰는 글입니다.
책은 붓다의 네 가지 고귀한 진리를 설명합니다. 붓다의 네 가지 고귀한 진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통이 존재한다.
고통을 만들어 내는 일련의 작용이 존재한다.
고통이 멈춘다(즉, 행복이 있다).
마지막으로 고통의 종말(행복의 서작)로 인도하는 일련의 작용이 존재한다
메타인지를 통한 인지를 떠올리게 하는 포기말이 이어집니다.
고통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수용하고 그 뿌리를 깊이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에 끝없이 되먹임 하는 습관을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동시에 행복으로 향하는 길을 찾을 수 있지요. 바로 이것이 붓다께서 말씀하시는 바입니다. 고통에도 이로운 점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뛰어난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직면(直面)이라는 말에 담아서 나도 모르게 갈구하던 것이 위 텍스트에 담긴 내용일 수도 있겠습니다. 처음 '고귀한 진리'라는 표현을 볼 때 거북했던 마음을 돌아봅니다. 무엇이길래 대체 '고귀하다고 할까?' 하는 마음이 무의식에 있었던 듯도 합니다.[2] 그런데 지금 보니 수긍이 갑니다.
반가운 '정원 관리' 메타포가 등장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고통의 씨앗에 물을 주지 않음으로써 말이지요.
그간 썼던 다수의 글들로 인해 정원 관리 행위는 너무나도 익숙합니다. 하지만, 그 대상은 기업 문화, 책과 독서 습관, 시간 관리, 코드 정리 따위였습니다. 결코 우리의 마음도 그 대상으로 생각하지는 못했습니다.
다시 만나도 놀라운 포기말입니다. 인식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 준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몸의 긴장을 풀려는 그 시도는 우선 그것이 거기 존재한다는 자각을 하지 못한다면 효과가 없습니다.
이는 <문제의 근원은 대부분 당신 안에 있다>에서도 인용했던 <Tidy First?>의 포기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실타래를 풀려면 실이 엉켜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시작할 수 있다
나아가서 TDD를 처음 익힐 때 극복해야 했던 거부감을 담고 있는 질문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굳이 실패하는 코드를 실행해서 불편함을 맛보아야 하는가?
지금 생각해 보면 스스로 한창 코딩을 잘한다고 믿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자신의 민낯을 정교하게 직면(直面)하는 일은 굉장히 기피하고 싶었던 일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다음 포기말들은 <여유를 만들어, 자신에게 여유를 주라>에 기록했던 일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동물들은 멈춤이 가장 좋은 치유법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압니다. 그들에게는 의사도, 약사도, 약국도 필요 없습니다. <중략> 육체를 쉬게끔, 긴장을 이완하게끔, 그리하여 치유가 일어나게끔 허용하지 않습니다.
여유를 만드는 일이 치유의 시작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첫 회사 사장님이 저에게 심어준 경험의 씨앗이 정말 굉장한 것이었음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무의식적으로 직면(直面)을 추종하던 이유가 다음 포기말에 담긴 듯합니다.
자신의 고통을 마주할 수 없다면, 우리는 결코 현존할 수 없고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챙김에 대한 설명이 등장합니다.
마음챙김이란 현존하며 머무를 수 있는 능력이며, 지금 이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게 해 줍니다.
지난주에 마음챙김을 실행해 보고 <햇살처럼 펼쳐 나가는 사는 '맛' 그리고 새로운 독서법>에 일부를 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도 주말에 또 실천했습니다. 잠시 그 기록으로 넘어갑니다.
<고통과 행복은 언제나 변하는 유기물적인 것이다>를 쓰면서 개념으로만 익힌 '행복 기술'을 빠르게 실행해 봅니다. 지난 시간에도 언급한 <준비없이 아기발걸음 바로 실천하기> 사례로 볼 수도 있습니다. 책을 다 읽거나 충분히 이해할 때까지 실행을 미루는 대신에 의도된 경험 설계로 시행착오를 계단 삼아 학습을 가속화시키려는 것이죠.
주말에 아이들과 해변으로 향했습니다. 평일에 함께 보낼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주말에는 가급적 모든 시간을 아이들과 보내고 있죠. 하지만, 아직 5월이라 바닷물에 들어갈 줄은 몰랐고, 수영복이나 여벌 옷을 챙기지 못해 아이들과 노는 데에 제약이 있었습니다.
그렇더라도 가급적 현존[3]하려고 다시 말해 아이들 옆에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아들이 둘이다 보니 둘이서 어울리는 것으로 충분할 때가 있고, 그대로 서서 아이들의 보호자 역할만 할 때면 지루해서 잡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보이는 지점에서 돗자리를 펴고 있는 아내 옆으로 갑니다. 아내는 아이들의 안전을 확인하며 휴대폰으로 다른 볼일을 보고 있습니다. 저는 차에 있던 우산과 책을 챙겨 옵니다.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자세로 아직은 서늘한 바람을 즐깁니다. 우산 덕분에 햇볕을 가릴 수 있다는 점과 평온하고 느긋하게 책을 읽는 여유에 작은 행복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책 읽기가 지겨워질 때가 되면 일어나서 아이들에게 향합니다. 그러는 중에 아내가 말을 걸면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듣습니다. 행복 기술을 실천하기 전에 비해 조금이나마 행복이 늘었고, 나도 모르게 마음챙김을 하게 되는 순간이 더 늘었다고 여겨집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책으로 돌아가 마음챙김에 대해 복습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듯 마음챙김이란 언제나 무엇인가에 대한 마음챙김입니다. <중략> 지금 이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리게 하는 힘. 그것이 마음 챙김입니다.
감사목록 쓰기나 메타 인지 정도의 방법으로 간혹 알아챈 순간들의 이름이 '마음챙김'이었던 듯합니다. 명상 책에서 접할 때는 다소 오해를 했는데, 지금 보니 마음에 드는 이름입니다.
마음챙김 만들기는 아주 어렵지 않습니다.
우선 멈추어서 의식적인 숨을 쉽니다. 들숨과 날숨에 온전히 주의를 기울입니다. 멈추어서 이런 식의 호흡을 할 때 우리는 몸과 마음을 하나로 합치고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옵니다.
물론, 평소 스스로 항상 서두른다는 경향성을 안다면 말이죠.
몸과 마음이 함께 할 때만이, 우리는 비로소 진정으로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는지 이제는 (전과 달리) 이런 이야기들에 쉽게 수긍이 갑니다.
어쩌면 우리는 한동안 자신의 몸에 충분히 친절하지 않았을는지도 모릅니다. 몸에서 긴장, 통증, 스트레스가 알아차려질 때, 마음챙김식의 온전한 자각 속에 그것을 푹 담글 수 있습니다. 그렇게 치유가 시작됩니다
다음 포기말은 또 <당신이 옳다>에서 나에게 공감할 수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도 공감할 수 있다고 강조한 내용이 떠오릅니다.
만일 내면의 두려움과 절망에 사로잡힌다면, 다른 이들의 고통을 없애는 데 도움을 줄 수 없게 됩니다.
[1]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문장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포기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낱말의 뜻을 깊고 넓게 묻고 따지는 일의 소중함> 실천으로 사전을 찾아봅니다. 씨말은 高(높을 고)와 貴(귀할 귀)이고, 풀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훌륭하고 귀중함.
[3] <낱말의 뜻을 깊고 넓게 묻고 따지는 일의 소중함> 실천으로 사전을 찾아봅니다. 씨말은 現(나타날 현)와 存(있을 존)이고, 풀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2」 현재에 있음.
한자 사전을 찾아보고 요약한 내용도 올립니다.
(16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17. 변화 속에서 차원을 달리할 수 있게 해 주는 로드맵
20. 허상의 문제로 다루는 힘 그리고 유머라는 지능의 날개
21. 누구를 불편하게 할 것인가? 그것이 내 문제라면?
22. 가치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23. 고통을 다루는 방법: 욕심과 고통과 임자를 연결시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