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영회 습작 Jun 11. 2024

고통에 먹이 주기를 피하기 위한 직시(直視)

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

<어떻게 내가 무엇을 모른다는 것을 알 것인가?>에 이어 틱낫한의 <고요히 앉아 있을 수만 있다면>의 2장 <고통을 알아차리고 안아 주기>를 읽고 제 삶을 위해 쓰는 글입니다.


감정에서 나와 나를 둘러싼 상황까지 보자

열흘 만에 책을 펼쳤더니 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읽게 됩니다. 일상의 다양한 단면을 배우는 것으로 따져 봅니다. 먼저, 심호흡[1]부터 하고요. 심호흡으로 마음을 챙긴 후에 상황을 직시하려고 노력하면 더 나은 차림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하고 스스로 물었더니, <어떻게 내가 무엇을 모른다는 것을 알 것인가?>에서 직시(直視)를 다루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당시 기록한 낱말 풀이가 다시 의미를 더합니다.

「1」 정신을 집중하여 어떤 대상을 똑바로 봄.
「2」 사물의 진실을 바로 봄.

정신을 차리고 보아서 그런 듯하고, 사물의 본성을 살려서 그대로 보려는 노력을 하게 돼서 그런 듯합니다.


놀랍게도 다른 책을 보며 느끼고 생각한 것을 쓴 <내가 정말로 해결안을 원하는지 보지 못하고 하는 일들>에서 배운 내용과 바로 연결이 됩니다.


시공간과 순간 그리고 임자와 일됨이라는 인식

손때를 묻힌 덕분인지 세 달 전에 썼던 <시공간과 순간 그리고 임자와 일됨이라는 인식> 내용이 기억 속으로 찾아옵니다. 무상한 일상에서 심호흡을 한 후에는 순간을 이루는 상황을 인수분해 하듯이 바라보고 일됨으로 정의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어쩌면 지식뿐 아니라 몸과 마음까지 챙기는 차리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상을 차리기 위해서는 우선 조심해야 한다

직시하여 차리는 일 외에 일상에 대한 묵상 기록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일상을 차리기 위해서는 우선 조심해야 한다>인데, 어떻게 조심해야 할까요? 그에 대한 힌트를 지금 책에서 만난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고통에 먹이를 주고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과거와 미래의 망령에 희생양으로 던져 주는 격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건 제대로 된 삶이라 볼 수 없지요. 자신의 고통을 피하거나 무시하기 위해 소비에 의존한다면, 결국 고통을 악화시킬 뿐입니다.

열흘 전에는 고통에 먹이를 준다는 표현에 대해 감이 오지 않았습니다. 고맙게도 지금은 알게 된 듯합니다. 바로 생각이 지은 '과거와 미래의 망령'에 나도 모르게 끌려가기 때문이겠죠. <고통을 다루는 방법: 욕심과 고통과 임자를 연결시키기>에서 그린 그림을 활용해 보겠습니다.


아래 그림의 고통을 직시直視한다면 그나마 다행인데, 고통을 피하기 위해 대체물을 찾는 상황이 바로 외면으로 나를 이끄는 악순환 고리가 된다는 듯합니다.

아래 다발말[2]은 이를 상세히 설명합니다.

끊임없이 냉장고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지요. 마음속 아픔과 스스로를 단절시키면, 고통이 보관되어 있는 자신의 몸도 함께 내팽개치는 셈입니다. 외롭고 실망스러울 때면, 우리는 그것들을 가릴 만한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고, 마치 그것이 거기 없는 체합니다. <중략> 결국 먹는 행위에 중독되어 버리고 맙니다. 내면의 고통을 가리려 애쓰지만 진짜 문제는 해소되지 못한 채 남아 있기 때문이지요. 아니면 컴퓨터 게임에 중독될 수도, 또 다른 시청각적 유흥에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일상의 욕망이나 고통을 나누어서 다루기

우선 직시(直視)의 실천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보는 일'처럼 느껴집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걸 볼 수 있다는 말은 자신의 고통을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고통을 본다면 욕망과 인식의 차이도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문제를 다루는 데에도 능숙해질 것이란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페북에서 본 다음 이미지를 활용해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과 욕망을 섞어서 문제를 인식하면 굉장히 무거울 수 있습니다. 위 그림은 그걸 은유한 것이겠죠. 사전에 있는 문제 정의 중에 하나가 어울립니다.

「3」 해결하기 어렵거나 난처한 대상. 또는 그런 일.

그중에서 앞서 논한 일상의 조심을 실천할 힘이 있다면 문제를 마주하고 할 만할 일로 다룰 수 있습니다. 이전에 <시공간과 순간 그리고 임자와 일됨이라는 인식>을 쓸 때, 일부나마 그 느낌을 담고 싶었는데, 부족했던 내용을 책을 통해 채운 듯합니다. 물론, 아직 실천의 기록은 아니고, 실천하기를 기대하며 쓰는 글입니다.


주석

[1] <낱말의 뜻을 깊고 넓게 묻고 따지는 일의 소중함> 실천을 위해 사전을 찾아봅니다.

의식적으로 허파 속에 공기가 많이 드나들도록 숨 쉬는 방법. 흉식(胸式)과 복식(腹式)이 있다. ≒구허호흡, 깊은숨.

한자사전도 찾아 요약했습니다.

[2]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구절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다발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난 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 연재

(21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21. 누구를 불편하게 할 것인가? 그것이 내 문제라면?

22. 가치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23. 고통을 다루는 방법: 욕심과 고통과 임자를 연결시키기

24. 고통과 행복은 언제나 변하는 유기물적인 것이다

25. 메타 인지, 본성의 무관심성 그리고 실천적으로 바라보기

26. 문제의 근원은 대부분 당신 안에 있다

27. 지금 이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리게 하는 힘

28. 어떻게 내가 무엇을 모른다는 것을 알 것인가?

29. 문제의 궁극적 근원은 대부분 어떤 사람의 욕망이다

30. '어디'라고 쓰고 '누구'라고 읽는다

31. 문제의 인식과 문제의 정의는 전혀 다른 일이다

32. 필요로 하는 것을 갖기 전에는 뭐가 필요한지 모른다

33. 내가 정말로 해결안을 원하는지 보지 못하고 하는 일들

작가의 이전글 내가 정말로 해결안을 원하는지 보지 못하고 하는 일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