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 격포여행 4 (15.09.30~10.02)
아이들은 옆방에서 시끄럽게 떠들며 놀고 나는 이불을 펴고 누워 여행기를 쓴다. 이런 식으로 함께 여행을 하지만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도 나름 좋다. 하지만 어차피 이곳은 남학생들의 방이기에 완벽하게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도 없고 피곤하다고 편하게 잘 수도 없다. 아이들이 수시로 들락날락거리고 떠드는 소리가 밤 깊도록 들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웬 일인지, 밤새도록 놀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더라. 시간이 조금 지나니 함께 게임하는 분위기는 깨졌고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남학생 몇몇은 핸드폰을 하고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고, 몇몇은 밖으로 나갔다. 교사로서는 차라리 아이들이 한 공간에 모여 노는 것이 속편하고, 뿔뿔이 흩어져 개인행동을 하는 것은 신경 쓰인다. 아무래도 한 곳에 있을 경우 무슨 일이 있나 금방 알 수 있지만, 개인행동을 하면 일일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설혹 어떤 사고라도 날 경우, 문제가 커지게 된다.
새벽 산책 1 - 뜻밖의 제안 & 교사된 뿌듯함
여학생들은 모두 방으로 가서 잠을 자고 남학생들만이 두 부류로 나눠져 있었다. 지훈, 준영이는 한 방에 모여 음악을 들으며 담소를 나누고, 민석, 현세, 승빈이는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한다. 그 때가 새벽 1시 14분쯤이었는데 갑자기 내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한다. 비몽사몽하고 있던 때라 뭔 일인가 싶었다. 그래서 보니 민석이가 전화를 한 것이었고, 받아보니 “같이 산책하실래요?”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근질근질하던 터라 당연히 오케이를 외쳤다. 그래서 산책 준비를 하고 있는데, 민석이가 들어오더니 방에 있던 아이들에게도 산책을 가자고 권유한다. 그러자 “금방 밖에 나갔다가 왔어”라고 지훈이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로써 세 명의 아이들과만 새벽 늦은 시간에 변산반도를 산책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밖으로 나와 산책을 하는데 기분이 정말 좋았다. 수요일에 변산에 온 이후 이틀 내내 찌푸린 날씨에 비까지 내리다 보니, 비 오는 날의 운치는 좋았으나 기분은 축축 쳐졌다. 하지만 이날 새벽엔 비 갠 후의 청명한 가을의 밤하늘이 보였고 세상은 비로 맑게 씻겨져 더 깨끗하게 보였으니 말이다. 이틀 내내 ‘왜 걸어야 해?’라고 불만을 토로하던 아이들과 크고 작은 부딪힘이 있었고 여러 가지를 생각(자세한 이야기는 이전 후기 참고)하게 만들었는데 이 날은 아이들이 직접 나서자고 한 것이니, 묘한 흥분이 감돌며 마음에 평화가 내려앉았다. 아이들이 직접 가자고 한 것이기에 부딪힐 이유도, 목적지가 정해져 있지 않기에 욕심을 낼 필요도 없었다. 그저 의기투합한 그대로 걷고 싶은 대로 맘껏 걷다가 미련 없이 그냥 돌아서서 펜션으로 돌아가면 그 뿐이었다.
새벽에 어떤 부담도 없이 걷는 맛은 가히 일품이었다. 우린 편하게 이야기를 하며 모항 쪽으로 걸었고 무려 2.3km를 왕복했다. 한 시간이 넘는 거리지만, 그 때만큼은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게 그렇게 좋았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문뜩 2년 전에 망상해수욕장에 갔던 일이 생각나더라. 저녁에 부대찌개를 해서 먹고 아이들은 티비에 빠져 숙소에 그냥 있고 싶어 했지만 밤바다를 같이 보고 싶었던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억지로 산책을 나왔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산책을 해야 했던 그 때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산책을 해야 하는 지금은 확실히 달랐다. 더욱이 민석이는 신발이 젖어 어쩔 수 없이 욕실 슬리퍼를 신고 나왔다. 욕실 슬리퍼는 딱딱하고 지압을 위한 돌출물이 있어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온 신경을 곤두서게 한다. 그런데도 민석이는 뭔가 아쉬운 생각이 들었던지 더 멀리 가자고 하더라.
근데 그 변화란 갑작스럽게 찾아 왔다기보다는 어제 하루 종일 펜션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기에 좀이 쑤셔서 그런 것과 관련이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사람은 ‘편하다’고만 느끼지 않고, ‘이렇게 시간을 허투루 보내도 되나?’라는 생각, ‘아무 것도 하지 않으니 갑갑하다’는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그러니 지금처럼 산책을 가자는 제안을 한 것이며, 나온 마당에 조금이라도 더 걷자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쉬었다고 활동적인 제안을 하는 건 아니다. 이 아이들처럼 그 갑갑증을 털어내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도 있지만, 지금 방 안에서 음악을 듣는 아이들(이들도 잠시 산책을 하긴 했다)처럼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난 그걸 체질에 따른 행동이라기보다 주변 환경이 어떠냐에 따라 자신의 행동도 달라진다고 보고 싶다. 즉, 어떤 사람들과 있느냐에 따라, 어떤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새벽 산책 2 - 사람은 누구나 주변사람들의 영향을 받는다
누군가와 있느냐에 따라 나의 행동이 달라진다는 이야기는 자연히 산책길에 나누었던 우이도 여행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번 여름방학에 주원, 민석, 지훈, 현세는 우이도로 일주일간 여행을 갔었다. 그냥 편히 쉬다오자는 컨셉으로 여행을 간 것이다.
이 때 주원이와 민석이가 한 방을, 지훈이와 현세가 다른 방을 썼는데 두 방의 차이는 확연했다고 하더라. 한 방은 너무도 청결하게 치워 있었고 짐 정리도 잘 되어 있었는데, 다른 방은 쓰레기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옷가지가 널브러져있고 해변의 모레가 가득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 방에선 고린내가 진동했고 심지어 그 방 아이들은 잘 씻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방에서 생활했던 아이에게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 “저는 옆에 있는 사람의 영향을 잘 받는 타입이라 그랬어요. 그러다 보니 같이 있는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저도 그렇게 행동하게 되더라구요”라고 대답한다. 어찌 보면 이 말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심리가 담겨 있다. 주위 사람들과 동화되고 싶어 하는 심리이고, 혼자 튈까봐 전전긍긍하는 심리 말이다. 씻지 않는 분위기, 그리고 어지럽히는 분위기인데 그럼에도 자기 혼자 청결한 척, 치우는 척한들 그건 재수 없는 행동이 될 뿐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주변 환경에 동화하고자 하는 심리를 뭐라고 꾸중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아이들과 함께 할 때 자연히 주변을 정리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며, 자신을 청결히 하는 게 ‘당연한 것’이라는 인식을 만들 필요가 있다. 그리고 덧붙여 그런 인식은 어떤 강압적인 상황이나 분위기로 절대로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결벽주의자 곁엔 그에 반감을 느껴 오히려 지저분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도 나오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의 동화하고자 하는 기본 심리와 함께 같은 것을 극도로 꺼리는 이화 또한 있음을 알고 결국 어떤 부분이 그 학생에게 필요한 것인지 알려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극단적인 결벽주의자인 아이에겐 그런 긴장도를 낮출 수 있도록, 지저분하여 씻기를 싫어하는 아이에겐 어느 정도 청결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새벽 산책 3 - 시간의 더께만큼 돈독해진다
현세가 단재학교에 처음 왔을 때부터 올해 6월까진 승빈이와 여러 번 충돌했다. 난 지금껏 현세가 승빈이를 편하게 생각했기에 그런 줄만 알았는데,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전혀 뜻밖의 말을 듣게 되었다. “그 땐 다른 뜻은 없었고 건호 형과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어요”라고 말한 것이다. ‘어떤 사람과 친해지려면 그 사람의 사고방식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분명 사람 관계에 있어서 나를 남에게 맞추거나, 남을 나에게 맞추는 방법들이 있다. 아마도 그 절충점을 어떻게 만드느냐가 관계를 유지하는 핵심일 것이다. 현세는 이 때 상대방에게 100% 맞춰주는 것을 택했고 친해지고자 하는 상대방이 지닌 관점을 그대로 자신에게 주입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그대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이유도 없이 싫어했다. 현세가 여태껏 관계를 맺어온 방식이 이런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생각에서 많이 벗어났고 그 자리에서 바로 “그 땐 정말 미안해”라며 승빈이에게 사과했다.
이런 상황을 보고 있으면 역지사지易地思之란 그 상황에 닥쳐 봐야만 겨우 느끼게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흔히 하는 말로 역지사지 해보라고 말하지만, 의식적으로 하는 역지사지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억지로 그 상황에 가 닿으려 하지만 그럴수록 ‘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어’라는 착각으로 관계는 더욱 꼬여가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자기 스스로는 이해했다고 넘겨짚게 되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찌 보면 의식적인 역지사지를 통해 이해하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표현해야 맞다. 하지만 현세는 단재학교에 동생이 들어와 자신을 형 대접해주지 않는 상황이 되자 ‘형 노릇’의 힘듦을 경험해 볼 수 있었고, 그제야 겨우 승빈이의 기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사람 사이엔 시간을 함께 겪어내는 것만이 해법임을 알 수 있다. 그럴수록 이해할 수 있는 영역도 넓어지며 친근감도 짙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다양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었기에 새벽 산책은 그 어떤 시간보다도 즐거웠다. 돌아오는 길엔 어쩌다 보니 비포장길로 가게 되었는데 평소 같으면 아마도 짜증을 냈을 것이고, 더욱이 욕실 슬리퍼로 지압 효과를 느끼며 걷는 것이니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날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기에 누구도 짜증을 내지도, 험한 길로 간다고 볼멘소리를 하지도 않았다. 이번 여행 중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다. 펜션에 도착하니 시간은 새벽 3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출출했기에 저녁에 먹다 남은 통닭으로 간에 기별을 하고 누웠다.
안녕hi 변산, 안녕bye 변산
아침 8시 30분에 모두 일어났다. 9시에 식당에 예약이 되어 있어 씻을 겨를도 없이 바로 식당으로 이동했다.
부안에서 격포로 올 때 보니 여기저기 식당에 ‘백합죽’이란 메뉴가 있더라. 이곳에선 백합죽이 유명한가 보다. 그래서 이 날 아침에 ‘백합죽’을 먹었고 준영이만 ‘백합탕’을 시켜서 먹었다. 보길도에서 돌아오던 날 아침엔 전복죽을 먹었는데, 이번엔 백합죽을 먹는 것이다. 역시 씹는 재미가 없는 죽에 씹히는 맛이 일품인 탱글탱글한 백합살이 잔뜩 들어가니 식감이 일품이다. 백합탕도 양이 많았기 때문에 우린 탕과 죽을 번갈아 가면서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이젠 2박 3일 동안 머물렀던 숙소를 정리하고 떠나면 된다. 남학생 방은 온통 어질러 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여학생들과 함께 게임을 하며 놀았고 사온 과자들도 까서 먹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특히 현세가 말레이시아에 다녀오면서 사온 망고젤리 봉지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있고 아이들이 먹은 과자 봉지와 과자 부스러기들이 장판 곳곳에 널려 있다. 그걸 정리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려 10시 15분부터 콜택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도 10시 30분에야 방을 모두 정리하고 탈 수 있었다.
이제 정말 2박 3일간 지냈던 변산반도와 이별이다. 나의 현재와 과거 모두를 아는 그곳을 다시 떠나 일상으로 돌아간다. 한 때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 그리고 지금의 이 순간도 시간이 지난 후엔 한 때로 기억될 것이다. 그 때 지금을 입가의 미소를 띤 채 추억할 수 있다면, 그걸로 이번 여행은 만족이다.
목차
9월 30일(수) 나의 역사가 스민 부안을 교사로서 다시 찾다
큰 문제는 결정이 쉽지만, 작은 문제는 오히려 결정이 어렵다
나의 아픔이 산산이 부서진 변산에 교사가 되어 가다
그대에게 변산이란?
문제는 일의 발생이 아닌, 해결하려는 의지
걷는 건 고생하자는 게 아닌, 삶을 오롯이 느끼자는 것
걷는다는 게 불이익이 되는 구조
‘갤럭시 그랜드 맥스’가 그랜드(완전한)인 이유?
손수 만든 음식을 남에게 대접한다는 것
빗속 여행의 낭만 1 - 어떤 완벽한 여유로움
빗속 여행의 낭만 2 - 중 2 때의 추억
빗속 여행의 낭만 3 - 자신이 뜻이 어긋난 곳에 싹트는 여행의 묘미
빗속 여행의 낭만 4 - 우의를 통해 본 옷의 원래 의미
빗속 여행의 낭만 5 - 비바람 속에서 음식점 찾아
빗속 여행의 낭만 6 - 격포해수욕장에서 숭고의 감정을 느끼다
빗속 여행의 낭만 7 - 맑은 날이 아니었기에 누릴 수 있던 축복
빗속 여행의 낭만 8 - 걸을 땐 하나가 되고, 편함을 추구할 땐 혼자가 된다
걷는다는 것 1 - ‘걷는 것=시간낭비’가 되는 사회구조
걷는다는 것 2 - 걷는다는 건 나를 맞아들이는 시간
둘째 날 밤의 감상 1 - 나를 빗대어 너에게 말하다
둘째 날 밤의 감상 2 - 그대들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새벽 산책 1 - 뜻밖의 제안 & 교사된 뿌듯함
새벽 산책 2 - 사람은 누구나 주변사람들의 영향을 받는다
새벽 산책 3 - 시간의 더께만큼 돈독해진다
안녕hi 변산, 안녕bye 변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