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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이 세상을 충실하게 표현한다는 널리 퍼진 착각

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

by 안영회 습작

<경험의 해체와 인간 관찰력의 한심함에 대하여>에 이어서 <무의식은 어떻게 나를 설계하는가>의 '눈을 뜨다'에서 인상 깊었던 내용을 담습니다.


눈으로도 보지만 아는 것으로도 본다

소제목이 '눈을 뜨다'이기 때문에 '보는' 행위를 설명합니다.

'보는' 행위는 워낙 자연스러워 보이기 때문에, 그 과정 저변의 엄청나게 복잡한 과정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인간의 뇌에서 약 3분의 1[1]이 시각에 할당되어 있다는 사실이 놀랍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뇌는 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수많은 광자를 똑똑히 해석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엄밀히 말해서, 시각적인 장면은 모두 모호하다.

흥미롭게도 과학이 아니라 최봉영 선생님의 한국말 묻따풀을 따라가며 썼던 <사람이 눈으로 무엇을 보는 것>에서 유사한 지식을 다뤘습니다.

한국말에서는 시력(視力)으로 볼 때나 지력(智力) 여길 때나 모두 '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눈이 제 기능을 해도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한편, 보는 법은 배워야 한다는 말은 마치 볼 수 있는데 보지 않고 있던 곳을 비춰준 등대를 만난 듯한 시원함을 느끼게 해 줍니다.

수십 년 동안 앞을 보지 못하다가 수술로 시력을 회복한 사람들이 좋은 예다. 그들은 곧바로 세상을 보지 못하고, 보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중략> 눈의 기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도, 뇌는 들어오는 데이터를 해석하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평생 앞을 보며 살아온 사람들이 시각이 구축되는 것임을 제대로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은 시각체계가 착각을 일으킬 때가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어쩌면 모두가 영유아기 때 보는 법을 배웠을 텐데. 인지하고 한 행동이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착각'을 엄밀하게 정의하는 데에는 조금 어려움이 있다.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이 착각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는 주변부를 선명하게 보고 있다고 착각한다. 중심시야가 향하는 곳이 모두 선명히 보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착각'에 대한 글을 읽고 있으니 작년에 읽었던 <제정신이라는 착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착각이나 편향에 대해서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책이죠.

<제정신이라는 착각> 독후감
1. 우리 머릿속 세계상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2. 쌍안정 지각 그리고 Linguistic Self
3. 우리 모두 미쳤다고?
4. 우리는 세계를 만든다
5. 확신이 나를 가스라이팅 하지 않도록


시각이 세상을 충실하게 표현한다는 널리 퍼진 착각

평평한 사진에서 생길 리가 없는 깊이가 생겨나는 현상은, 시각 시스템의 계산이 기계처럼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딱 맞는 정보를 입력하기만 하면, 시각 시스템은 우리를 위해 풍성한 세계를 구축해 줄 것이다. 가장 널리 퍼진 착각 중 하나는 시각 시스템이 영화 카메라처럼 '세상'을 충실하게 표현해 준다는 믿음이다. <중략> 뇌가 일단 필요한 것을 포착하고 나면, 변화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더 이상 조사할 것이 없을 만큼 샅샅이 조사한 뒤에야 가능한 일이다. 이 '변화맹' 현상은 주의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어떤 물체의 변화를 알아차리려면, 반드시 그 물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책에서 처음 본 변화맹(Change Blindness)에 대해서는 참고하는 논문을 찾아 퍼플렉시티에게 요약을 부탁해서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변화맹은 시각적 장면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도 이를 눈치채지 못하는 현상입니다.

영화의 컷, 사진의 세부 변화, 실생활에서 사람 바뀌기 등 다양한 상황에서 나타납니다.

우리의 주의(attention)와 시각적 기억의 한계, 그리고 변화가 일어난 위치(중심 vs. 주변)에 따라 변화맹의 정도가 달라집니다.

저자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깔끔한 결론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눈이 보는 것들을 대부분 인식하지 못한다.


작년에 썼던 글인 <최고의 기량 발휘를 방해하는 모든 정신적 습관 극복>에 담긴 <테니스 이너 게임>의 주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의력이 가는 아주 적은 양만을 처리하는 눈

한편, 다음 글은 쉽게 그럴 수도 있다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자기 눈이 보는 정보 중 아주 적은 양만을 처리하고 있었다. 나머지는 그냥 그러려니 짐작할 뿐이었다.

이는 요즘 인공지능과 로봇과 대비하여 인간의 놀라운 에너지 효율을 생각하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죠. 과학이 이러한 사실을 밝혀내기 이전에 관찰력이 좋은 이들은 이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직업까지 만들어 낸 역사가 있습니다.

마술사들이 이미 오래전에 이 사실을 알아내서, 이 지식을 이용하는 방법을 완벽하게 다듬었다.


한편, 저자는 우리가 간과했던 '주의력'의 힘을 언급합니다.

우리의 주의력은 설탕 그릇을 자세히 조사해서 머릿속 모델에 새로운 데이터를 통합시킨다.

맥락이 전혀 다르긴 하지만 인공지능 분야의 저명한 논문도 주의력(Attention Is All You Need)을 성능 개선의 주안점으로 다뤘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 장면에서 특정한 측면만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가 놓친 부분을 인식하게 되는 것은, 누군가가 그 부분에 대해 물었을 때뿐이다.

묻따풀, 즉 묻고 따지는 일의 중요성 깨닫게 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개입이나 평가에 귀를 열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계속해서 확인하는 주의력의 지배적인 효과

연이어 다음 내용을 읽을 때에도 에너지 효율과 함께 인공지능에 대입한 성능 개선 따위를 생각해 보면 우리의 진화(?) 결과는 마치 쉽게 납득이 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킵니다. :)

뇌는 대체로 많은 것을 알아둘 필요가 없다. 밖에서 데이터를 가져오는 방법을 알 뿐이다. 뇌는 '꼭 필요한 것만 안다'는 원칙을 바탕으로 삼는다. <중략> 우리는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기 전에는 알아차리는 것이 별로 없다. <중략> 뇌는 세상으로 손을 뻗어 필요한 유형의 정보를 적극적으로 추출한다.〈뜻밖의 방문객〉에서 모든 것을 한꺼번에 알아낼 필요는 없다. 모든 정보를 뇌 안에 저장해 둘 필요도 없다. 정보를 찾기 위해 어디로 가야 하는지만 알면 된다.

읽으면 읽을수록 주의력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듯합니다.

우리는 감각기관이 뻔히 알아차릴 수 있는 것들을 대부분 인식하지 못한다. 주의력이라는 자원을 작은 부분에 기울인 뒤에야 그동안 놓치고 있던 것을 인식한다. 집중력을 발휘하기 전에는 그런 세세한 부분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대부분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세상에 대한 우리 인식이 그 세상을 정확히 재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세상을 세세하게 온전히 보고 있다는 우리의 믿음 또한 거짓이다. 실제로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것만 보기 때문이다.

한편, 집중이나 몰입에 대해서도 연상이 되는데, 생각이 너무 멀리 다른 곳으로 갈 우려가 있어 여기서 멈추도록 하겠습니다.


주석

[1] 3분의 1이라는 수치에 의문이 들어 네 종류의 인공지능에게 물었더니 챗GPT의 경우 다음과 같이 전체 뇌가 아니라 대뇌 신피질 표면적 기준이라고 추정하였습니다.

“뇌의 3분의 1”이란 표현은 대뇌 신피질 표면적 기준으로 시각 영역(30–35%)을 간단히 말한 것.

퍼플렉시티의 경우는 박문호 박사님의 글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요약하며 다른 수치를 제시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시각피질이 70%가 되고 있다. 시각이 압도적이면 즉흥적이 된다.

제미나이와 그록은 절반 정도라며 수치를 제시하지 않았으나 3분의 1이 정확한 수치는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무의식은 어떻게 나를 설계하는가>를 읽고 쓰는 연재

1. 우리는 이 행성에서 가장 분주하고 밝게 빛나는 존재다

2. 자동으로 움직이는 뇌에서 선택의 주체는 누구인가?

3. 관념계 여행과 무의식에 밀항하는 자아

4. 정신세계의 일들은 대부분 의식적인 통제를 받지 않는다

5. 생각대로 되지 않아도 생명현상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6. 경험의 해체와 인간 관찰력의 한심함에 대하여


지난 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 연재

(126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126. 인공지능을 지배하는 자, 미래를 지배한다

127. 우리는 이 행성에서 가장 분주하고 밝게 빛나는 존재다

128. 왜 인간은 자유로부터 도피하려는 경향이 있는가

129. 자동으로 움직이는 뇌에서 선택의 주체는 누구인가?

130. 관념계 여행과 무의식에 밀항하는 자아

131. 정신세계의 일들은 대부분 의식적인 통제를 받지 않는다

132. 생각대로 되지 않아도 생명현상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133. AI 시대의 실용적 생존 가이드

134. 논리는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익히는 것

135. 인류의 멸종은 예정되어 있다

136. 비극은 '나는 남들과 다르다'라고 믿는 데서 출발한다

137. 운명, 연기(緣起), 확률 분포 그리고 테라포밍

138. 인간이라는 한계, 인간이라는 구원

139. 아차, 바로 이런 상태가 감정의 덫에 걸려든 상태지

140. 경험의 해체와 인간 관찰력의 한심함에 대하여

141. 악(惡)의 낙수 효과는 현실이고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142. 원대한 포부를 가진 사람들과 역사적인 연금술

143. 자신만의 기억을 위해 싸울 때 당신은 인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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