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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Jun 07. 2024

필요로 하는 것을 갖기 전에는 뭐가 필요한지 모른다

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

지난 글에 이어서 <대체 뭐가 문제야> 18장 '지칠줄모름 씨, 장난감 공장의 문제를 어설프게 해결하다'를 다루며 전과 같이 중요하게 느낀 점 중에서 '문제 정의의 제1 교훈'을 다루는 글입니다.


문제 정의의 제1 교훈

18장 마지막에 가서야 저자가 문제 정의의 제1 교훈으로 명명한 내용이 등장합니다.

겉으로 어떻게 드러나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갖기 전까지는 자신들이 뭘 원하는지 거의 알지 못한다.

사실 저는 그 교훈을 컨설팅을 꽤 오래 하면서 몸으로 익혔습니다. 저에게 '제대로 된' 컨설팅이 무언지 어깨 너머로 알 수 있게 해 주신 분은 고객의 마음을 읽는 듯했습니다. 고객과 함께 밥을 먹고 나서 뒷짐을 지고 고객의 발걸음에 보폭을 맞추면서 그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게 만드는 그의 능력은 능숙했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전개되어서 눈치채기도 힘들었죠.


다만, 그분은 저에게 친한 형이기도 했는데, 컨설팅을 하려면 술을 꼭 배우라고 저를 설득했습니다. 그렇게 술을 배운 후에 대기업과 일을 할 때, 만취한 뒤에야 조용한 술집에서 단 둘이 있을 때 솔직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고객을 만났고, 이후 '제대로 된'(?) 컨설팅과 술이 무슨 관계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인용한 포기말(문장) 바로 앞의 포기말도 흥미롭게 볼 부분이 꽤 있습니다.

지칠줄모름 씨는 남들의 문제를 풀어주는 척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문제 정의에서 가장 중요한 제1 교훈을 얻었다.


해결책 문제화Solution problem에 중독된 컴퓨터쟁이

저자는 왜 그의 이름을 지칠줄모름이라고 지었을까요? 제가 '제대로 된' 컨설팅의 조건을 배운 2004년의 제 상태에 딱 어울리는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제가 갖고 있는 지식, 기술 그리고 열정을 보여주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고객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올 리 없겠죠. 아무리 들어도 제 지식이나 기술과 바로 연결되지 않으니까요. 당시 제 모습은 (개성이 아니라) 하나의 전형이기도 했습니다.

컴퓨터쟁이들은 컴퓨터에서 요구하는 방식에 자신들의 문제를 맞히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들은 이것을 '해결책 문제화Solution problem'라고 부른다.

2004년의 저를 포함한 그들이 고객의 말에 경청하지 못하는 이유도 책에 나옵니다.

여기까지 설명을 들은 지칠줄모름 씨는 슬슬 가만히 앉아 있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컴퓨터 터미널 앞에 앉아 있을 때 빼고는 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데에 익숙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 해결책 문제화Solution problem는 컴퓨터쟁이만 갈구하는 믿음은 아닙니다. 2017년 IT 기획을 하는 분이 오픈소스 솔루션 도입으로 문제를 해 치우려는 모습이 안타까워 설득하는 내용을 글로 쓴 일이 있습니다. 당시 저는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솔루션부터 찾으면 100% 실패한다.


우리가 문제를 알지 못하거나 알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닐까?

돌아보니 저 역시 그분의 욕망을 보지 못하고 제가 믿는 직업윤리 속의 세상에 어울리는 말을 하는데 여념이 없었던 듯합니다.[1] 이렇게 제 의견을 들을 생각이 없는 분들에게 옳은(?) 소리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이유는 의사소통으로 상대를 설득할 수 있다는 오해에서 비롯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런 의사소통의 어려움이 의사소통 능력의 부족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저도 꽤 오랫동안 그렇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다른 듯합니다.

사실은 우리가 문제를 알지 못하거나 알기 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의사소통을 잘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 장면은 좋은 예시가 됩니다.

"그러면 원래 우리의 문제는 비용을 최소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장님과 회장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었군요?"
우리의 해결책 문제화 전문가, 지칠줄모름 씨는 격분했다.
"그러면 왜 그 문제를 제게 맡긴 겁니까?"
<중략>
"자네 입으로 자네 컴퓨터가 무슨 문제든지 풀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컴퓨터가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네.

개발 경험이 많은 저에게는 꽤나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맛보는 과정을 통해 본성이 습성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마침 동료가 개발한 기능에 대한 사용자 피드백에 대해서 양쪽의 의견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동료와 사용자가 두 차례 만난 후에 그들 각각과 제가 대화할 기회가 있었던 것이죠. 그 대화를 차분히 들어보니 자주 인용했던 그림으로 요약할 수 있었습니다.(그림을 동상이몽同牀異夢이라고 불러도 되겠군요.)

여기서 저는 <생각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키우는 다양한 맛과 문화>를 쓰고 묻따풀 했던 힘으로 새로운 그림을 창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먼저 '같은 현상도 서로 다른 일로 인식하는 모습'에서 '맛보는 과정을 통해 본성이 습성으로 드러나는' 양상을 분리합니다.


각자 살맛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일로 바꾸기

쉽게 말해 서로 다르게 인식하는 그 일에 대한 '맛'을 각각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쓴맛을 느끼는 임자가 다른 맛을 느끼도록 문제를 바꿀 수 있다면 문제는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이럴 때는 문제라기보다는 '일이 성사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듯합니다.

하지만, 이런 관점 전환과 묘사 과정에서 '알기 원하지 않기 때문에'라는 매듭말[2]에 담긴 의미가 명확해졌습니다. 공포가 느껴지는 상황이라면 그걸 문제 삼는 일조차 끔찍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포를 낮추고 의미가 있는 일로 바꾸기 위해 "언어로 빚는 살리는 힘을 조직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훌륭한 문제 해결사가 될 수 있습니다.[3]


여기까지 왔더니 제가 깊이 관심을 가지던 문제에 따른 이끌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기존에 썼던 유사한 글을 찾아보았습니다.

닫힌 우리에서 유기체들의 조직으로

건강한 조직이 만들어지는 배경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는 원천이 되고자 한다


빌린 욕망으로는 이길 수 없다

마지막으로 앞서 인용했던 포기말의 또 하나의 매듭말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지칠줄모름 씨는 남들의 문제를 풀어주는 척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문제 정의에서 가장 중요한 제1 교훈을 얻었다.

저자는 왜 '남들의 문제를 풀어주는 척하는 사람들'이라고 썼을까요? '풀어주는'이 아닐까요? 예전에 대기업 중견 관리자가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하고 싶다고 해서 미팅을 한 일이 있습니다. 저는 그분이 일의 알맹이가 뭔지도 모른 채 일단 하려고 해서 질문을 했습니다. 회사가 원하는 성과는 반드시 만들어 낼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직속상사인 임원에게 곤란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데 어떻게 할 것이냐고 말이죠. 그가 감이 없어하길래 구체적인 예를 들었더니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이후 결과는 더 말할 필요가 없겠죠.


그래서, <눈 가리고 무작정 두 발로 뛰어넘기>하는 일이 아니라면 내가 문제 삼은 일이 상대에게는 어떤 문제인지 인식한 후에 주어진 시간 동안 어디까지 풀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풀어주는 척'의 양상에 가까운 구간(?)이 꽤 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작년에 인상 깊게 읽었던 페벗 님의 <빌린 욕망으로는 이길 수 없다.>란 글이 있는데, 우연히 다시 발견해서 맥락이 이어지는 구절을 인용합니다.

욕망과 욕망이 부딪쳐야 싸움이 되는데, 나는 남을 향해 내세울만한 욕망이 없다보니 싸움이 되지 않았다. 경쟁이 치열한 1차선은 내줘버리고 3차선에서 유유자적 내 호흡대로 가는 방식을 선택했다. 욕망과 욕망이 얽혀야 우리가 되기도 하는 것인데 나는 대체로 엮이지 않는 편을 택했다. 조직에서 사용하는 중요 커뮤니케이션 채널 중 하나를 스스로 닫은 것이다. 그렇다보니 일 중심 성과가 중요한 낮은 연차일 때는 조직의 중심부에 빠르게 진입한 반면 승진을 할 수록 주변부에 머무는 시간이 늘었다.


주석

[1] 매우 비슷한 현상은 계속돼서 반복됩니다. 2년이 지난 후에도 다른 회사에서 개발은 안 하는 IT관리자가 'ISTIO가 쓰고 싶다'고 미신적인 희망사항을 만난 일이 있었는데 저는 거의 같은 일로 여겨집니다.

[2]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어구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매듭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3] 한편, 제가 붙잡고 있던 '협상론적 세계관'이라는 개념과도 상당 부분 맥락이 일치합니다.


지난 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 연재

(21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21. 누구를 불편하게 할 것인가? 그것이 내 문제라면?

22. 가치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23. 고통을 다루는 방법: 욕심과 고통과 임자를 연결시키기

24. 고통과 행복은 언제나 변하는 유기물적인 것이다

25. 메타 인지, 본성의 무관심성 그리고 실천적으로 바라보기

26. 문제의 근원은 대부분 당신 안에 있다

27. 지금 이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리게 하는 힘

28. 어떻게 내가 무엇을 모른다는 것을 알 것인가?

29. 문제의 궁극적 근원은 대부분 어떤 사람의 욕망이다

30. '어디'라고 쓰고 '누구'라고 읽는다

31. 문제의 인식과 문제의 정의는 전혀 다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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