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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좇아 퇴사했지만,
통장엔 최저임금이 찍혔다

by 그러려니

퇴사한 지 몇 달.
새로운 일을 시작한 지는 이제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일을 선택한 기준은 단 하나였다.
‘하고 싶은 일일 것.’
그래서 이번엔 의미를 좇았다.

돈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저 즐겁게 일할 수 있으면 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막상 첫 월급이 통장에 찍히는 순간 나는 잠시 멍해졌다.




며칠 전 사무실에서 혼자 야근을 했다.

노트북 화면에 비친 내 얼굴이 조금 낯설었다.
익숙하지 않은 역할, 익숙하지 않은 책임.
그런데도 일을 하면서 업무의 범위가 늘어나면 나는 자연스럽게 일에 빨려 들어갔다.

“OO팀장님, 이거 한 번만 봐주세요.”
카톡 알림이 뜨면 지시를 기다리기보다 먼저 제안했다.
‘이건 이렇게 바꾸면 어떨까요?’
작은 수정 하나가 흐름을 바꾸는 걸 보며 조심스러움 대신 용기가 조금씩 생겼다.


한 번은 이사님이 말했다.
“OO님은 회사 일에 진심이 느껴져요.”
그 한마디가 신호처럼 들렸다.
‘지금, 제대로 가고 있다.’


주 3일 재택근무는
일과 생활의 경계가 옅어졌지만 이상하게 그게 싫지 않았다.
다시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감각이 조용히 돌아오고 있었다.

물론 불안은 있었다.

이 길의 끝이 어디인지 이 선택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모른다.
그래도 지금은 괜찮다고

출근길의 햇살과 동료의 웃음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덧 첫 달이 되었다.

월급을 받았다. 최저임금이었다.

알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통장에 찍힌 숫자를 보자 잠시 멍해졌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한 사람’이라 믿었다.
돈보다 의미를 좇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 마음 한쪽이 푹 꺼졌다.

‘아르바이트를 해도 이보다 더 벌겠다.’
‘나는 지금 뭐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속물일까,
아니면 현실을 마주한 평범한 사람일까.

좋아하는 일과 생계의 계산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퇴사 전의 나는 ‘재미없는 일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으로 떠났다.

하지만 지금은 묻는다.
재미만으로 버틸 수 있을까.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졌다.


그러다 스스로에게 말을 건넸다.

한 달 만에 모든 걸 판단하지 말자.
이 선택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조금만 더 지켜보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아가자.


그날 밤,

통장 잔액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나는 지금, 의미와 현실의 경계에서 균형 잡는 법을 배우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도 나는 같은 자리에서 어제보다 반 걸음 나아간 방식으로 조용히 나답게 일할 것이다.

깊은 고민을 할수록 세상이 조금 더 넓게 보였다.
혼란스러웠지만, 그 혼란 속에서 또 다른 성장이 시작되고 있었다.


어디로 뻗어 나갈지 알 수 없는 줄기 하나가
내 안에서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솟아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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