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건빵 Nov 01. 2016

조삼모사식 커뮤니케이션

박동섭의 ‘아마추어 사회학’ 7 - 알기 어려운 서설 ⑥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 할 책은 『장자』다. 장자라는 철학자에 대해 우리는 흔히 ‘자연주의 철학자’, ‘무정부주의 철학자’ 정도로 알고 있지만, 실상 그는 인간 사회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그려낸,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에 대해 깊이 고민한 철학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엔 모든 사람들이 내용은 알지만 제대로 뜻은 알지 못하는 ‘조삼모사朝三暮四’란 이야기가 실려 있다.                



▲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의미로 끊임없이 패러디 되고 있다.




실패할 가능성이 있기에 커뮤니케이션은 재밌어 

    

일반적으로 ‘조삼모사’의 뜻은 ‘얄팍한 꾀로 상대방을 속이는 것’이라고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진짜 뜻은 ‘속임’이나 ‘농락’이 아닌, ‘소통’에 대한 것이다.           



옛날에 원숭이를 기르던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려고 “아침에는 세 개 저녁에는 네 개를 주겠다.”라고 말하니 원숭이들이 모두 화를 내었다. “그러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라고 말하자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

狙公賦芧曰“朝三而暮四.” 衆狙皆怒. 曰“然則朝四而暮三.” 衆狙皆悅. 『莊子』 「齊物論」4  


        

원문만 살펴보면 우리가 아는 내용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저 원숭이의 짧은 생각을 비웃듯 같은 양의 도토리를 주면서 호응을 얻어낸 사육사의 약삭빠른 모습만이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  조삼모사는 소통에 관한 이야기다. 그걸 알려면 소통이 실패했을 때 사육사가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하지만 이 글을 단순히 그렇게 보아선 안 된다. 사육사는 원숭이에게 첫 번째 의견을 제시한 후에 원숭이들의 반응을 살폈고, 원숭이들이 다들 싫어하자 다른 제안을 해야만 했다. 원문엔 나오지 않지만 사육사는 현실적으로 식량을 줄여야만 했기에 ‘이제부턴 하루에 7개의 도토리만을 줘야한다. 그렇다면 원숭이들에게 어떻게 나누어주는 게 좋을까?’를 고민하며, 무수히 많은 제안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러 제안을 했지만, 그 제안들은 거부되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사육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제안을 하다가, 결국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라고 외치는 순간 여태까지와는 달리 원숭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받아들인 것이다. 이때 기뻐한 원숭이들은 결코 어리석어서도, 농락에 놀아나서도 아니다. 여러 제안 중에 가장 맘에 드는 제안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니 말이다. 

이처럼 커뮤니케이션은 사육사가 했던 것처럼 실패할 위험을 감내하며, 진심에서 미끄러질 위기를 감안하며 해나가야만 한다. 그럴 때 원숭이들이 화를 냈던 것처럼, 사람들도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원래 커뮤니케이션이란 그런 것이기에, 그런 상황에 주눅 들지 말고 계속 전달하려 노력할 뿐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엔 미끄러질 위기 속에서도 우연처럼 마주치며, 실패할 위험 속에서도 운 좋게도 공명하여 조금이나마 전달되는 기쁨의 순간에 이른다. 원숭이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미소를 지은 사육사처럼, 우리도 그 순간 어떤 것에도 비길 수 없는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동섭쌤은 “커뮤니케이션이 적절히 성립하는 것이 곤란하기 때문이야말로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의 성립을 갈망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 커뮤니케이션은 미끄러질 수 있고 실패할 수 있기에, 커뮤니케이션이 성립되기를 갈망한다.




돼지의 꿀꿀소리가 되느냐말이 되느냐   

  

그래서 동섭쌤은 ‘발신자’, ‘말’, ‘수신자’란 것이 원래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어떤 말을 의미 있는 말로 받아들인 ‘수신자’가 있을 때 비로소 ‘발신자’와 ‘말’이 동시에 생성된다고 보았다. 이건 ‘말을 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소통이 시작된다’는 일반적인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의미 있는 말로 받아들인 사람이 있기 때문에 소통이 시작된다’는 생각으로 바꾸어 버린다. 

사육사가 “도토리를 이제부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 주면 어떨까?”라고 말을 했지만 원숭이들이 듣지 못했거나, 화를 낸 경우엔 ‘발신자’도 ‘말’도 생성되지 않은 것이다. 그저 주위의 소음처럼 들렸다 사라지고 만다. 



▲  '소귀에 경 읽기'라는 속담은 소통이 되지 않을 때, 말은 한낱 수많은 소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듯 커뮤니케이션은 늘 실패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할 수밖에 없고, 이때 가장 중심이 되는 존재는 ‘수신자’라 할 수 있다. 수신자가 ‘의미 있는 말’로 받아들일 때, 공허한 울림은 말이 되고, 수많은 사람 중 하나에 불과하던 사람은 ‘발신자’가 된다. 

그래서 라캉Jacques Lacan(1901~1981)은 “돼지의 ‘꿀꿀’이라는 울음소리가 파롤이 되는 것은 그 울음소리가 무엇을 믿게 하려는 것일까라는 물음을 누군가 세울 때뿐입니다. 파롤은 누군가 그것을 파롤이라고 믿을 때야 비로소 파롤입니다. (중략) 동물의 랑가쥬langage(소쉬르의 용어로 ‘언어활동’으로 번역함-다음 사전)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은 그것을 알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 때야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 [김씨표류기]라는 영화를 보면 '수신자가 있을 때 말이 성립된다'는 의미를 알 수 있다. 두 김씨는 어떻게든 소통을 하기 때문이다.




진리를 말하는 사람과 무리를 말하는 사람의 특징

     

커뮤니케이션의 이런 속성을 안다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란 말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성경은 ‘진리의 말이다’라는 생각으로 전개되는 책이다. 그러니 사람이 생기기 이전에,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기 이전에 진리의 말이 있고, 그게 세상을 창조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다시피 ‘발신자’와 ‘말’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수신자’와 ‘의미심장하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예수는 여러 설교에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 4:9, 눅 8:8 등등)”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진리의 말은 ‘발신자’와 ‘말’ 자체를 중시한다. 

이와 반대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커뮤니케이션은 아예 ‘소통이 제대로 될 수 없다’고 낙담한 나머지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정답이 없다’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의심하며 심지어 자신의 생각도 믿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전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니 소통을 위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                



▲ 진리의 말은 '발신자'와 '말'이 수신자와 상관없이 이미 존재한다고 믿는다.




일리의 커뮤니케이션은

     

진리眞理의 커뮤니케이션이든, 무리無理의 커뮤니케이션이든 제대로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않는다. 너무도 확고하게 자신의 생각을 믿은 나머지 나의 생각만을 몰아붙여 강제하려 하기도, 모든 것을 의심한 나머지 소통의 가능성을 차단해 버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 진리의 말이든, 무리의 말이든 소통을 단절한다는 부분에선 크게 차이가 없다.



바로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조삼모사식의 커뮤니케이션’이라 할 수 있고, 그걸 김영민 선생은 ‘일리一理의 해석학(커뮤니케이션)’이라 표현했다.           



시간도 공간도 비껴 앉은 이름 없는 진리는 바람 맞고 땅을 걸어가면서 살고 있는 우리 인간에게는 소용없는 장식일 뿐이다. 진리, 특히 인문학에 있어서의 진리란 인간됨의 조건이나 한계와 상관없이 어느 보석 상자 속에 깨끗하게 보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식의 객관적이며 순전무잡한 진리 개념은 대개의 경우 사태의 진상이라기보다는 규제 이념이라는 명분의 심리적 이상理想에 불과했다. 이 이상의 빛 아래에서 내려다보이는 잡된 삶의 현실은 대체로 애매하거나 피상적이거나 사소하거나 불온하거나 자의적이거나 비학문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삶의 실제와 상관없는 진리 개념은 지식인들의 강박으로 군림하게 되고, 이 강박은 지적 허위의식으로까지 부풀었다. 그러니 하나의 참된 이치眞理가 아니면 그것은 당연히 아예 이치에 닿지 않는 것이며필연이 아니면 우연일 뿐이고변치 않는 본질이 아니면 봄눈같이 사그라질 현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일리의 해석학은 이 이분二分을 가로질러가는 제3의 길을 택한다그것은 누구나 우러러보아야 할 참은 아니지만 동시에 거짓으로 전락하지 않는 성실을 말하려고 하고진리가 아니되 무리로 흩어지지 않는 일리를 말하려 하며필연이 아니되 우연으로 흩어져버리지 않는 패턴을 말하려 하는 것이다.

일리의 해석학은 이성을 인식의 토대나 특권적 입지로 삼지 않는다. 앎의 과정 속에 조건, 혹은 한계로서 참여하는 ‘인간 됨(being-human)’ 중에서 이성이란 단지 한 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됨이란 인간의 조건과 한계가 주변의 다양한 컨텍스트와 만나면서 자신을 보존하고 개발하며 진화시켜나가는 과정이다. 달리 말하자면 다종다양한 텍스트와 만나는 과정에서 인간이라는 현상이 자기 스스로를 적응시켜나가는 모습을 가리킨다. 이 모습과 과정은 당연히 패턴화된다. 삶의 전 영역에서 나름의 길(패턴)을 확보하지 못하는 유기체는 도태되기 때문이다

『진리, 일리, 무리』, 김영민 저, 철학과 현실사, 1998년, 182~183쪽   


        

일리의 커뮤니케이션은 애매모호한 단어를 쓰며, 알 듯 모를 듯한 표현을 쓰는 사람들의 대화를 그려내며 패턴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학문이 규정짓기 전부터, 제도가 옥죄기 전부터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아무런 불편함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진리는 아니되 무리로 흩어지지 않는’ 일상의 모습을 담아내려 하는 것이다. 

이번 후기에선 커뮤니케이션이란 무엇인지 살펴봤다. 다음 후기에선 우린 왜 애매모호한 단어를 쓰고, 알 듯 모를 듯한 표현을 쓰며 커뮤니케이션을 하는지, 지금까지 흔히 알고 있던 ‘나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소통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편협한 생각인지 살펴보며 ‘아마추어 사회학’ 1강 후기를 마무리 짓도록 하겠다.



▲ 커뮤니케이션으로 시작된 강의는, 지금까지 알고 있던 내용을 와르르 무너뜨리며 새로운 앎의 지경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언어는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