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인간에게 '늑대'인 시대에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엘제아르 부피에와 곽타타. 그들은 나무를 심은 사람들이다.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엘제아르 부피에의 끈질긴 노력의 결과 새로운 숲이 탄생하고, 도시로 일거리를 찾아 떠난 이들이 다시 숲으로 회귀하여 희망을 품고 정착하여 살아가는 이야기다.

그는 무려 35년간 매일 나무를 심었다. 1,2차 세계대전 때도 넓고 긴 산맥을 따라 참나무와 너도밤나무, 자작나무를 심었다. 어떤 절망과 실의가 찾아와도 묵묵히 한 그루의 나무를 심었고 마침내 황량했던 대지는 숲이 우거지고 물이 흐르고 온갖 새들과 동물의 보금자리인 가나안 땅처럼 바뀌었다.

땅을 파고 한 알의 씨앗을 심는 일은 그 씨앗 속에 우주가 들어있음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그는 날마다 온전한 도토리를 추려내는 일을 소명처럼 생각했다. 전쟁 중 한쪽에서 폭격을 맞아 산이 폐허가 되고 나무들이 사라져 가도 다른 한쪽에선 부단히 씨앗을 심고 가꾸는 일이 계속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숲이 복원되기까지의 과정은 그의 쉼 없는 노력의 결실이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Homo homini lupus)"인 시대에 자신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고 헌신적으로 숲을 가꾼 엘제아르 부피에의 모습은 경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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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가려고 한 곳에 이르자 그는 땅에 쇠막대기를 박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구멍을 파고는 그 안에 도토리를 심고 다시 덮었다. 그는 떡갈나무를 심고 있었다. 나는 그곳이 그의 땅이냐고 물었다. 그는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 누구의 땅인지 알고 있는 것일까?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저 그곳이 공유지이거나 아나면 그런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그는 그 땅이 누구의 것인지 관심조차 없었다./ p 29


1910년에 심은 떡갈나무들은 그때 열 살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무들은 나보다, 앨제아르 부피에 보다 더 높이 자라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그의 숲 속을 거닐며 하루를 보냈다. 숲은 세 구역으로 되어있었고 가장 넓은 곳은 폭이 11킬로미터나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아무런 기술적 장비도 갖추기 못한 오직 한 사람의 영혼과 손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하니 인간이라 파괴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는 하느님처럼 유능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피에는 자기 뜻을 꾸준히 실천해 가고 있었다. 자작나무들은 젊은이처럼 부드러웠고 아주 튼튼하게 서 있었다. 창조란 꼬리를 물고 새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엘제아르 부피에는 그런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주 단순하게 자신이 할 일을 고집스럽게 해 나갈 뿐이었다, / p41~43

1933년에 숲을 보고 깜짝 놀란 산림 감시원이 엘제아르 부피에를 찾아왔다. 그는 ‘천연’ 숲이 자라는 것을 위태롭게 할지도 모르니 집 밖에서 불을 피워서는 안 된다고 노인에게 경고했다. 관리는 순진하게도 숲이 혼자 저절로 자라는 것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 p 49


황폐화된 고장이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된 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의 아무도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 자의 집요한 노력이다. 그는 누구의 소유지인지 관심조차 없다. 그가 걷는 곳마다 씨앗을 심는 일. 그는 심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무를 가꾸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심었고 그가 심은 것들은 그의 의지대로 자랐다.


「종수곽탁타전」에 나무를 심는 곽타타가 등장한다. 곱삿병을 앓아 허리가 굽어 낙타처럼 보여 사람들은 그를 ‘탁타’라 불렀다. 모든 권력자와 부자들은 앞다투어 탁타를 자신의 정원사로 쓰고 싶어 했다. 다른 식목자들이 탁타의 나무 심는 법을 흉내 내어도 결과는 탁타와 같지 않았다.

“나는 나무를 오래 살게 하고나 열매가 많이 열게 할 능력이 없다. 나무의 천성을 따라 본성이 잘 발휘되게 할 뿐이다. 나무를 본성에 따라 심고 난 뒤에는 움직이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말아야 한다. 심기는 자식처럼 하고 두기는 버린 듯이 해야 한다. 그리해야 나무의 천성이 온전하고 그 본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식목자는 사랑이 지나쳐서 아침에 와서 보고 저녁에 또 만지고, 뿌리를 흔들어도 보고 손톱으로 껍질을 찍어본다. 그러는 사이 나무는 본성을 잃게 된다. 사랑이 지나치면 그것은 나무를 해치는 일이다.


곽탁타와 엘제아르 부피에 노인의 공통점은 나무를 심고 나무의 본성을 믿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나무의 성장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고 싹이 트고 자라는 것. 심는 이는 심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심었으니 거두기까지 자신의 몫이라 생각한다. 두께가 굵어지고 열매가 맺히면 그것은 쓸모로만 보이니 욕심이 깃들게 마련이다.

삶에서 우리가 곽타타나 부피에 노인처럼 살기 어렵다. 현실의 우리는 안타깝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늑대'인체로 살아간다. 우리가 나무를 심는 이유는 어떤 목적, 결과를 얻기 위함이지 그들처럼 감히 ‘욕망 없는 욕망’, ‘없음의 욕망’을 꿈꾸지 못한다. 현실이, 우리의 삶이 그러할지라도 때로는 심는 이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할 수 있다면 우리 안의 나무들은 저마다의 본성에 따라 저절로 숲을 이루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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