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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Feb 27. 2024

2024년에는 지식 덕후로 변신하는 중

지식 덕후의 탄생

가까운 지인들에게 괴짜에 대해 발표하면서 '지식 덕후'로 표현을 바꾸었습니다. 평일 저녁 퇴근 후에 세미나 룸에 모여 3시간 즉흥 강의를 듣는 분들이기에, 그들 역시 '지식 덕후'임이 틀림없었죠. 아무튼, 그렇게 몸을 쓰고 시간을 들인 공부(工夫)[1]를 하니 번역 최종 검토 작업 중에도 새로운 관점으로 말이 말을 겁니다.


컴퓨터가 저를 구해줬죠

다음 다발말[2]은 한국어판 <Tidy First> 24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컴퓨터가 저를 구해줬죠. 연속해서 금융 관련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돈에 관한 기본적인 개념을 프로그래밍해야 했습니다. 프로그래밍은 제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때부터 돈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교훈이 제 직관에 스며들어 개발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첫 번째 포기말[3]을 읽을 때는 이렇게 속말을 했습니다.

나랑 똑같네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인지는 솔직히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만,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소프트웨어 개발, 설계나 IT 컨설팅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일에 서툰 저를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면, 가족들과 어떻게 교류를 하는지, 재테크나 부동산 계약 따위의 현실적인 지식을 포함해서 소프트웨어 공학 이외에는 다른 교양도 없었습니다.[4]


그래서 무언가 배울 때, 항상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를 하며 배운 지식을 응용했습니다. 놀랍게도 대부분의 경우에 통했습니다. 이제 와서 보니 그건 공학 지식이 아니라 현장에서 사람들과 어울려서 배운 생활지였습니다. 프로그래밍 기술과 실체화를 다룰 뿐, 지금 보면 사람과 말을 아우르는 문화를 통해 배운 것이니 어떤 면에서는 인문학적이기도 합니다.


응용 프로그래머 그리고 설계

하지만, 분명 직업은 저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응용 프로그램은 영어로 Application이라고 합니다. 여러 가지로 풀어 볼 수 있지만, 직업 초기 업무 현장의 문제를 발견하고 프로그램으로 나아가는 일을 저는 Realization이라 여겼습니다.


소프트웨어를 결과물이자 미디어(중개 물질)로 시스템을 구현하는 일은 분석과 설계라는 활동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분석은 모호하게 얽힌 관습, 지식 체계, 클라이언트의 욕망, 그들의 조직구조와 권력관계 그리고 기존 코드에 담긴 기능과 이력 따위를 찾아내는 일입니다. 그리고 설계는 분석 결과를 상상의 산물로 만든 후에 요소로 나누고, 유기체로 관계를 맺어가며 구성하는 일입니다.


아무튼 분석과 설계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얽힘을 풀거나 다시 구성하는 훈련을 수도 없이 하게 됩니다. 최소한 24년은 일상에서 가장 긴 시간 많은 에너지를 써서 한 일이죠. 그러면, 나도 모르게 <현상적 세계와 물리적 세계를 구분하기> 훈련도 하게 됩니다. 그 표현이나 개념은 박문호 박사님께 배웠지만, 몸으로 익혀서 이미 익숙한 활동과 직관은 갖고 있었죠. 그리하여 <소프트웨어는 현상을 물리적 세계에 대응시키는 기술>이란 점도 최근에 깨달은 것이죠.


실체화와 성장형 마인드셋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 상상과 다른 바탕을 지닌 이해관계자들을 만납니다. 인간 공동체 안에서는 <Realization(실체화)와 나의 지난 24년>에서 쓴 대로 마치 농구 경기에서 밀집된 골밑을 뚫는 일과 같은 느낌을 주는 일들을 해야 했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면 저도 모르게 성장형 마인드셋이 장착됩니다. 그런 말조차 몰랐는데 이미 습관이 되어 버린 듯합니다.


성장형 마인드셋으로 지식 덕후로 변모

회사 설립 이후 이제는 점차 경영자로 익숙해지고 사업과 시장 그리고 세상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고 흥미도 갖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지식 덕후"라는 인식도 편안해집니다.


이 글에서 다룬 컴퓨터 괴짜스러움을 음미할 때, 동시에 <Tidy First> 24장에 나오는 Frozen Desire 개념에도 푹 빠집니다.

제임스 뷰찬James Buchan은 『Frozen Desire』(Picador, 1998)에서 사람은 종종 원하는 물건이 있지만 당장 갖고 싶지는 않을 때가 있는데, 돈은 바로 이러한 ‘냉동 욕망frozen desire’을 대변한다고 주장합니다. 한 달 동안 먹을 수 있을 만큼의 가치를 벌었지만, 한 달 치 식량을 저장하고 싶지 않다면, 벌어들인 가치를 저장했다가 일주일에 한 번씩 신선한 상추로 편리하게 바꿀 수 있게 되니 굉장히 편리하게 해 주죠.

돈의 본질적 가치에 대한 개념적 설명 중에 가장 나를 사로잡은 다발말입니다. 그러한 돈의 본성에 두 가지 놀라운 속성이 있다고 합니다.

 

    오늘의 1달러가 내일의 1달러보다 더 가치가 있기 때문에 버는 것은 빨리하고, 쓰는 것은 가능한 뒤로 미룹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는 어떤 물건에 대한 선택권이 물건 자체보다 낫기 때문에 불확실성에 맞서는 선택권을 만듭니다.  


제가 지식 덕후에 대해 세미나를 할 때, 저의 투자 선생님인 허모다란님도 참석했습니다. 그는 제가 제안한 지식 덕후 실천법에 대해 '회사를 다니면서는 못하지 않나요?'라고 물었습니다. 환경을 구조적으로 받아들이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이델베르크의 불확정성 응용처럼 생각해 보면, 내가 현실을 보는 관점에 따라 현상이 전혀 다르게 보이고, 우리의 감정과 느낌도 전혀 달라집니다.


당시 현장에서는 답을 제대로 못했는데, 그 답을 정교하지 않은 말이지만 그림으로 후다닥 그려 봅니다. 회사에 있어도 퇴근 시간(투잡 하는 분들은 이미 많죠)에는 지식 덕후가 될 수 있습니다. 돈의 본성 중에서 선택권에 무게를 싣는 행동입니다. 사실 근무 시간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상사의 요구 혹은 회사의 이익과 직결된 행동을 '명령 이행'이라고 이름 붙이겠습니다. 그렇다면, 명령 이행이라는 활동을 정확하게 정의합니다. 그리고, 명령 이행의 결과와 무관한 과정이나 방법은 '지식 덕후'의 방식을 채용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선택권'에 무게를 싣는 것이죠.

이렇게 하다 보면 틀에 박힌 직장 생활과는 꽤 다른 모습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차피 상상이니 증명할 수는 없고, 믿거나 말거나 문제입니다.


이 글을 시작으로, 지난 <말이 말을 걸어 글로 쓰는 이야기> 연재를 마치고 새롭게 <지식 덕후의 탄생> 연재로 이어갈까 합니다. "지식 덕후"로 구글링 해 보니 아예 새로운 개념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결과 페이지가 천 개 정도뿐임을 보면, 아직 생소한 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주석

[1] <배움의 순간: 공부란 무엇인가?>를 참고하세요.

[2] 왜 다발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3] 왜 포기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4] 유럽 축구는 예외네요. <축덕질에서 배우기> 연재가 그 유산입니다.


지난 말이 말을 걸어 글로 쓰는 이야기 연재

1. 질문이 우선하고, 실행이 질문을 만든다

2. 스피노자 대신에 김성근 감독님

3. 야구라는 것으로 인생을 전하기

4. 야신이 말해 주는 자신만의 길

5. 새로운 운칠기삼(運七技三) 활용법

6. 인간에겐 한계가 없다는 걸 모르고 산다

7. 말이 말을 걸어 나의 차림을 돕는다

8. 우울증이란 진단명은 나의 개별성을 뭉갠다

9. 야신이 거북이에게 배운 자신의 프로세스를 만드는 법

10. 속말하지 않고 드러내 기록하고 다듬는 일의 힘

11.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12. 일상에서 만난 낱말 바탕 풀이의 즐거움

13. 바탕이 되는 기본, 바탕을 닦는 기초 그 위에 첨단

14. 다양한 뜻의 그릇 역할을 하는 한국말의 유연성

15. AI 시대에는 수능보다 덕후

16. 일단 공개적으로 시작하면 만나게 되는 것들

17. 괴짜(Geek, Nerd), 해커 그리고 덕후

18. 인공지능을 Linguistic Self 동료로 활용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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