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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Jun 13. 2024

정신이 팔리면 NPC처럼 휘둘리기도 한다

묻따풀 2024: 함께 말 차리기

지난 글에 이어  <한국인에게 나는 누구인가> 책의 '14. 차림' 내용을 묻고 따지고 풀어봅니다.


감: 신령한 힘이 깃들어 있는 바탕

'신령한 힘이 깃들어 있는 바탕'이 감이라니...

한국인은 사물이 본디 가지고 있는 힘을 '신'이라고 불러왔다. 바람, 바위, 나무, 짐승, 사람과 같은 사물이 모두 신령한 힘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인은 신령한 힘이 깃들어 있는 바탕을 '감'이라고 말한다. 먹잇감, 땔감, 물감, 일감, 놀잇감, 장난감, 상감, 대감, 영감, 신랑감 따위로 말하는 감이 그것이다.

예시로 등장하는 낱말들을 보면, 제 기억 속에는 파편화된 의미만 남아 있는 듯합니다. 사전 풀이를 보아도 무려 세 개의 풀이는 주로 '옷'에 국한하여 쓰는 풀이이고, 나머지 둘은 다음과 같습니다.

「4」 ((일부 명사 뒤에 붙어)) ‘자격을 갖춘 사람’의 뜻을 나타내는 말.
「5」 ((일부 명사 뒤에 붙어)) 대상이 되는 도구, 사물, 사람, 재료의 뜻을 나타내는 말.

통합적으로 보면 재료나 자격을 갖춘 사람의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신'이라는 개념이 거의 사라진 변화 속에서 정착하게 된 뜻이라 하겠습니다.


정신精神: 넋에서 생겨난 마음의 쓰임

신과 마찬가지로 '넋'이란 말도 거의 죽은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인은 사람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특별히 뛰어난 신을 '넋'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넋에서 생겨난 마음의 쓰임이 정신이라고 합니다.

정신精神은 '정精에 깃든 신神' 또는 '정精을 가진 신神'으로서 밖으로 모습을 드려낸다.

수도 없이 쓰던 말이지만, 정신의 의미를 제대로 모르고 써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전을 살펴보지만, 사전의 풀이를 나열한다고 해서 뚜렷해지지도 않는 듯합니다. 책에서 정신에 대해 설명하는 바를 따라가 보기로 합니다.

사람은 정신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사람은 정신이 있어야 어떤 것을 느끼고 알 수 있다. 정신이 없으면 느끼고 알지 못한다.

이런 쓰임의 정신은 의식意識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1」 깨어 있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이나 사물에 대하여 인식하는 작용.

영어로는 Consciousness에 해당할 듯합니다.

Consciousness, at its simplest, is awareness of internal and external existence.

다시 책으로 갑니다.

사람은 정신이 들 수도 있고, 나갈 수도 있고, 빠질 수도 있다. 사람은 정신이 들어야 어떤 것을 마주하여 느끼고 알 수 있다. <중략> 사람은 정신을 가져야만 임자로 어떤 것을 다룰 수 있다.

정신은 자의식 혹은 자아가 살아가는 바탕이 되는 듯합니다.


다른 것에 휘둘리는 상태란 어떤 상태인가?

여기서부터는 앞서 다룬 의식과는 다른 뜻으로 쓰인 듯합니다.

사람은 정신을 빼앗거나 빼앗김으로써 정신이 없는 상태가 되면 다른 것에 휘둘리게 된다.

물론, 의식에도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2」 사회적ㆍ역사적으로 형성되는 사물이나 일에 대한 개인적ㆍ집단적 감정이나 견해나 사상.

한편, 야신이 쓴 책에는 '의식'이라는 말이 이러한 뜻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하지만, 아예 의식을 잃은 상태는 아니면서 동시에 다른 것에 휘둘리는 상태란 어떤 상태일까요? 최근에 묵상한 내용으로 인해 두 가지 상황이 떠오릅니다. 하나는 고통을 바라보지 않고, 피하기 위해 습관화된 다른 오락으로 나아가는 습관입니다. <고통에 먹이 주기를 피하기 위한 직시(直視)>를 쓰면서 인식한 상황입니다. 두 번째는 <일을 만드는 사람과 공을 가져가는 사람>에서 다룬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 나의 욕망을 살피지 않고, 누구의 욕망에 따른 일인지도 모른 채로 무작정 어떤 일에 매달리는 행위입니다.


하나 더 있네요. 최근 만난 분이 자기 성찰 없이 수동적으로 사는 사람들을 NPC라고 불러서 그 의미를 물은 일이 있습니다.


최고의 기량 발휘를 방해하는 모든 정신적 습관 극복

다시 책의 정신에 대한 설명으로 돌아가 봅니다.

사람은 정신을 모으면 뜻과 힘을 오로지 할 수 있고, 정신을 흝으면 뜻과 힘을 오로지 할 수 없다. <중략> 사람은 정신을 쏟음으로써 어떤 것을 깊이 파고들 수 있다.

다시 한번 야신이 강조한 의식의 힘과 부합하는 내용입니다. 한편, <최고의 기량 발휘를 방해하는 모든 정신적 습관 극복>을 쓰며 그렸던 그림도 떠오릅니다.

다음 말은 이론적으로는 말이 되지만, 어딘가 비현실적이란 생각에 반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사람은 정신을 차림으로써 모든 것을 하나로 가지런하게 할 수 있다.

왜 그런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유혹이 넘쳐나서 정신을 차리기 힘든 환경에서 제가 살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인 듯합니다.


말로 차려진 차림판

딱, 지금의 저에게 하는 말씀인 듯합니다. :)

사람이 정신을 차리는 일은 아무렇게다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그것이 아무렇게나 이루어질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이 다 정신을 차리고 살아갈 것이다. 정신을 차리는 일은 자아, 존재, 세계, 관계, 행동, 논리, 욕망 따위에 대한 깨달음에 바탕을 둔 정밀한 차림판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렇죠. 그냥 차려지지 않겠죠.

사람이 정신을 차리는 차림판은 말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사람답게 살아보기 위해서 갈고닦아 놓은 것이다.

차림판이 있다는 사실은 반가운 일입니다.

정신을 차리는 일은 주로 말에 바탕을 둔 생각으로 이루어진다.

말은 이렇게 둘로 구분하는 것은 생소합니다.

우리는 말의 뜻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배우고 쓰는 생활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말을 만들어 나온 생성의미이다. <중략> 사람이 태어나서 말을 처음으로 배우는 것은 생활의미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어린 아기는 생활에서 쓰이는 생활의미를 바탕으로 말을 배우고 쓴다.

그중에서도 생성의미란 말은 직관적으로 알음알이 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생성의미를 통해서 겨레가 오랫동안 함께 갈고닦아 온 정신의 차림판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중략> 생성의미가 겉으로 드러나 있는 말인 경우에는 사람들이 그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낱말의 뜻을 깊고 넓게 묻고 따지는 일의 소중함

생성의미가 무언가 여전히 불분명했는데 다음 다발말[1]을 보며 '아하'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말을 깊이 파고들지 않는 한, '버릇'이 '베다'에 뿌리는 두고 있으며, '어른'이 '얼운'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가 없다. 이런 경우에는 말을 깊이 있게 묻고, 따지고, 풀어 보아야 생성의미를 제대로 알아낼 수가 있다.

<낱말의 뜻을 깊고 넓게 묻고 따지는 일의 소중함>을 떠올리는 동시에 <뇌과학으로 배우는 대화라는 작용>에서 다룬 대로 같은 말도 다른 의미로 쓰고, 사실, 감정과 의미를 혼용하는 대화가 대부분의 대화 상황이란 점을 떠올리면 '생성의미'는 나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요?

사실 다음 내용은 최봉영 선생님께 통화로 듣기도 하고 '감사하다' 대신에 '고맙다'라고 말하기를 실천해 왔습니다.

'고맙다'가 남을 높이고 받드는 '고마', '고마하다'에 뿌리는 두고 있음을 알게 되면 '고맙다'가 '감사하다'나 '땡큐'보다 더욱 뜻있고 좋은 것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솔직히 아직 '고맙습니다'와 '감사합니다' 차이를 느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다음 다발말은 동의하게 되면서도 동시에 막막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한국인은 생성의미에 깜깜하기 때문에 말을 건성으로 배우고 쓴다. 이러니 겨레가 사람답게 살아보려고 오랫동안 말로써 가꾸어 온 재주와 슬기를 제대로 살려서 쓸 수 없다.


주석

[1]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구절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다발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난 묻따풀 2024: 함께 말 차리기 연재

(71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71. 욕심이라는 원동력 그리고 마음을 갈고닦는 일

72. 느낌에서 비롯하여 무엇을 어떤 것으로 풀어 알아봄

73. 느낌을 만든 알음이 엮이면서 맥락을 형성하여 앎이 된다

74. 우리는 숨을 쉬는 유기체이고, 동시에 욕망하는 인간이다

75. 마주해서 보면 느끼게 되고, 이를 헤아리면 맛이 난다

76. 한국인은 상황을 즐길 때 '살맛 난다'라고 말한다

77. 맛보는 과정을 통해 본성이 습성으로 드러나는 배움

78. 생각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키우는 다양한 맛과 문화

79. 우리가 말하는 멋은 남에게 멋지게 보이는 맛

80. 대상이 비춰 주는 빙산 속 나의 줏대와 잣대

81. 떨림과 울림, 어울리다 그리고 매력

82. 차림과 알아차림 그리고 헤아림과 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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