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
지난 글에 이어 <테니스 이너게임>의 제4장 '자아 2를 신뢰하기' 중에서 '자신을 신뢰하기' 를 읽고 느낀 점을 씁니다.
다음 포기말을 보니 자아 1이 자아 2를 믿을 때 진정한 자신감이라 말해야 하는 듯합니다.
자아 1의 무지나 오만으로 인해 자아 2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자신감을 가지기는 어렵다.
자아 1이 '나'라고 생각하는 '나'의 본체는 자아 2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따져 보니 지난 글에서 다룬 '자아 정체성의 분열'이란 말이 명확하게 다가옵니다. 이번에는 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마음에 드는 풀이는 아닙니다.
'뜻한 대로 이루어 낸다'라는 말은 통제를 전제로 하는 자아 1 중심의 기술인 듯합니다. 우리가 배운 교육의 한계를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사전 정의 대신에 자아 2가 마음먹은 대로 잘 겪고 어울릴 것이라 믿는 마음이 자신감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박완서 선생님의 호된 질타가 생각납니다.
근거 없는 낙관주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중략> 알아서 하도록 놔두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당신의 신체와 뇌의 능력을 믿고 이들이 알아서 라켓을 휘두르도록 놔둔다. 자아 1이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평론가가 끼어 들어서 독자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상황을 나무라는 장면이 저에게는 자아 1이 자아 2가 움츠려 들고 마음껏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장면과 비슷하게 여겨지는 듯합니다.
3년 전에 <육아란 무엇인가?>를 쓰지 않았다면 적어도 다음 포기말을 지금처럼 공감할 수는 없었을 듯합니다.
자아 1과 자아 2의 관계는 부모-자식 간의 관계와 일견 유사한 면이 있다.
뿌듯한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다음 포기말은 낮에 일과 중에 제가 한 언행과 관련이 있습니다.
아이를 신뢰하면서 사랑하는 부모는 비록 실수를 저지를지언정, 그로부터 얻는 것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아이가 스스로 하도록 놔둔다.
낮에 누군가의 오타로 빚어진 오해에 대처하면서 <영어 공부에 대한 관점을 바꾸는 계기를 만나다>를 쓸 때 배운 말, '정확은 부정확의 축적이다'를 인용하고 (어쩌면 저 자신과) 동료가 실수로 위축되지 않게 했습니다.
다음 다발말을 보며 지인 중에서 가족들을 믿지 않는 누군가가 떠올랐습니다.
'하도록 놔두는 것'은 '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다. 지나치게 노력하는 것도 아니고, 당신의 샷을 통제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런 일들은 모두 자아 1에 의한 것이며, 자아 2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직접 처리하려는 행동이다.
그가 한발 떨어져서 자신의 가족이 하는 행동을 유심히 보면서 자기 뜻대로 하는지 아닌지 감시하는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걸 내면에 투사하면 그대로 저 자신을 살펴볼 수 있는 거울로 응용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통제는 효과가 없다고 말합니다.
포인트가 중요할수록 자아 1의 통제도 심해지면서 몸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거의 항상 처참하다.
앞서 언급한 지인의 가족 관계는 저에게는 처참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지인의 시각은 그의 아버지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도 저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정립된 저의 결혼관인 <결혼은 사랑을 배우는 학교에 입학하는 일이다>가 떠오릅니다.
<테니스 이너게임>을 다시 펼치고 글을 쓰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포기말들입니다.
근육을 통제하려고 한다면 아마도 불필요한 근육까지 사용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필요 이상의 근육을 사용하면 에너지를 낭비할 뿐만 아니라 특정 근육의 수축으로 인해 꼭 필요한 근육의 이완을 방해하는 결과가 초래되기도 한다. <중략> 자아 1이 우리 몸의 지혜에 대적한 결과다
사실 비슷한 말이 반복되는데, 이제야 빠져 들기 시작하는 듯도 합니다.
다음 다발말을 보면 '다행스럽게도'에서 강한 강조가 느껴집니다.
다행스럽게도 대다수의 아이들은 부모가 간섭하기 전에 걸음마를 배운다. 하지만 아이는 단지 잘 걷는 방법만 배우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에 내재되어 작동하고 있는 자연적 학습 과정에 대한 자신감도 얻게 되는 것이다.
더불어 <과정은 몸에 배어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을 쓰면서 다시 소환해서 다듬었던 '아기 발걸음'에 대한 생각과 느낌이 더욱 명확해지는 듯합니다.
이를 깨달았다면 자아 1을 어떻게 다룰지 알려주는 듯한 다발말이 이어집니다.
엄마는 애정과 관심의 눈길로 아이가 노력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현명한 엄마라면 아마도 개입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걸음걸이를 배우는 아이를 대할 때처럼 테니스 게임을 대할 수 있다면 아마도 더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아이가 균형을 잃고 넘어지더라도 어설프다며 비난하는 엄마는 없다.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격려의 말을 던지거나 제스처를 취할 수는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이의 동작이 조화롭지 못하다는 생각으로 인해 걸음을 배우는 과정을 방해하는 일은 없다.
많은 경우 개입이 방해였다니!
자신은 아이와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애정과 관심이 담긴 시선으로, 하지만 분명히 별개의 객체로서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된다.
물론, 중국에서의 경험이 뒷받침이 되었지만 큰 아이의 모습을 멀리서 물끄러미 바라볼 때 '그대로의 개성'을 인식하고 애정과 관심이 담긴 시선을 기억하려고 찍었던 사진입니다.
'아하'하는 순간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몸이 아니다.'라는 말 때문이죠.
이러한 '분리된 관심'은 테니스 실력 향상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당신은 당신의 테니스 게임과 별개의 존재라는 점을 명심하라. 당신은 당신의 몸이 아니다. 마치 다른 사람을 응원하듯이 당신의 몸이 배우고, 경기를 할 수 있도록 신뢰해야 하는 것이다.
테니스뿐 아니라 무엇을 함에 있어서도 '마치 다른 사람을 응원하듯이' 할 필요가 있군요. 책 모임을 하는 동료들과 <감정 과학자가 되는 법>을 읽으면서 나누었던 '메타 모먼트'에 대한 생각도 같은 이치로 수렴되는 듯합니다.
작년에는 안 되었는데, 이번 주 풋살 경기 때 확인해 보아야겠습니다.
당신도 직접 경험을 통해 랠리를 할 때와 압박감 속에 경기를 치를 때, 얼마나 자신을 신뢰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길 바란다.
(51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51. 교만을 다스릴 연민을 키우고, 마음챙김을 익히기
54. 행복은 개인적 문제가 아닙니다
58. 케네디에게 침착함, 허심탄회함, 명료함을 배우자
59. 과정은 몸에 배어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
61. 판단이 부르는 일반화 본능의 무용함 혹은 해로움
62. 판단을 내리지 말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연민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