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영회 습작 Jun 16. 2024

몸과 마음을 하나로 하기 위한 가장 작은 실천부터

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

지난 글에 이어서 틱낫한의 <고요히 앉아 있을 수만 있다면>의 2장 <고통을 알아차리고 안아 주기>를 읽고 제 삶을 위해 쓰는 글입니다.


첫 번째로 할 일은 멈추어 고통을 인식하기

<고통에 먹이 주기를 피하기 위한 직시(直視)>를 썼지만,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말로 기분을 낫게 하는 것이 아닌, 잠깐 동안 마취를 시키는 데 지나지 않고, 이내 기분은 오히려 더 나빠지지요. 자신의 고통을 가리려는 목적으로 하는 소비는 결코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깊이 바라볼 수 있는 힘과 기술을 갖추기 위해서는 영적인 연습이 필요하지요.

포기말 단위로 보면 '자신의 고통을 가리려는 목적으로 하는 소비'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분명히 동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통을 깊이 바라볼 수 있는 힘과 기술'은 경험적으로 아주 생소합니다. 고통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깊이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것이고 기술로 부린다는 말은 더욱 생소합니다. 하지만, 덕분에 책을 읽는 목표가 생겼네요.


첫 번째로 할 일은 멈추어 고통을 인식하라고 합니다.

고통이 일어나면, 첫 번째로 할 일은 멈추어 서고, 호흡을 따라가고, 그리고 고통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 불편한 감정들을 부정하거나 피하려 애쓰지 마세요.

평소에 저를 기준으로 보면, 당장 굉장히 세밀하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다행히 쉬운 방법부터 단계적으로 알려 줍니다.

마음을, 몸을, 그리고 우리의 의도를 현존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챙김의 호흡이 필요합니다. 의식적인 한 번의 호흡으로, 몸과 마음을 하나로 만들고,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지요.

현존으로부터 시작하라고 합니다. 먼저, 몸에서 떨어져 나간 생각을 데려 오라는 말 같기도 합니다.


호흡으로 멈추고 주의를 기울이기

앞서 손때를 묻힌 덕분에 고통을 표현한 직선이 떠오릅니다. 생각을 지금으로 불러오면 어쩐지 '인식한 상태'와 '바라는 것'과의 간격이 좁혀질 듯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아무튼 이렇게 하면 얻을 수 효과에 대해 말합니다.

자신의 고통에 대한 따듯한 이해를 갖게 되지요. 완전한 주의를 기울이며 단지 두세 번의 호흡만 해도, 과거에 대한 후회와 슬픔이 어느새 멈춰 있음을 눈치챌 지도 모릅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그리고 불확실함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마침 잠깐 무기력한 기분이 들 때, 최근 배운 심호흡을 실천해 보았습니다. '완전한 주의'는 실행하지 못한 듯한데, 분명히 생각보다는 감각에 예민해졌습니다. 먼저 주변의 소음이 들리고, 등과 어깨를 비롯해서 긴장하고 있는 몸의 감각이 느껴졌습니다.


현존에서 멀어진 생각이 소멸된 점은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자신의 고통에 대한 따듯한 이해'는 전혀 감을 잡기 어렵네요.


낯설기만 한 육체와의 소통

육체와의 소통이란 말은 2019년 즈음 도올 선생의 어떤 영상에서 듣지 않았다면 여전히 생소하다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육체를 갖고 있지만 그것과 늘 소통을 유지하지는 않습니다. <중략> 업무에, 컴퓨터에, 핸드폰에, 대화에 사로잡혀 육체에 머물고 있음에도 그 사실을 잊을 수 있지요.

사실은 그전에 노화 현상에 대한 인식이 생긴 것이 먼저 작용했겠죠. 몸을 챙기기 시작했지만, 망가진 부분이 더 나빠지지 않게 한다는 생각에 머물고 있는 듯합니다. 몸과의 소통은 아직은 생소하고 멀게 느껴집니다. 더 생소한 포기말(문장)이 있습니다.

이 내면의 아이의 목소리는 무시되곤 합니다.

너무 무시해서 관성이 된 것일까요? 아니면 경험 자체가 없는 걸까요?

자신의 몸과 소통할 수 있게 되면, 자신의 감정과도 소통이 가능해집니다.

몸과 소통에 서툴기 때문에 감정과의 소통도 서툰 탓일까요?

치유 과정은 마음챙김의 호흡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치유란 말은 더 생소합니다. 세 차례나 반복해서 읽은 <당신이 옳다>에서도 여전히 생소한 개념이 '치유'였습니다.


몸과 마음을 하나로

실천해 보면 들숨에 주의가 몸과 가까워진다는 느낌은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이 몸과 함께하지 않는 것이지요. 숨을 들이쉬며 들숨에 집중할 때, 몸과 마음의 재결합이 일어납니다.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와 몸 안에, 느낌 속에, 그리고 주의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각하게 되지요. 마음을 몸에 되돌릴 때, 뭔가 경이로움 일이 벌어집니다.

그게 '몸과 마음의 재결합'일까요? 정신을 차리는 일과도 비슷한 듯합니다. 하지만, 어째서 '경이로운 일'이라고 할까요? 제가 충분히 주의를 집중하지 못하는 탓에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요?


다음 포기말에 어떤 단서가 있는 듯도 합니다.

호흡을 통해 마음을 몸으로 되돌리면, 생각을 멈출 수 있습니다.

생각을 멈추면 자유를 느낄 수 있을까요?

자유와 현존의 상태를 유지합니다. 마음이 더 명료해지고 그에 따라 더 좋은 의사 결정이 가능해집니다. 마음이 두려움, 분노, 걱정에 휘둘리며 내린 결정보다 명료하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내린 결정이 아무래도 훨씬 낫겠지요.


심호흡을 습관화하기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수준은 <심호흡이라는 일상 운영을 위한 단위 행동 양식>에서 다룬 내용 정도입니다. 이를 일상에서 자주 실천해서 습관을 만드는 일은 해나가야 하고, 조금씩이나마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지난 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 연재

(21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21. 누구를 불편하게 할 것인가? 그것이 내 문제라면?

22. 가치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23. 고통을 다루는 방법: 욕심과 고통과 임자를 연결시키기

24. 고통과 행복은 언제나 변하는 유기물적인 것이다

25. 메타 인지, 본성의 무관심성 그리고 실천적으로 바라보기

26. 문제의 근원은 대부분 당신 안에 있다

27. 지금 이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리게 하는 힘

28. 어떻게 내가 무엇을 모른다는 것을 알 것인가?

29. 문제의 궁극적 근원은 대부분 어떤 사람의 욕망이다

30. '어디'라고 쓰고 '누구'라고 읽는다

31. 문제의 인식과 문제의 정의는 전혀 다른 일이다

32. 필요로 하는 것을 갖기 전에는 뭐가 필요한지 모른다

33. 내가 정말로 해결안을 원하는지 보지 못하고 하는 일들

34. 고통에 먹이 주기를 피하기 위한 직시(直視)

작가의 이전글 무지를 여행지로 활용하고 체험 위주로 설계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