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
지난 글에 이어 <테니스 이너게임>의 제5장 '기술의 발견' 일부를 읽고 느낀 점을 씁니다.
<현상태의 정확한 인지가 자연적 학습을 일어나게 한다>를 쓴 후부터는 확실하게 믿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교습 시스템이건 간에 누구나 타고난 자연적 학습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두 아들의 육아 과정에서 자주 경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가르침 없이 어린아이가 무언가를 스스로 터득하는 과정을 지켜보거나 동물이 새끼를 가르치는 모습을 보면 자연적 학습에 대한 통찰과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반복 훈련의 진의를 확인하는 듯도 합니다.
그러고는 이 새로운 기술을 수없이 반복했다. 엄마 하마는 몇 번의 '시범'이 필요한지, 언제 격려가 필요하고 언제부터 불필요한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시동'을 걸어준 다음부터는 새끼의 본능을 신뢰할 줄 알았다.
'시동'[1]이라는 은유는 정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 최근에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 대한 영상을 본 덕분에 이러한 깨달음은 테니스 배우기나 어린아이의 교육에 국한된 것이 아니란 점을 깨닫게 됩니다. 철학적으로 보면 인간의 인식과 의식의 확장 전반에 작동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학교 교육을 길게 받으면 당연한 사실을 잊게 되는 듯합니다. 다음 포기말[2]을 읽다가 든 생각입니다.
기술에 관한 지식이나 이론을 어떻게 활용할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경험이 지식에 선행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학습을 단거리 시합처럼 만들고, 순위에 몰입하게 함으로써 '작동 가능한 지식'은 무시하고 그저 '시험을 보기 위한 지식'에 매몰되도록 만들곤 하죠. 비슷한 취지로 다음 포기말들을 읽어 보면 당연한 사실을 잊게 된 근거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지식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과거 어느 시점에서 누군가의 경험에서 기원한 것은 아닌가? 우연이건 의도적이었건 간에 누군가가 특정한 방식으로 공을 쳤는데, 느낌이 좋았고 공이 잘 들어갔던 것이다. 그는 수많은 시도를 하면서 조금씩 교정을 했고, 마침내 재현 가능한 형태의 스트로크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스스로 가르치는 대상이나 기관에 지나친 권위를 부여했거나 그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위해 교묘한 술책을 부리고 거기에 순진하게 당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3] 그게 아니라면 혼자 익히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나 지름길로 원하는 것을 익힐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사실을 그대로 보지 못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점은 제가 가진 바람직하지 않은 경향이 저 만의 문제는 아니란 점입니다.
우리는 자아 2의 '경험으로부터의 학습'보다는 자아 1의 '관념적인 기술 학습'을 신뢰하려는 성향이 있다.
이어서 다음 다발말을 읽으면서 저 자신도 표준화 자체에 지나친 가치를 부여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습니다.
지시는 항상 올바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이를 제대로 따르지 못해 범실이 나온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 분노하게 되고, 자신의 능력을 폄하하는 말을 하며, 본인이 멍청하다고 하는 등 온갖 비난을 퍼붓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근래에 형님으로 부르는 지인이 알려준 고등학교의 탄생은 산업화의 산물인 표준화 교육이었다고 합니다.[4] 그에 따르면 지시를 항상 올바르다고 판단하는 일은 산업 혁명 때나 어울리던 노동 교육입니다. 그리고 다음 포기말은 이를 지지하는 듯합니다.
자신을 사람이라기보다는 명령에 순종하는 컴퓨터로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원하는 동작을 수행하기 위한 정보는 근육 기억muscle memory에 저장되는데, 자아 2에 대한 불신은 근육 기억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어떤 사실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언어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어쩐지 탁상공론의 유래도 알 듯합니다.
말로 전달된 지시 시항이 경험의 저장 창고에 존재하지 않는 내용이라면, 이는 경험과는 동떨어진 채 기억 속에 별개로 머무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론의 기억과 실행의 기억 간의 간극이 더울 커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표준화는 하드웨어를 다루는 공장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는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설계 덕후인 탓에) 엄청난 비효율을 만든 워터폴 방식의 소프트웨어 개발이 사회적으로 MVP에 의해 대체되는 일이 일종의 사회적 진화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반가운 글귀입니다.
열 명에게 같은 내용의 지시 사항을 전달하더라도 이는 열 가지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 역시 흔히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같은 현상도 서로 다른 일로 인식할 수 있으니 차리기>의 모티브가 된 이미지를 인용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저버리고 전략이란 이름에 현혹되어 지름길을 찾던 시절에 잊었던 듯합니다.
핵심은 경험을 통한 학습을 대체할 방법은 없다는 사실이다. <중략> '경험보다 소중한 가르침은 없다'라는 경구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테니스를 배우는 방법은 테니스를 치면서 배울 수밖에 없는데 말이죠. 덜 치고 배우는 방법이 있는 것처럼 속고 산 시절이 꽤 길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주에서 초등학교를 다녀 승마 시합에 출전한 아이를 따라갔다가 본 장면이 떠오릅니다.
학생의 관점에서 본다면 문제는 어떻게 해야 자아 1의 판단과 의심, 두려움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기술적 지시를 받아들이고, 사용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심하게 긴장한 아이는 시합 광경에서 본 여러 가지 시청각 자극에 엄청난 영향을 받은 듯합니다. 증명할 수는 없지만 굉장히 좋지 않은 사회적 신호들을 잔뜩 본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승마란 운동 경기의 위상을 짐직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다음 포기말을 보니 축덕질을 하며 본 영상이 떠오릅니다.
코치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야 자연적 학습 과정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도우면서 지시 사항을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 중요하다.
산업화에 성공한 영국 축구 산업과 한국 승마 커뮤니티의 격차가 느껴진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포기말을 보면서 '충조평판'이 제대로 된 대화가 아니란 사실이 함께 떠오릅니다.
힌트는 말로 표현되거나 행동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바람직한 폼을 최대한 잘 전달해야 한다.
더불어 '협상론적 세계관'을 위해 필요한 비언어적 소통 능력에 대해서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네이버 한자 사전 검색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2]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문장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포기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3] 이에 대해서는 최근 읽고 있는 <Why>에서 명쾌한 해석을 내려주었습니다.
[4] 제미나이를 이용해 빠르게 고등학교 교육의 기원을 찾아보았는데, 실패했습니다.
(61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61. 판단이 부르는 일반화 본능의 무용함 혹은 해로움
62. 판단을 내리지 말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연민의 힘
64. 현상태의 정확한 인지가 자연적 학습을 일어나게 한다
66. 무한한 잠재력과 경이적인 내적 지능을 지닌 자신
68. 지금은 지금뿐이다
69. 시각적 이미지와 감정적 이미지를 통해 동작을 배운다
71. 나에게 인공지능이란 무엇인가?
73. 나를 지배한 사고의 틀을 해체하면 만날 또 다른 나
76. 잠재력을 믿고 명확한 비전 수립 이후는 하도록 놔두기
77. 감정을 무시한 대가는 나쁜 관계의 기억으로 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