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말을 걸어 글로 쓰는 이야기
일요일 아침 혼자 일어나서 조용한 아침 시간을 보낼 때 최봉영 선생님의 글이 주목을 끌었습니다.
늘 그렇듯 손때[1]를 묻히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묻고 따지는 제 방식으로 실천합니다. 선생님의 글을 바탕으로 표준국어대사전 풀이도 같이 소재로 잡습니다.
사전 풀이를 보다가 덤으로 얻게 된 깨달음이 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 풀이는 언어가 쓰이는 분야를 '단위'처럼 쓰는 '집합론적 사고'[2]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이와 달리 최봉영 선생님의 풀이는 말의 쓰임새와 펼침새를 잣대로 하는 차림법에 가깝습니다.
얼핏 '일됨'[3]과의 연관성이 떠올라 견주어 보았으나 당장 분명해지지는 않고, 또 글이 산만해질 듯하여 이는 다루지 않습니다.
대신에 최봉영 선생님 글의 동기가 된, 다른 말로 하면 바로 선생님 글의 바탕이 된 황호성 님 글을 살펴봅니다. 저에게 강렬한 느낌을 갖게 하는 문구는 아래 내용입니다. 두 가지 사무침이 있습니다.
하나는 다음 포기말[4]입니다.
나는 알고 있는 것이라서 쉽게 했어.
저자의 말뜻이 저에게 와서 꽂힌 것이 아니라 말이 최봉영 선생님의 후속 풀이를 부르고, 다시 그 풀이를 볼 때 그간 제가 손때를 묻혀 왔던 경험을 한 번에 소환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원래 그렇게 뇌가 작동하는데, 이를 모르다가 처음으로 또렷이 인식을 했다고 하겠습니다. 결국, 동료의 포기말은 트리거[5] 역할을 한 것이죠.
<말의 바탕치와 짜임새를 살펴보는 일>은 다름 아닌 기본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말의 바탕을 알아가는 동시에 내 판단의 근거가 되는 줏대와 잣대를 내가 겪은 일에 대입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바탕이 쌓이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바탕이 없을 때 어렵게 할 일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이죠.
두 번째 트리거가 된 낱말은 속말이었습니다. <속말과 말차림: 대화에서 얻은 보물>에서도 '속말'로 영감을 준 사람은 황호성 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속말을 들을 때는 '제가 속말을 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당시의 결론(?)은 '사실은 속말을 하겠지'였습니다.
그런데 속말을 하는 대신에 드러내고, 기록하고, 기록을 다듬는 일은 저의 제일 중요한 습관[6]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속말'이라는 황호성 님의 행동 양식이 드러난 배경에 도리어 <말차림법 묻따풀>을 함께 하면서 차리기 위해서는 드러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음이 존재합니다.
제가 이 글을 시작할 때 최봉영 선생님의 글을 보고 순식간에 아래 그림(쉽게 했어)을 그릴 수 있던 배경이 바로 속말로 하지 않고 드러내는 습관이 기본이 된 탓이란 점을 깨닫습니다. 호성 님 글 덕분에 얻은 일종의 메타인지 사례죠.
우발적으로 쓴 글이지만,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저에게 자극을 준 최봉영 선생님의 글 덕분이죠. 그 글의 동기는 분명 황호성 님의 글이었습니다. 그가 속말 대신에 드러내니까 스스로도 풀어나갈 힘이 생기지만, 누군가 도와줄 수 있게 된다는 효과도 함께 얻었다는 사실을 또렷이 보여 줍니다.
[1] <학습법과 창의성 모두 기억이 핵심이다>에서 인용한 박문호 박사님의 말, '내 감정의 손때를 묻히라는 겁니다'에서 유래합니다.
[2] 구글링 해 보면 필자의 글이 구글 요약으로 나오네요.
[3] '일됨'은 <사람들이 한국말로써 세상을 담아내는 방식>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4]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문장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포기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5] <새로운 운칠기삼(運七技三) 활용법>을 썼던 기억으로 '트리거'란 단어의 뜻을 사용합니다.
[6] 오죽하면 코로나로 중국에서 철수한 때에 정신 건강을 위해 브런치를 시작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