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호學의 시작
지난 글에 이어 <제정신이라는 착각> 프롤로그 내용으로 묻고 따지고 풀어봅니다.
이 글의 제목은 제가 지은 것이 아닙니다. 프롤로그에 있는 저자가 쓴 소제목인데, 어그로 끄는 표현의 배경이 되는 포기말[1]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현실에서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다음 다발말[2]은 개인적 경험 탓에 <내가 과학을 공부하는 이유>를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는 어째서 최대한 현실적인 세계상을 제공하는 걸 최우선 과제로 여기지 않는 뇌를 가지고 태어났을까? 진화가 어째서 우리를 종종 현실을 그릇되게 평가한 뒤, 반대되는 사실을 대두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틀린 확신을 고집스럽게 부여잡는 존재로 만들었을까?
2019년에 읽었던 <팩트풀니스>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세계적인 지도자급으로 분류되는 저명인사들도 세계적인 통계에 드러난 사실에 대한 이해는 침팬지가 찍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사실이 가장 충격이었습니다.
독자님들도 맛볼 수 있게 메모했던 내용 일부를 찾아봤습니다.
언론에 의지해 세계를 바라본다면, 내 발 사진만 보고 나를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발도 내 일부지만, 꽤 못생긴 일부다. 내게는 그보다 나은 부위가 여럿 있다. <중략> 전문가는 어떤가? 전문가는 자신이 선택한 세계의 한 조각을 이해하는 데 몰두하는 사람이다.
지나고 보니 <팩트풀니스>가 인도한 취향(?)은 저를 과학 공부로 이끌었습니다. 그 결과물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박문호學의 시작>입니다.
감탄을 자아내는 포기말입니다.
나는 뇌에서 확신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살펴보면서 이런 질문들에 답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뒤이어 저자가 호기심에 이끌려 삶을 바친 연구가 저작으로 이어진 동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열린 대화를 나누고 서로 합의에 이르는 것이 많은 경우 불가능할 정도로 서로 다른 확신이 심하게 대립하는 모습이다.
제가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를 읽고 얻은 개념인 '협상론적 세계관'이 떠오릅니다. 아직 저에겐 실천으로 옮기기 어려운 개념이지만 마음속에 있는 말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다시 도전할 수 있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게 됩니다.
책에 '탈진실의post-truth 시대'란 표현이 나옵니다. 바로 공감하고 '그렇지'라고 속말을 했습니다. 처음 들어본 말에 어떻게 공감할 수 있는지 기원을 찾아보니 <팩트풀니스>에 흔적이 있습니다.
업계는 조만간 철자 실수보다는 사실 오해를 바로잡는 데 신경을 쓰고, 직원과 고객이 세계관을 반드시 정기적으로 업데이트하길 바라지 않을까 싶다.
책에는 또 이분법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듯한 다발말도 등장합니다.
우리는 확신을 '정상적인 것'과 '제정신이 아닌 것', 합리와 비합리, 건강한 것과 병든 것으로 양분한다. 우리 모두가 이런 구분이 직관적으로 그럴듯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구분은 복잡성을 줄여주며, 구조를 부여한다. 한마디로 이렇게 구분하면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워 보이는 세상에서 방향을 잡는 것이 더 수월해진다. <중략> 나는 이 책에서 확신을 단순히 '정상'과 '비정상' 같은 이분법으로 분류하는 것이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 타당하지 않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게다가 이런 이분법은 위험하다. 건설적인 대화에 장애물이 되고, 사회 분열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처음 읽었을 때보다 타이핑하며 다시 보니 더 풍부한 생각과 느낌일 생깁니다. 처음 읽으며 밑줄을 칠 때는 옆에 '이분법은 실제가 아닌 방향을 잡을 때 쓰는 인식 도구'라고 메모했습니다. 다발말이 준 느낌을 하나의 매듭말[3]로 표현한 것이죠.
다시 보니 <선과 악은 해로운 경우가 많은 개념이다>를 쓰게 했던 느낌도 떠오릅니다. 그리고 박문호 박사님께 배운 접근과 회피라는 생리 활동의 두 축도 떠오릅니다.
하지만, 오용을 피하고 사고의 도구로 사용하면 양분이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시간적으로) 가까운 예로 어제 들은 매불쇼에서 유시민 작가가 이번 총선이 '이슈가 구도의 힘을 넘어서는 선거'라고 규정했습니다. 양당제나 다당제로 구도를 보는 사고도 이분법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구도와 이슈(정권 심판)에 대한 구분 역시 마찬가지죠. 이때 주의할 점은 실제 자체가 아니라 실제를 보는 현상의 틀로만 이들이 유효하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이 책이 주는 핵심 메시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다발말(단락)입니다.
핵심 명제는 바로 이것이다. 어떤 확신이 '정상적인' 것으로 혹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것은 언제나 가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가설은 종종 우리에게 커다란 유익이 된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예견하게 해 주고, 그런 사건에 더 쉽게 대응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설은 가설일 따름이다. 즉 아직 입증되지 않은 가정이므로, 언제든 잘못된 것으로 드러날 수 있다.
재밌는 문장입니다. '정상적인' 것이든 '제정신이 아닌' 것이든 이들은 가설이며, 종종 우리에게 커다란 유익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잘못된 것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유익하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오전 회의에서도 써먹은 전략적 로드맵이 떠오릅니다.
책에서는 하나의 점 혹은 노드를 '가설'이라고 하고, 아침 회의에서 저는 이를 '목표'라고 했었죠. 그리고 지나고 난 후에만 길이 되기 때문에 생각의 공간에서는 가설일 뿐입니다. 길이 되는 순간 일상이 되고, 이야기의 일부가 됩니다.
유일한 인생길은 지나온 길뿐이다
[1]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문장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포기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단락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다발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3]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어구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매듭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