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따풀 2024: 함께 말 차리기
지난 글에 이어 <한국인에게 나는 누구인가> 책의 '10. 멋' 내용을 묻고 따지고 풀어봅니다.
최봉영 선생님에 따르면 '멋'은 맛에 뿌리를 둔 말로 19세기에 만들어진 낱말로 보인다고 합니다.
한국인은 사람이 눈으로 봄으로써 느끼는 맛 가운데 어떤 것을 특별히 '멋'이라고 부른다. 멋은 사람이 뜻으로써 지어놓은 어떤 것을 눈으로 봄으로써 느끼는 맛을 말한다.
눈으로 보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맛을 좁혀서 '멋'으로 불렀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멋은 남에게 멋지게 보이는 맛을 말한다.
다음 다발말[1]을 읽으면 요즘 세태 때문인지 대번에 인스타(그램)가 떠오릅니다.
사람이 멋에 빠지게 되면 남에게 보이는 것에서 느끼는 맛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런 사람은 스스로 먹어서 느끼는 맛보다 남에게 멋있게 보이도록 먹는 것에서 느끼는 맛을 더욱 중시하고, 스스로 보아서 느끼는 맛보다 남에게 멋있게 보이도록 보는 것에서 느끼는 맛을 더욱 중시하게 된다.
더불어 SNS가 공허를 낳는다는 교훈을 담은 유튜브 영상을 봤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인류의 복식사를 떠올리면 '보이는 것에서 느끼는 맛'의 역사는 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래 포기말[2]을 이분법으로 나눠 보려고 했는데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혀로 맛을 보는 것은 나와 대상이 하나가 된 것을 대한 경험을 말하고, 눈으로 꼴을 보는 것은 내가 대상을 마주하는 것에 대한 경험을 말한다.
혀로 맛을 보는 것도 직접 경험이고 마주하는 것 역시 직접 경험이 아니라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 차이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보는 맛보다 먹는 맛이 더욱 근본적이라는 것은 '금강산도 식후경이다'라는 속담에 잘 드러나 있다.
그러네요.
먹는 맛이 없으면 죽게 되지만, 보는 맛이 없으면 심심해서 죽을 지경에 이를 뿐이다.
먹는 맛은 의식주 문제에 해당하고, 보는 맛은 그 외의 욕망으로 보아야 할까요? 어딘가 궁색한 분류인데요. 계속 책을 보겠습니다.
한국인이 혀를 바탕으로 맛을 보는 것으로써 모든 경험을 담아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뜻을 지니고 있다. 사람이 혀로서 맛을 보아서 존재를 경험하는 것은 대상의 알맹이를 속속들이 깨달아 가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사람이 눈으로서 꼴을 보아서 존재를 경험하는 것은 대상의 겉을 알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모든 경험을 담아내는 일과 꼴에서 느끼는 멋을 느끼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을까요? 혀로 헤아리면 존재의 알맹이를 속속들이 알아가는 맛을 느끼는 것일까요? 겉과 속이 다를 수 있습니다. 수박이 그러하고, 수박만큼은 아니더라도 많은 음식들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사람도 사귀어 보면 겉과 속이 판이하게 다르죠.
저도 '보다'의 뜻이 얼마나 풍부한지를 최근에 <낱말의 뜻을 깊고 넓게 묻고 따지는 일의 소중함>을 실천하기 시작한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인은 여러 가지 까닭으로 사람이 혀로 맛을 보는 것보다 눈으로 꼴을 보는 것에 더욱 많은 관심을 쏟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인은 '보다'라는 낱말을 눈으로 꼴을 보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사전 풀이를 보면 과거의 쓰임새에 대한 기록이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다음 풀이들을 보면 그저 눈으로 꼴을 보는 것에 그치지는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10」 어떤 일을 맡아 하다. (예문: 사무를 보다)
「11」 어떤 결과나 관계를 맺기에 이르다. (예문: 끝장을 보다)
「12」 음식상이나 잠자리 따위를 채비하다. (예문: 손님 주무실 자리를 봐 드려라.)
「13」 (완곡한 표현으로) 대소변을 누다.
「14」 어떤 관계의 사람을 얻거나 맞다. (예문: 며느리를 보다.)
「16」 어떤 일을 당하거나 겪거나 얻어 가지다. (예문: 이익을 보다.)
「17」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다. (예문: 환자를 보다)
「22」 기회, 때, 시기 따위를 살피다. (예문: 기회를 봐서 부모님께 말씀드리는 게 좋겠다.)
다음 포기말이 설명하는 보다의 의미는 요즘 사전에서는 보조 동사로 구분하는 풀이에 해당하는 듯합니다.
사람이 혀로 맛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들어 보고, 손으로 물건을 만져 보는 것은 직접 닿는 것으로 한정되어 있어서 한꺼번에 이것과 저것을 함께할 수 없다.
한국말 '보다'는 이전에 알던 좁은 의미가 아니란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습니다.
반면 영국인의 보다에 해당하는 말은 사뭇 다릅니다.
영국인이 see를 understand나 believe와 같게 여기는 것은 혀로 어떤 것을 느껴보는 것보다 눈으로 모든 것을 알아보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놀라운 차이입니다. 설명을 더 볼까요?
영국인은 모든 것을 다 알고 다 이룰 수 있는 절대적 존재 신God을 가장 높은 곳에서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보는 존재로 여긴다.
이번에는 중국인의 보다 개념 표현에 대한 설명입니다.
'지知'는 입에서 혀로 느끼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지知는 화살을 뜻하는 시矢와 입을 뜻하는 구口가 합쳐진 낱말로서 입에서 혀로 맛을 아는 일이 화살처럼 빠르게 이루어지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1]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구절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다발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문장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포기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64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66. 한국말 살다, 살음, 살기, 삶, -살이와 살리다
70. 햇살처럼 펼쳐 나가는 사는 '맛' 그리고 새로운 독서법
72. 느낌에서 비롯하여 무엇을 어떤 것으로 풀어 알아봄
73. 느낌을 만든 알음이 엮이면서 맥락을 형성하여 앎이 된다
74. 우리는 숨을 쉬는 유기체이고, 동시에 욕망하는 인간이다
75. 마주해서 보면 느끼게 되고, 이를 헤아리면 맛이 난다
76. 한국인은 상황을 즐길 때 '살맛 난다'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