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따풀 2024: 함께 말 차리기
지난 글에 이어 <한국인에게 나는 누구인가> 책의 '14. 차림' 내용을 묻고 따지고 풀어봅니다.
무심코 쓰던 '차리다'라는 말의 바탕에는 암묵적일지라도 '법도'라는 기준이 있음을 알려주는 포기말(문장)입니다.
한국인은 어떤 것이 법도에 맞게 구실 할 수 있도록 가지런하게 만드는 것을 '차리다'라고 말한다.
다음 다발말[1]을 읽어 보면 '차리다'는 누리가 그러하듯이 함께 하는 것들이 '따로 또 같이' 어울리게 하는 말입니다.
한국인이 어떤 것을 차리는 것은 떨어져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함께 어울러서 서로 사무치게 함으로써 하나의 모두로서 구실 할 수 있도록 가지런히 만들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과 저것이 사무치는 것은 하나로 꿰뚫어서 서로 오고 갈 수 있도록 통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중략> 한국인은 낱낱으로 떨어져 있는 것들을 가지런히 차려서 서로 사무치게 함으로써 하나의 모두로서 함께 어울리도록 만든다.
차리다에서 차례가 나옵니다.
한국인은 어떤 것을 차리는 순서와 과정을 차례라고 말한다.
그리고 차림새도 나타납니다.
한국인은 어떤 것이 차례를 따라서 차려진 모습을 차림새라고 말한다.
알아차림을 바탕으로 차릴 수 있다고 합니다.
한국인이 어떤 것을 차리기 위해서는 차림의 바탕이 되는 것들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어떤 것의 본질, 목적, 수단, 방법 따위를 알아야 그것을 차릴 수 있다. 한국인은 차림의 바탕이 되는 것을 '알아차림'이라고 표현한다. 알아차림은 본질, 목적, 수단, 방법 따위를 알아서 차리는 것으로서 어떤 것에 대한 느낌과 앎을 차려 나가는 것을 말한다.
차림의 두 가지 갈래가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을 바탕으로 정신을 차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살아가는 일을 바탕으로 살림을 차리는 일이다.
제가 연재하며 익히는 중인 <내 일상을 차릴 알고리듬>의 단위를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데, 거기에 이름을 붙여 주는 포기말입니다. 먼저, 심호흡 따위의 수단으로 '정신을 차릴'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해한 마음챙김의 효용성과 일치합니다.
그리고, <꾸준하게 절제하며 자기 길을 걷는 방법>과 같은 식으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아우르는 차림을 '살림'으로 부를 수 있을 듯합니다. 다만, 최봉영 선생님의 정의와 국어사전이 주는 '살림' 풀이의 어감은 상당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1」 한집안을 이루어 살아가는 일.
「2」 살아가는 형편이나 정도.
아마 경제 공동체를 겸하던 조선시대의 가족 형태가 서구화(근대화) 과정에서 붕괴되면서 '살림'이라는 표현도 지극히 '돈과 세간'에 관한 것으로 제한된 듯합니다.
다시 책으로 갑니다.
한국인은 정신을 바로 차림으로써 염치나 체면 따위를 차릴 수 있다.
정신을 차린 다음 단계는 사회적 자아에 대한 차림이군요.
규모가 다른 세 가지 살림을 묶어서 생각해 보니 각 개체가 살아가기 위한 조건이라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인은 집안살림, 회사살림, 나라살림을 차림으로써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갖가지 일을 할 수 있다. 어떤 것을 차리는 것은 그렇게 해야 하는 까닭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포기말의 '그렇게 해야 하는 까닭'은 앞서 읽었던 '법도'나 '차리는 바탕'과 연결되는 매듭말[2]입니다.
한국말에서 '찷'[3]은 사물이 비롯하는 뿌리, 바탕, 근원 따위를 뜻하는 낱말이다. <중략> 사람이 더욱 근원적인 찷로 돌아가고자 하는 뜻을 담고 있다. 한국인은 어떤 것을 차리는 바탕을 '법'이라고 표현하는 일이 많다.
어원을 따라가 보니 말 안에 이미 그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정신 차리기는 여러 가지 행동을 차려서 하기 위한 선행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는 것은 다른 모든 차림, 곧 속, 염치, 체면, 예의, 실리, 실속, 살림, 회사 따위를 차리는 바탕이다.
최근에 썼던 글들 덕분에 조심하지 않으면 관성에 따라 혹은 반사적으로 행동하게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자각합니다.
하지만, 다음 포기말을 보면 마음챙김과는 분명 구분되는 행위(혹은 역량)임을 알게 됩니다.
사람이 정신을 차리는 것은 두 개의 마음, 곧 지각하는 마음과 생각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중략> 한국인이 '정신을 차리다'라고 말할 때에 사람이 차리는 일은 주로 생각하는 마음으로써 가지게 된 갖가지 지식과 기술을 가지런히 엮어가는 것을 말한다.
지금까지 이해한 마음챙김은 생각보다는 주로 지각하는 마음을 다루는 일에 가까운 듯합니다. 반면, 차리는 일은 생각하는 힘에 바탕을 둡니다.
한국인은 마음의 짜임이나 쓰임을 말할 때, '넋, '얼' , ‘혼’, '신, '정신과 같은 낱말을 비슷한 뜻으로 널리 쓰 고 있다. <중략> 한국인은 마음의 핵심을 넋으로 불러왔다. '넋이 나가다' 넋을 놓고 있다는 '정신이 나가다, '정신을 놓고 있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넋과 녀기다의 연관성에 대한 글을 읽다 보니 <바로 보고 녀기는 역량 그리고 바탕을 함께 하는 대화법>에서 묻고 따졌던 내용들이 떠오릅니다.
한국말에서 넋은 사람이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 여기는 바탕을 말한다. 여기다의 옛말은 '넉이다/너기다/녀 기다'로 넋과 넉이다는 뿌리를 같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생각에 이름 붙였던 매듭말인 '바로 보고 제대로 녀기는 역량'은 차릴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하겠습니다.
앞서 다루었던 '헤아림'과 구분되는 여기는 행위를 어림이라고 합니다.
한국인은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 여기는 것은 두 가지로 말한다. 하나는 헤아림으로써 여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림으로써 여기는 것이다. 사람이 헤아림으로써 여기는 것은 사람이 어떤 것의 속을 이루고 있는 알짜를 먹어 보고서 혀로써 맛깔을 여기는 것을 말한다. 이 때문에 사람이 헤아림으로써 여기는 것에서 얻는 앎과 느낌은 매우 확실하다.
어림이란 맛을 보지 않고 드러난 것만 보고 여기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사람이 어림으로써 여기는 것은 사람이 어떤 것의 밖을 이루고 있는 거죽을 쳐다보고서 얼굴을 여기는 것을 말한다.
최봉영 선생님은 얼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부연하셨습니다.
얼굴은 처음에 주로 어떤 것이 지니고 있는 모습, 형상, 형태를 뜻하는 말로 쓰였고, 나중에 낯을 뜻하는 얼굴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오늘날 머리에 있는 얼굴을 가리키는 것은 본디 '낯' 또는 '낯짝'이었다.
글이 길어져서 다음 글로 나머지 묻따풀 내용을 넘깁니다.
[1]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구절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다발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어구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매듭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3] 고어 표기가 되지 않아 비슷하게 표현한 글자입니다.
(71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72. 느낌에서 비롯하여 무엇을 어떤 것으로 풀어 알아봄
73. 느낌을 만든 알음이 엮이면서 맥락을 형성하여 앎이 된다
74. 우리는 숨을 쉬는 유기체이고, 동시에 욕망하는 인간이다
75. 마주해서 보면 느끼게 되고, 이를 헤아리면 맛이 난다
76. 한국인은 상황을 즐길 때 '살맛 난다'라고 말한다
77. 맛보는 과정을 통해 본성이 습성으로 드러나는 배움
78. 생각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키우는 다양한 맛과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