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호學의 시작
박문호 박사님發 지식 덕후 활동은 <월말 김어준>에서 박문호 박사님 추천에 의해 구입한 <제정신이라는 착각> 프롤로그로 이어집니다.
마침 다음 포기말을 읽은 날 오후에 '임자가 자아인가?' 하는 질문에 푸는 과정에서 최봉영 선생님과 통화하다가 들은 말이 다시 이 포기말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사람들이 주어진 사실과 확률을 무시하고, 흔들림 없이 자신의 확신을 고수하는 현상을 말이다.
선생님은 최근 과학자들의 주장 속에 있는 역설을 예로 들면서 무리하게 자신의 인식의 틀 안에 모든 것을 욱여넣으려는 의도로 설명했습니다. 저는 오전에 읽었던 내용 즉, 위에 인용한 포기말을 떠올렸습니다. 해당 사건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아래 이미지나 일부 과학자들의 주장이나 '욱여넣는다'는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림은 저자가 던진 질문에 대해 한 가지 대답을 합니다. '각자 다르게' 세계상을 형성합니다.
저자가 다양한 연구 결과를 토대로 해당 분야 전문가가 아닌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겠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면서 서로 얼마나 평화롭게 잘 살 지낼 수 있느냐 하는 데는 우리가 현실에 대해 지닌 상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실에 대한 상이 어떤 식으로 더불어 살아갈지, 어떤 규칙을 세우고 사회와 개인으로서 어떻게 중요한 결정을 내릴지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의 메시지를 제 버전 다시 말해 제가 동의하고 수용하는 문구(매듭말)로 바꾸면 '포용적인 세계상을 만들자'입니다. 혹은 '저의 뇌 속에는 포용적인 세계상을 만들어야지' 정도가 될 수도 있고요. 무슨 말인지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할 듯합니다.
앞서 본 그림처럼 우리는 서로 다른 상을 만듭니다. 제가 이를 구체화한 그림이 있습니다. '세계상'을 최봉영 선생님께 배운 한국말로 하면 '녀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녀김 혹은 여김이 있죠.
이로 인해서 필연적으로 갈등이 발생합니다. 앞서 인용한 글에도 '평화롭게 잘 살 지낼 수 있느냐'는 매듭말이 있는 것을 보면 저자의 인식과 제 인식에 공통점은 갈등 다루기가 사는 데에 꽤 중요하다는 사실이 아닐까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박문호 박사님의 강의로 이 책의 요약을 들은 탓일 수 있겠지만, 이 책을 다 읽는다고 해도 해법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저는 오늘 페북 광고가 보여준 아래 이미지를 동원해서 제 방법을 설명합니다.
일단, 양자 관계부터 시작한다면 상대를 바꾸기보다는 나를 바꾸는 방법을 택하겠습니다. 이는 XP에서 배운 내용입니다. <나만 잘하면 전체가 나아지는 XP>에는 적어도 9년 정도의 제 노하우가 담겨 있습니다. 제가 XP라 불러온 노하우를 불교에서는 점수(漸修)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영화 <역린>에서 <중용> 구절은 인용하며 지극히 정성을 다 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바꾼다고 말합니다. 종교나 배경 지식이나 선호가 다르기 때문에 각자의 녀김에 어울리는 말을 고르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표현이 옳고 그르냐 혹은 정확하냐가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 작동하느냐 일 테니까요.
제 설명에 아직 '어떻게'에 대한 설명은 많이 부족합니다. 저도 이제 막 찾는 중인데, 지식 덕후질로 일부 눈치를 채고 탐색하는 중입니다. 두 가지 가정 하에 실천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잦은 빈도로 피드백을 받아야 한다는 점과 순서와 판단과 행동 패턴을 조합한다는 점에서 알고리듬과 매우 유사하다는 가정입니다. 이에 대해 처음으로 기록한 글이 <내 일상을 차릴 알고리듬을 상상하다>입니다.
두 번째 가정은 제 관심사와 지식과 활동을 들여다보면 이를 포괄하는 저장소가 존재할 것이라는 가정입니다. 이는 지식 노동에 종사하고 일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탓일 수도 있어서 모두에게 유효한 지는 모르겠습니다. 암튼 이를 추적하기 위해서 업무가 드러나게 하고, 접하는 지식을 드러나게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제가 다루는 지식의 체계를 만드는 시도[2]와 사용하는 시간을 매핑해 볼 계획입니다. 진짜 운영체제처럼 해 보고 싶은 거죠.
지극히 저에게 맞춰진 지식 덕후질이라 다른 분들에게는 실용적이라 할 수 없습니다.
다만, 현재 수준에서도 독자님들도 활용할 수 있는 간단한 도구는 있습니다. 아직 여러분이 포용적 세계상을 만들지 못해 서로 생각이 다른 대상과 대화를 해야 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도구입니다. 상대가 여자(여자 친구나 아내)라고 생각하죠. 독자님이 여자분이면 남자로 바꿔서 읽어 주세요.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때, 이 말이 사실인지 감정인지 의미인지부터 구분해 주세요. 이건 제 주장이 아니라 박문호 박사님 영상에서 배운 내용입니다. 꽤 효용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저도 써먹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인용하기 위해 방금 '의사소통의 신호등'이란 이름도 붙였습니다.
이 방법은 안전한 대화를 유도하기도 하지만, 대화 이후에 성찰하는 과정을 통해 되먹임 할 수 있다면 포용적 세계상을 만드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프롤로그로 돌아가 봅니다.
우리가 주변 세계(그리고 그 세계 속 우리 자신)를 어떻게 지각하고, 우리의 지각을 어떻게 커다란 전체, 즉 '큰 그림big picture'으로 정돈하는지는 매우 개인적인 부분이다. 우리의 세계상은 머리, 더 정확히 말하자면 뇌에서 만들어진다. 물론 우리는 사회적 존재로서 소통하기에, 나의 세계상과 너의 세계상은 서로 무관하지 않다.
과거에 공부하고 쓴 결과로 어쩔 수 없이 <현상적 세계와 물리적 세계를 구분하기> 내용이 떠오릅니다. 다시 또 책 내용을 보겠습니다.
그리하여 각자가 만들어내는 세계상은 많은 부분 유사하다. 그럼에도 결국 감각기관이 제공하는 데이터를 이해하고 설명해야 하는 것은 나의 뇌다.
예전에 지인에게 물리적 세계와 다른 현상적 세계를 설명했을 때, 그가 낯설어했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지금 보니 '현상적 세계'란 말은 결국 물리적으로 뇌가 만들어내는 사적private 소유물이라는 말이기도 하네요. 또한, 이전 글 인용문에서 말한 '가상 세계'이기도 합니다.
138억 년 전 빅뱅에서 시작해 언어 상징을 통한 가상 세계의 출현에 이르는 우주의 진화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1] 왜 포기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결정적 지식도 별도로 기록하고, 지속하는 글쓰기 중간 결과물을 위한 저장소를 구축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