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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Jun 24. 2016

짐작치 말기, 나답지 말기

검단산 트래킹 3 (16.06.17)

호국사 평상에서 점심을 먹고 모처럼 느긋하게 오후의 한가로움을 즐겼다. 아이들도 저마다 평상에 누워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시작한다. 

규빈이는 요즘 들어 ‘아인’이란 애니메이션에 꽂혀 있는지, 그걸 모두에게 추천해주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소마치상おそ松さん’이란 애니만 보며 시리즈를 모두 정복해야 한다는 목표로 열나게 보고 있었는데, 어느새 ‘아인’이란 애니까지 섭렵하여 추천해준 것이다. 이러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모두 통달할 기세다. 

아이들은 저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지민이는 웹툰을 보고 있었고, 그 옆에서 민석이는 오버워치에 관련된 자료를 찾으며 읽고 있었으며, 현세는 규빈이가 추천해준 애니메이션을 유튜브에서 찾아서 보고 있었다.                 



▲ 점심 먹은 후의 여유를 만끽하는 아이들. 휴대폰 삼매경에 빠져든다.




일상의 단조로움을 깨는 제안에 아이들의 반응은?

     

한가로움을 즐기는 것이야 나쁘다곤 할 수 없지만, 핸드폰의 작은 화면에 시각과 청각이 갇혀 자연 속에 있으면서도 자연을 보지 못하는 건 나쁘다고 할 수 있다. 그건 야외에 나왔지만, 집안에서 핸드폰만 하는 것과 하나도 차이가 없으니 말이다. 

원래대로라면 오전 중에 정상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을 텐데, 그런 계획은 한 학생의 특별한 사정으로 사정없이 깨져버렸다. 아마 이런 식으로 계속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시간을 때우다가 집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매우 컸다. 오전의 반응들만 보더라도 ‘오후엔 전혀 움직이지 않을 테니 그건 각오해 두세요’라는 뉘앙스가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별 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아이들 곁에서 시간을 보내며 있었다. 



▲  우리가 배 깔고 누워서 점심 먹고 쉬던 평상.



그런데 그때 승태쌤이 어디를 다녀오셨는지 올라오시며, “여기까지 왔는데 그렇게 가만히 있을 게 아니라, 움직여 보는 건 어때? 여기까지 올라온 만큼만 올라가면 정상이 나온대. 그러니 올라가고 싶은 사람은 올라가도록 하자”라고 말하셨다. 그 말 자체가 어디까지나 오전에 투덜대던 아이를 최대한 배려한 것이며, 나머지 아이들에겐 좀 더 자연을 만끽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거였다. 

이날은 낮 기온이 30도까지 치솟던 날이니, 아이들도 힘들게 등산을 하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택에 따라 오를 수도 있고 가만히 있을 수도 있다면, 당연히 가만히 있는 것을 선택할 거라 짐작했다. 더욱이 산을 오르는 것에 대해 극도로 싫어하고 힘들어 하기만 하니, 더욱 그런 짐작은 확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 기대감(?)으로 아이들이 승태쌤의 말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관찰하기 시작했다.                



▲ 호국사로 올라가던 길. 이 길을 따라 승태쌤이 오시며 제안을 했다. 과연 아이들의 반응은?




당연히 그럴 것이다의 함정

     

그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했다.  

     

1. 스마트폰만 응시하며 ‘무슨 X 풀 뜯어 먹는 소리야’라는 느낌으로 차갑게 무시한다. 

2. “날도 더운데 말도 안 되는 소릴 하세요. 그냥 여기서 쉬었다가 가요”라고 외친다. 

3. “여기까지 왔으면 많이 온 거니까, 이제 그만 내려갑시다”라고 하산을 제안한다.   

  

1번은 무시전략, 2번은 대들기 전략, 3번은 유리한 방안 제시하기 전략이라 할 수 있는데, 아이들은 각자의 개성에 따라 이 세 가지 전략을 탄력적으로 구사할 것이다. 그래서 누가 어떤 전략을 펴는지 재미난 영화를 구경하듯 면밀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신이 무엇을 상상했든 상상 그 이상’이란 말이 절로 생각날 정도로 아이들의 반응은 기대를 완전히 배반했다. 그렇다면 제4의 전략이란 무엇이었을까? 



▲ 오전의 연속선상으로 부정적인 반응이 나올 것 같았다.



한 학생이 “그렇다면 그냥 올라가 볼까~”라고 말한 것을 필두로, 다른 학생들도 탄력을 받았는지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에만 가만히 있는 건 좀 그러지”라고 받으며, 일어설 채비를 했으니 말이다. 그러자 몇 명의 학생들이 덩달아 일어나며 등산을 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분위기 자체는 나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르게, 등산을 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승태쌤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거드름을 피우기보다 곧바로 행동에 옮기기까지 했다. 

이런 모습은 정말 예상 밖이었고, 예전 같으면 아니 오전만 같았으면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지금껏 경험한 것을 토대로 ‘당연히 오르지 않을 것이다’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때의 반응을 보고 있으니 ‘당연’이란 말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나 자신의 감정도 들쭉날쭉하고, 행동도 왔다 갔다 하듯 아이들도 상황과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반응하기도 했던 것이다. 역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사니 변호무쌍하기만 하다.  



▲ 아이들은 승태쌤 말에 다람쥐처럼 튀어올랐다. 활발발한 생명체의 향연.



              

아이들의 반응에 나다움은 무너져 내렸다  

   

이런 황당한 상황을 경험하고 보니, 눈이 번쩍 뜨이며 나도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점심을 먹고 평상에 가만히 있으니, 피곤이 몰려와서 ‘그냥 이대로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들의 적극적이면서 산에 오르려는 마음을 옆에 보게 되니, 덩달아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역시 사람은 주위 사람들의 반응에 쉽게 휩쓸릴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때 명확하게 알게 된 건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굳어져서 결코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완벽한 생각은 아니며, 주위 사람들이 반응에 따라 수시로 바뀔 수 있는 생각이라는 점이다. 



▲  밥을 먹고 오후의 햇살을 받고 있으니, 절로 나른해진다.



지금 시대는 ‘자기自己’가 강조되는 시대다. 그러니 ‘자기 찾기 열풍’이라던지, ‘나다움’이란 말들이 당연한 듯 쓰이고 있다. 그 말엔 ‘나’라는 인식의 주체가 명확하게 서 있으며, 타인과 사회와 완벽하게 분리 가능한 무언가가 있다는 논리가 숨어 있다. 그 무언가는 어떤 것에도 휩쓸리지 않는 ‘완전한 나다움’이라는 것이고, 나다움을 발견하기 위해 여행, 명상, 힐링을 해야 한다고 부추긴다.                



▲ 자기를 사랑한 나머지, 강에 빠진 이가 있다. 그처럼 우리도 나다움을 찾다가 나란 늪에 빠져 허우적 댄다.




나다움이 아닌, ‘우리 속의 나를 찾다

     

하지만 너가 없는 나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를 제거한 나란 존재하지 않는다. 기실 ‘나’라는 인식 자체가 타자를 통해, 사회를 통해 가능한 인식이니 말이다. 그러니 나의 생각에서 너의 생각을 제거하고, 우리의 생각을 제거하고, 사회의 생각을 제거하면 ‘나’가 남을 거라는 생각이야말로 환상이고 착각일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우치다쌤은 내 안에 살고 있는 ‘제삼자’가 이야기를 할 때 이야기는 대화의 맛이 넘실대는 순간이 된다는 것을 지적해주고 있다.           



진정한 대화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제삼자인 것입니다. 대화할 때 제삼자가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이 바로 대화가 가장 뜨거울 때입니다. 말할 생각도 없던 이야기들이 끝없이 분출되는 듯한, 내 것이 아닌 것 같으면서도 처음부터 형태를 갖춘 ‘내 생각’ 같은 미묘한 맛을 풍기는 말이 그 순간에는 넘쳐 나옵니다. 그런 말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 우리는 ‘자신이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우치다 타츠루 저, 박동섭 역, 민들레 출판사, 『스승은 있다』, pp59


          

나라는 고정된 틀이 아닌, 자아라는 한정된 담론 체계가 아닌 상대방과 이야기를 하며 전혀 생각도 해본 적이 없는 것을 말하고, 예전 같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던 것을 자연스럽게 말하게 될 때, 대화는 뜨거워진다. 그것이야말로 현장에서 상대방의 의견에 귀 기울이며 나의 생각을 덧붙이고 덧붙이는 활발발한 대화를 하게 된다. 

그처럼 나도 오후엔 그냥 편안하게 있고 싶다고만 생각했는데, 아이들이 일어서는 모습을 보면서 등산할 마음이 생겼다. 이때야말로 주위 상황에 맞춰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그로 인해 나도 등산을 할 준비를 하게 되었다. 



▲ 짐작하지 말고, 나답지 말고, 철들지 말고.



모든 일은 짐작하거나 예측하여 미리 제단하기보다, 이처럼 맞닥뜨려보고 그 상황에 맞춰 내 생각도 어떻게 변해 가는지 지켜볼 일이다. 이래서 삶은 살아볼 만하다고 하는 것이고, 사람은 오랜 시간동안 겪어봐야만 안다고 하는 건가 보다. 

하지만 이런 장밋빛 전망(?)은 곧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삶이 얼마나 변화무쌍한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겠는데, 이 얘기도 긴 얘기임으로 다음 후기에 자세히 써보도록 하겠다.



 ▲ 뜻하지 않게 오후의 검단산 정상을 향한 등산이 시작되었다.





목차 

    

1. 건빵산에 살어리랏다

살아지는 시간 & 살아가는 시간에 대해

검단산이 트래킹 코스로 정해지기까지

하라니까 산에 오르다

재밌기에 산에 오르다

살기 위해 산에 오르다

아이들과 오르는 기쁨을 느끼러, 검단산에 가다    

 

2. 학생들과 등산하기 위해선 교사의 인내심이 필요하다

회장 지민이가 검단산 트래킹 계획을 짜다

제 시간에 모이는 학생들 & 그러지 못하는 학생들

산을 오르기 전부터 삐걱대다

한 아이의 불퉁거림이 전체 분위기를 망치다

에너지를 한 곳으로 모으면 무엇이든 뚫지 못하랴

  

3. 짐작치 말기나답지 말기

일상의 단조로움을 깨는 제안에 아이들의 반응은?

‘당연히 그럴 것이다’의 함정

아이들의 반응에 나다움은 무너져 내렸다

나다움이 아닌, ‘우리 속의 나’를 찾다

  

4. 검단산이 준 선물

내가 안 하는 건, 모두 해선 안 돼

하류가 되길 지향하다

2013년 지리산 종주 이후 최초의 등산다운 등산을 하다

등산을 하며 ‘한 걸음의 중요함’을 배우다

강철체력 성민이의 등산법

모처럼만에 체력의 한계치를 느껴보다

아쉬움이 많지만, 그래도 뿌듯했던 검단산 트래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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