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
<나를 지배한 사고의 틀을 해체하면 만날 또 다른 나>에 이어 WHY의 <Life 죽음 속의 생명>을 읽고 밑줄 친 내용을 토대로 생각을 기록한 글입니다.
먼저 고슴도치 전략을 소개한 다발말[1]이 눈에 띄었습니다.
첫째, 내가 열정을 가지고 가장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는다. 둘째, 그것으로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는지 자문한다. '아니요'가 나오면 '예'가 나올 때까지 처음 답을 수정한다. 셋째, 그것으로 돈을 벌 수 있는지 자문한다. 아니라면 다시 처음 답을 수정한다.
읽으면서 흔히 말하는 '경제적 자유'를 얻는 법인 듯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포기말[2]은 마치 사업을 가장 짧게 정의한 말처럼 느껴집니다.
전략의 선순환이 스스로 돈을 버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저자가 경험한 죽음의 문턱에 대한 담담한 기록 중에서 눈에 띈 문장은 다음 포기말입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작년에 두 번쯤 저런 상태에 도달한 일이 있습니다. 종국에는 겸손을 배우게 된 경험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당시 불안과 고통 속에 있으며, 둘에 대해서도 직면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김기석 목사님 영상에서 배운 '기도'의 의미도 떠올랐습니다.
다음으로 저자는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피라미드가 어떻게 쌓이는 지를 보여줍니다.
내가 만든 독립형 피라미드를 본격적으로 준비한 것은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중략> 글을 쓰기 시작한 뒤에야 한 명의 청중도 없는 곳에서 또 새로 시작한 피라미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또다시 쌓았다.
직관적으로 의미를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왜 '피라미드'에 비유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상향식으로 정의되고, 단방향으로 평가되는 이유일까요? 다행스러운 일은 곧 설명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타인이 인정해야 오를 수 있고, 스스로는 올라갈 수 없는 것이 암묵적으로 합의된 피라미드의 원칙이다. 타인이 주인이며, 나는 순응해야 하는 피동자다.
위 포기말이 속한 영역의 소제목은 '내 가면의 발견'입니다. 이 내용을 계속 읽어 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오래전에 읽었던 <부자 아빠의 미래 설계 6>에서 안정을 미신에 비유했던 표현이 떠오릅니다. 그 미신이 여기서는 '가면'으로 표현된 듯했습니다. 그리고, 용기를 내서 '가면'을 벗어야만 내가 삶의 문제[3]로 다룰 일들을 볼 수 있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뒤이어 피라미드에 오르는 일과 정반대 느낌을 주는 저자의 일화가 소개됩니다. 그런데 강아지에 비견되어 어딘가 어색합니다. 반면에 다음 포기말은 <테니스 이너게임> 덕분에 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 느낌을 세포가 기억하고 있다.
또한, 다음 포기말은 중학교 때 반복해서 했던 공상을 불러왔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미건조하고 규격화된 어떤 곳에 소속되는 것을 스스로 허락하는 과정이었다.
당시 저는 어른이 되는 대신에 피터팬이 되고 싶었습니다. 어린이도 어른도 아닌 존재가 있었으면 했죠. 어른이 되기 싫었던 이유를 말로 설명할 수 없었는데, 저자가 설명하는 내용이 분명하게 그때 느낌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 교실이, 매체가, 나를 가르친 모든 공간이 혹시 피라미드로 올라가는 법을 배우는 공장은 아니었을까?
반면에 다음 문장은 <자아실현을 돕는 교육은 어디 있는가?>에서 인용했던 자아실현이라는 이름의 사다리를 떠오르게 합니다.
아직 발현되지 않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왜 없는 것인가?
미래에 대한 집착은 분명 길러진 듯합니다.
순위로 정해진 세상의 질서는 미래에 집착한다. 하지만 미래는 어느 시점이며, 행복의 기준은 무엇인가?
여기서 ‘하지만’ 이후의 질문은 오래도록 잊고 살았습니다. 게다가 미래가 허구라는 저자의 설명은 마치 기요사케가 말한 '미신'과 같은 의미로 다가옵니다.
도달해야 하는 목표가 되는 순간, 미래는 우리 삶에서 영원히 오지 않을 허구다.
개인적으로는 다행히 칠판의 앞면이 아니라 스스로를 봐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본질의 변화를 들을 수 있는 절대적인 시간이다. 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며, 가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며, 답하는 것이 아니라 묻는 것이다. 칠판 대신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해야 하는 줄 알고 달리느라 '듣는 법'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 이제 10년 정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답하지 않고 물어야 한다는 사실은 어렵게 <당신이 옳다>를 반복해서 읽으며 배웠습니다. 어쩌면 이제 이 책을 만날 때가 되었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
연결이 지배하는 이 세상은 지금까지 우리가 만들어 온 가치에 대해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다만 이에 반응하는 것은 아직 우리의 촉각뿐이다. 우리는 들을 시간이 없고, 멈출 시간이 없으며, 돌아볼 용기가 없다.
우연히 페북에서 발견한 이미지가 마치 미신(칠판)을 벗어나 나를 바라보는 장면처럼 느껴집니다.
뒤이어 '존재적 빈곤'을 설명하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부자로 태어나 가난하게 죽는다. 유일한 존재인 내가 가지고 태어난 것들, 저마다의 사랑스러운 것들에 주목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깨우침입니다. 아들 사진을 찍던 때의 기억과 함께 이를 새기기 위해 썼던 글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그리고 적어도 제 두 아들에게는 학교나 사회가 종용하는 잣대가 아니라 유일한 존재인 그들이 가지고 태어난 것들, 저마다의 사랑스러운 것들에 주목해 주겠다고 다짐합니다.
더불어 추가한 루틴 덕분에 그 마음이 아들을 넘어서 아내와 다른 가족들까지 번져갑니다.
그리고 주위의 모든 존재를 바라볼 때 연민의 눈으로 보리라 맹세하네.
비슷한 내용이지만 어제의 경험 탓에 다음 포기말은 다른 자극을 더합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본성을 스스로, 그리고 서로 바라봐 주며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
어제 있었던 경험을 간략히 소개합니다. 정확하게 어떤 사건인지는 잊었는데, 다양한 경험과 시도를 하던 중에 '아, 이건 스스로 자신을 키우는 느낌인데'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기억을 이미지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마침 주말에 페벗님들 따라 SHINE AI를 해 본 경험이 더해져서 이미지 생성을 하게 되었죠.
구독 시작도 작용을 했겠죠. 마음속에는 '굳이 유료로 써야 하나?' 하는 질문이 동력을 만들어 내니까요.
지금 보니 화분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대로 사회 속에 두면 그 환경에 아직 적응할 힘이 없을 수 있으니까요. 적응이라 쓴 말에 상응하는 설명이 책에 나옵니다.
우리에게는 각자가 가지고 태어난 본래 모습이 있다.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오직 나의 것이다.
다음 다발말(=단락)은 경험과 결부되는 면이 적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목표 의식을 제시합니다.
내가 어디서 와서 왜,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이 나를 진정한 풍요로 인도하는 여정의 시작이다. <중략> 각자가 찾은 각자의 렌즈가 서로의 발견을 도울 것이다. 정답을 맞히는 능력이 아니라 질문하는 능력 <중략> 협업하는 능력이 물질이 넘치는 풍용의 시대에 서로를 존재적 빈곤으로부터 구해 줄 능력이다.
내용이 길어져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 담겠습니다.
[1]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구절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다발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문장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포기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3] <대체 뭐가 문제야>라는 인생책이 저에게 알려준 지식이 작동한 결과입니다.
(61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61. 판단이 부르는 일반화 본능의 무용함 혹은 해로움
62. 판단을 내리지 말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연민의 힘
64. 현상태의 정확한 인지가 자연적 학습을 일어나게 한다
66. 무한한 잠재력과 경이적인 내적 지능을 지닌 자신
68. 지금은 지금뿐이다
69. 시각적 이미지와 감정적 이미지를 통해 동작을 배운다
71. 나에게 인공지능이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