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
지난 글에 이어 <테니스 이너게임>의 제4장 '자아 2를 신뢰하기' 중에서 '그냥 놔두기' 그리고 '자아 2와 소통하기'를 읽고 느낀 점을 씁니다.
다음 포기말(=문장)은 <왜 기억을 해야 되는가?>에 썼던 기억에 대한 박문호 박사님 설명을 떠오르게 합니다.
자아 2의 행동은 자신의 동작에 대한 기억이나 타인의 동작을 관찰한 기억에 저장된 정보를 기반으로 한다.
기억의 내용은 물론 기억 자체가 마음이 끌리는 대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자아 2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상당한 힌트를 준다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다음 포기말은 곱씹어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는 말입니다.
명심해야 할 점은 자연적 학습 과정이 일어날 수 있도록 놔두고, 스트로크 하나하나마다 어떻게 쳐야 한다는 지시를 내리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하면 놀라운 결과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테니스 이너 게임>을 읽기 전에는 그런 행동을 하면서도 문제란 사실을 모르고 있었겠죠? 더불어 조환 님 때문에 알게 된 김연아의 영상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를 떠오르게 합니다.
테니스 동작은 분명 말로 완벽한 일대일 대응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근육의 움직임까지를 포함한 섬세한 동작은 말로 표현할 수 없죠. 그래서 작업 기억은 그저 행동을 통해서 기억을 만들어야 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판단이 개입하면 마음만 흐트러트릴 테죠.
오랜만에 찾아간 탁구장에서 드라이브를 시도할 때 머릿속에 들고나갔던 상념들이 떠오릅니다. 다행히 <테니스 이너게임>을 읽는 덕분에 순간에 집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한편, 다음 문장을 읽을 때는 스무 살에 간 진입했을 때, 제가 춤을 배우던 경험과 그대로 부합합니다.
요즘 12살짜리 아이가 춤을 배우는 방법과 한번 비교해 보자. 그는 파티에 가서 친구들이 유행하고 있는 춤을 추는 모습을 지켜본 다음, 완벽하게 마스터한 상태로 집에 돌아온다.
더불어 여름휴가 때 물놀이 중에 잠수 동작을 어떻게 하느냐고 아내가 물었던 순간도 떠오릅니다.
동작 하나하나를 글로 옮겨서 설명하고자 한다면 그 매뉴얼의 두께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리고 '책을 통해' 춤 동작을 익히려 한다면 체육 교육을 전공한 박사가 한 학기 내내 가르쳐야 할지도 모른다.
곁다리로 뉴진스 춤사위를 해설하는 다양한 영상이 존재하는 이유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확대하면 영화 평론가들의 존재 이유와도 연결되겠죠.
한편, 다음 포기말에 공감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집단 무지에 놀라게 됩니다.
이렇게 이것이 가능할까? 우선 단순히 지켜보는 것이다.
우리라고 칭한 것은 누구를 말할까요? 어쩐지 공교육이 우리를 속여 온 것이 아닐까 싶은 의심이 들었습니다. 김영식 님께 배운 환각계란 표현이 이럴 때 꽤 유용합니다. 뉴진스의 춤동작에 그럴싸한 이름과 설명을 붙인다고 해서 우리가 그 동작을 그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란 점이 바로 환각계란 이름이 잘 드러내는 그것입니다.
다시 보니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과 정확하게 같은 포기말입니다.
자아 2에는 눈으로 한 번 보는 것이 백 마디 말보다 효과적이다.
보지 않고 글로만 접하면 글쓴이의 생각에 더하여 독자의 기억이 덧붙인 경험이 섞여 잡종의 환각계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기만 해도 배우는 일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챔피언십 대회를 TV로 본 다음 공이 갑자기 잘 맞는 현상은 테니스를 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경험해 봤을 것이다.
아이들을 보며 놀랐던 육아 장면들이 있죠.
톱플레이어의 스트로크를 철저하게 분석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는 사고의 개입 없이 집중한 상태에서 눈앞에 보이는 이미지를 흡수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어릴 적 유난히 수업 내용을 잘 외우던 시절에는 그러한 능력이 있었던 듯합니다.[1]
다음은 '자아 2와 소통하기'에서 밑줄 친 다말말(=구절)입니다.
요약하자면 우리 대부분은 자아 2와 새로운 관계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소통 방식이 필요하다.
나 자신과 새로운 소통 방식이라니 신선합니다. 어떤 것일까요?
자아 1이 비판적인 시각으로 자아 2를 바라볼 때는 멸시와 비난을 통해 이를 억압한다. 하지만 자아 1이 자아 2가 지닌 본연의 지능과 잠재력을 인지한다면 자아 2를 존중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다. 이러한 태도를 겸손이라고 하는데, 이는 존중하는 대상에 대해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는 감정이다.
'멸시와 비난'은 주위에서 인기를 얻으려는 사람들에게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자의 다음 포기말은 다른 맥락에서 쓰인 말이지만, 제 상황에도 그대로 도움이 될 듯합니다.
존중하는 태도를 지니면 상대방의 언어로 말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실제로 그러한지 앞으로의 일상에서 확인해 보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포기말에서는 전혀 다른 내용을 배웁니다.
A가 B에게 자신의 의사를 가장 확실하게 전달하기 위한 방법은 가능하다면 B의 모국어를 쓰는 것이다.
설계 덕후로서 모델링 과정에서 시각화가 중요한 이유를 전혀 다른 맥락에서 배웁니다.
자아 2의 모국어는 바로 이미지, 즉 감각적 이미지다. 시각적 이미지와 감정적 이미지를 통해 동작을 배우는 것이다.
그렇군요!
글을 다 쓰고 나서 페북에서 <단단한 영어공부>의 김성우 님의 글이 눈에 띄었고, 기억하고 싶어서 인용합니다.
메시지 내용에 따르면 다음 글에 삽입해야 할 듯하나
판단을 내리지 말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연민의 힘
이미 발행한 글이라 후속 글인 여기에 추가합니다.
[1] 지금은 그런 능력을 잃은 지 오래라 제가 그런 능력이 있었음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56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58. 케네디에게 침착함, 허심탄회함, 명료함을 배우자
59. 과정은 몸에 배어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
61. 판단이 부르는 일반화 본능의 무용함 혹은 해로움
62. 판단을 내리지 말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연민의 힘
64. 현상태의 정확한 인지가 자연적 학습을 일어나게 한다
66. 무한한 잠재력과 경이적인 내적 지능을 지닌 자신
68. 지금은 지금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