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말을 걸어 글로 쓰는 이야기
막바지 번역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 다발말[1]을 만났을 때 지난주 화상으로 진행한 말차림법 묻따풀에서 호성 님과 나눈 대화가 절로 떠올랐습니다.
책에서는 숨길 수 없이 모두 드러나고 맙니다. 제가 어떤 주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여러분도 그 사실을 알아차릴 것이고, 결국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응집도 개념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15년 전에는 응집도를 딱 부러지게 정의할 수 있었지만, 책을 쓰기 시작하면서 작년까지도 응집도를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스스로를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당시 대화 주제는 제가 손때[2]라고 부르기 좋아하는 학습 내용을 기록하고, 기록을 기억으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화상으로 대화를 나눌 때, 호성 님의 방식과 제 방식은 사용하는 수단의 관점에서는 굉장히 비슷했지만, 하나의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무엇을 만들어 가느냐의 결과물인데요. 찾아보니 호성 님의 방식은 자기화 메모에 이은 블로그 쓰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저는 브런치 글 쓰기가 결과이기보다는 행위를 이끌어 내는 수단에 가깝습니다. 물론, 저도 습관으로 자기화 메모를 하고 있기도 하고, 글 쓰기를 위해서는 자기화 메모가 필요하지만 계획이나 결심이 필요 없는 일상의 습관일 뿐입니다. 조금 더 인지 작용이 필요한 일을 브런치 글 쓰기 다음에 일어나죠.
둘의 대화를 배경으로 글을 쓰다 보니 보편적으로 확장해 보게 됩니다. 공개된 곳에 글 쓰기를 굉장히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저는 어떻게 공개된 공간에 글을 쓰게 되었을까요?
때는 2003년 막 엠파스가 블로그 서비스 시작할 때입니다. 소프트웨어 공학 석사를 마친 후에 부족한 경험을 개인 위키에 그날 배운 것을 그대로 기록하는 일로 채우며 살던 때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TIL(Today I Learned) 같은 것인데요. 저는 유행을 따른 것이 아니라 매일 쏟아져 나오는 모르는 말속에서 직업 공간에서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해서 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 네트워크에 문제가 생겨서 개인 위키 접속이 되지 않아 출근하고 큰 낭패를 본 일이 있습니다. 그렇게 상심해 있을 때, 당시 사용하던 엠팔 메일(엠파스의 메일 서비스)로 받은 서비스 소개가 계기가 됩니다.
야, 이러면 내가 위키 관리를 할 필요도 없잖아?
그렇게 시작한 블로그는 말 그대로 TIL 입니다. 어떤 체계도 없고, 독자도 생각하지 않은 개인의 생존을 위한 메모입니다. 동영상으로 '자기화 메모'에 대해 들을 때 바로 익숙하게 여겨진 이유도 다시 확인합니다. 이미 20 년 차일 때 들은 꼴이니까요.
자, 이제 제 이야기는 그만하고, 둘 사이의 대화 맥락으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공개적인 공간에 쓰는 일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혼자 쓰는 것은 어떤 차이를 만들까요?
글의 앞부분으로 돌아가 번역하던 다발말을 볼 때 떠오른 단어'Published'로 설명을 시작합니다. 이에 대한 기록이 담긴 제 글을 먼저 찾아보았습니다. <실제 비용과 가치 검증은 프로덕트 릴리즈 이후 발생>란 글이 있었습니다. 지금 제가 보아도 마음에 드는 문구가 있습니다.
실제 비용은 고객에게 프로덕트를 출하한 이후 발생한다
하지만, '실제'란 낱말은 고치고 싶네요. 뭐가 좋을까요? '실질적인' 혹은 '시장에 통하는' 등이 떠오르네요. 2016년 Release First를 표방한 혁신 전략으로 성공은 거둔 경험은 저에게 '빠른 릴리즈'에 대한 강한 믿음을 주었습니다. 브런치 검색해 보니 '릴리즈'를 사용한 글이 무려 112개나 됩니다.
Published는 마틴 파울러의 'Published Interface'에서 기원한 말입니다. API를 Published 전까지는 팀 내의 사연만 고려됩니다. 하지만, Published 후에는 팀과 무관하게 이를 사용하는 다른 코드의 영향을 받습니다. 글로 비유해 볼까요? 글을 쓸 때는 저자의 몫입니다. 하지만, 쓰고 나면 그 글에 대한 독자의 느낌은 저자의 능력과 권한 밖의 문제가 됩니다.
저는 이 문제가 비단 글 쓰기에만 통용된다면 굳이 이렇게 글까지 써 가며 요란하게 다루지 않겠죠. 저는 전업 작가는 아니니까요. 저는 프로그래밍 기술을 다루고 코드로 매출을 올리는 기업을 경영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지식 노동의 하는 기업의 경영자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마음에 품고 되새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지난 4년의 역직구 사업 실패의 경험도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옳으냐 그르냐를 구성원끼리 소통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답은 바로 시장, 광장, 광야에 있습니다. 그리고 시장을 이해하려면 가장 먼저 울타리를 허물어야 합니다.
울타리란 표현은 마친 어제도 인용한 페친 님의 글에서 떠올렸습니다.
나를 모든 사람에게 맞출 수는 없지만,
품을 수는 있는 역량이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겠는데~~
시시각각 울타리를 허물고 새로 짓고 ㅎㅎ
울타리를 없앨 수는 없는 게 현상계이므로.
무한할 수 없음을 직시하고 키우는 수밖에?
울타리에 대해 쓰고 보니 우물 안 개구리 이미지를 인용했던 기억이 떠올라 찾아보았습니다. <정보홍수시대에 문해력은 어떻게 갖출 수 있는가?>에서 인용했군요.
문해력을 따지는 지인들의 무지한 논의가 글을 쓰게 된 배경인 듯한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들의 '왜'라고 질문을 하지 않아서 무지하게 보였을 듯합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정의하지 않고 노력을 쏟으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벗어날 수 없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번역하며 배운 점을 쓴 글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필요한 일이라면, 일단 시작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게 사회적인 일이라면 공개적인 곳에서 해야 합니다. 저는 물론, 그런 줄도 모르고 시작한 공개적인 글 쓰기로 나도 모르게 사회적인 활동을 하고, 사회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보니 25살에 MBTI에서 극단의 I로 판정을 받았지만, 점차 E로 바뀐 일도 우연은 아닌 듯합니다.
만일 공개적 블로그를 하지 않았더라면 다음과 같은 소중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메모를 다른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형태로 다듬어 가기
토비 이일민 형을 댓글로 친해지고, KSUG 함께 만들기
Agile Java 커뮤니티를 만들고, 향후 KSUG로 이어가기
글을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해 일어나는 감정을 다스리기
글을 보고 찾아오는 모르던 사람들과 교류하기
코로나 이후 정신이 산란할 때 습작을 위해 brunch 개설하기
광장으로 나서는 것이 삶이나 역량의 관점에서는 곧 울타리를 허무는 일이란 사실을 이 글을 쓰면서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주커버그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글을 올리고 나서 인스타에서 흥미로운 멘트로 등장해서 추가합니다.
그리고 SNS를 하며 얻은 출처 미상의 이미지도 덧붙입니다. 이미지를 다운로드해 둘 때는, 저런 습관을 잘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쓰고 보니 바깥에 노출하고 받는 (때로는 아프고 창피한) 피드백이 사실은 (사회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습관을 알려 주고 있었는 줄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불필요한 계획을 세우지 않을 때 소환하는 타이슨의 명언이 어쩌면 건강하지 않은 제 습관을 찾아 나설 때 생기는 겁을 뜻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1] 왜 다발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학습법과 창의성 모두 기억이 핵심이다>에서 인용한 박문호 박사님의 말, '내 감정의 손때를 묻히라는 겁니다'에서 유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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