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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Jun 07. 2024

대상이 비춰 주는 빙산 속 나의 줏대와 잣대

묻따풀 2024: 함께 말 차리기

지난 글에 이어  <한국인에게 나는 누구인가> 책의 '11. 보는 일'과 '12. 보도록 하는 일' 내용을 묻고 따지고 풀어봅니다.


보는 일의 양방향성

다음 포기말은 보는 일의 '양방향성'을 깨닫게 합니다.

사람은 나의 밖에 있는 것들을 보아서 알아가고 알아 하는 일을 거듭하는 과정에 그것을 보는 내가 임자로서 이쪽에 자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아마 <마주해야 보인다, 본 것에 마음이 가면 녀긴다> 같은 글을 쓰기 전에는 저 포기말을 보고도 '양방향성'을 감지하지 못했던 듯도 합니다.

그리고 본 것을 여길 때 나도 모르게 생각이 작동한다는 사실도 다음 그림을 통해 환기합니다. 그때 내가 본 것과 그것이 주는 느낌을 바탕으로 생각을 형성합니다.


대상이 비춰 주는 빙산 속 나의 줏대와 잣대

다음 다발말[2]을 보면, 이때 대상뿐 아니라 임자인 나의 줏대와 잣대도 확인하게 된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사람은 나를 이루고 있는 갖가지 것들을 볼 수 있게 됨으로써 나에 대한 느낌과 앎을 갖게 된다. 사람은 나의 밖에 있는 것과 함께 나의 안에 있는 것을 아울러 잘 볼 수 있어야 세상을 더욱 잘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이전에 썼던 <새로운 차원을 공감하고, 얽힘을 풀어내고 얼개를 만들기>에서 그럭저럭 끌어다 쓸 만한 이미지를 발견합니다.

내 감정과 인식의 기저에는 명확하게 알 수 없는 다양한 경험이나 기억이 작용할 것입니다. 대상으로 드러난 것을 보고 나서 떠오른 기억은 역으로 대상에 대한 나의 축적된 느낌과 배경 지식을 비춰 준다고 하겠습니다.


지금의 인식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최근 함께 묻고 따졌던 <'어디'라고 쓰고 '누구'라고 읽는다>도 연관을 지을 수 있습니다. 빙산 아래의 무의식은 일됨의 맥락을 형성합니다.

주어진 상황(맥락)에서 나의 욕망과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욕망을 찾아야 내가 지금 '문제' 삼는 일들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내가 '확신이라는 우물'에 빠져서 보고 있지 않은지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 봅니다.

사람이 어떤 것을 보거나 보지 못하는 것은 두 가지 까닭에서 비롯한다. 하나는 볼 수 있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볼 수 있는 기회이다.

볼 수 있는 힘의 경우는 <확신이 나를 가스라이팅 하지 않도록>에서 다룬 사진기 비유처럼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부리고 싶은 욕망

'12. 보도록 하는 일'에서 밑줄 친 포기말을 인용합니다.

사람은 어떤 것으로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어야, 다른 사람을 제 뜻대로 부릴 수 있다.

<낱말의 뜻을 깊고 넓게 묻고 따지는 일의 소중함>을 실천하기 위해 사전에서 '부리다'의 뜻을 찾아봅니다.

「1」 마소나 다른 사람을 시켜 일을 하게 하다.

부리는 일이 보편적인 욕망이란 생각이 드는데, 다시 책으로 가 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드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임으로써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고자 한다. <중략>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크게 사게 되면 뛰어난 사람, 이름난 사람, 거룩한 사람 따위가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온갖 재주를 부린다.

이에 대한 주장은 여러 곳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피엔스>에서 본 뒷담화 이론에 대한 내용입니다.

사회적 협력은 우리의 생존과 번식에 핵심적 역할을 한다. 개별 남성이나 여성이 사자와 들소의 위치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보다는 무리 내의 누가 누구를 미워하는지, 누가 누구와 잠자리를 같이하는지, 누가 정직하고 누가 속이은지를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중략> 뒷담화는 악의적인 능력이지만, 많은 숫자가 모여 협동을 하려면 사실상 반드시 필요하다. <중략> 뒷담화이론은 농담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가 무수히 많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다음 이미지도 떠오릅니다. 이들이 수평적인 관계라면 '매력'을 갖출 때, 힘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다른 사람을 부리는 다양한 양상

그리고 최근에 읽은 페벗님의 글에 등장하는 '소비주의'를 소개한 다발말도 떠오릅니다.


왜 보도록 하는가?

부정적인 '부림'의 결과이지만, '부리는 일'이 꼭 부정적으로만 인식되는 것은 아닙니다. 피터 드러커는 기업을 이상적인 공동체로 설명한 내용이 있는데, 굉장히 깊은 감명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공동 목표, 공동 가치, 올바른 구조, 지속적 훈련과 발전을 제공해 함께 성과를 내고 변화에 대응하도록 하는 일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협동을 하게 되면 비전(vision)을 만들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남이 스스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해서 보이기도 한다.

시각화하는 힘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부리려는 이의 추진력을 북돋워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다시 한번

<낱말의 뜻을 깊고 넓게 묻고 따지는 일의 소중함>을 실천하기 위해 사전에서 '북돋우다'의 풀이를 찾아봅니다.

기운이나 정신 따위를 더욱 높여 주다.

<시행착오가 보여주는 지도 그리고 추진력을 찾는 질문>을 쓸 때 알게 된 대로 추진력과 Why?라는 질문은 관련이 깊습니다. 그래서 상대를 북돋기 위해서는 'Why?'라는 질문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그를 매혹시키거나 내가 만든 무언가를 사게 하기 위한 질문일 수도 있고, 그와 함께 서로 더 나은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과정일 수도 있겠죠. 그 선택은 임자에게 달린 일이 될 듯합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무언가를 보고 있을 때는 '일을 만드는 사람과 공을 가져가는 사람'의 교훈을 떠올릴 필요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약하면, 문제의 '궁극적인' 근원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문제 해결사들이 사는 세계에서는 왕, 대통령 혹은 학장과 같은 사람들이 문제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주석

[1]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문장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포기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구절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다발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난 묻따풀 2024: 함께 말 차리기 연재

(64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64. 한국인과는 다른 영국인과 중국인의 우리

65. 누리에 때와 틈과 함께 나는 낱낱의 존재

66. 한국말 살다, 살음, 살기, 삶, -살이와 살리다

67. 사람도 해를 닮아 살을 뻗어나가는 것이 삶이다

68. 마음에서 낼 수 있는 힘을 바탕으로 한 살이

69. 욕심과 다스림: 추진력인 욕심을 바로 알기

70. 햇살처럼 펼쳐 나가는 사는 '맛' 그리고 새로운 독서법

71. 욕심이라는 원동력 그리고 마음을 갈고닦는 일

72. 느낌에서 비롯하여 무엇을 어떤 것으로 풀어 알아봄

73. 느낌을 만든 알음이 엮이면서 맥락을 형성하여 앎이 된다

74. 우리는 숨을 쉬는 유기체이고, 동시에 욕망하는 인간이다

75. 마주해서 보면 느끼게 되고, 이를 헤아리면 맛이 난다

76. 한국인은 상황을 즐길 때 '살맛 난다'라고 말한다

77. 맛보는 과정을 통해 본성이 습성으로 드러나는 배움

78. 생각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키우는 다양한 맛과 문화

79. 우리가 말하는 멋은 남에게 멋지게 보이는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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