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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Jan 26. 2017

나누는 기쁨을 누리다

2009년 국토종단 22 -  4월 29일(수)

아침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있으니 사모님이 밥을 챙겨주시더라. 꼭 집에서 아침을 먹고 떠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사모님께선 한갓진 길이 있다며 친히 메모지에 적어줬고, 가면서 밥값을 하라며 돈까지 챙겨 주셨다. 그뿐인가 갈증 날 때 마시라며 배즙까지 주셨으니, 집에서 줄 수 있는 것을 모두 줬다고 할만하다. 이렇게까지 나눠줄 수 있는 그 마음은 과연 어떤 마음일까?               



▲ 잘 자고 아침까지 잘 먹고 기분 좋게 여행을 떠난다. 싱그러운 날이다.




많아야만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행을 떠난 이후로 아는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고, 전혀 모르던 사람을 만나며 평소엔 미처 알지 못했던 행복을 느끼고 있다. 그건 무언가를 받았고 어떤 환대를 받았기 때문에 드는 고마움이라기보다, 아직 세상은 살아볼만하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엔 인생의 아이러니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권력과 지위, 그리고 돈을 가진 사람들은 인색한 경우가 많지만, 그 반대의 경우엔 없는 살림에도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 애쓰기 때문이다. 지금까진 많이 가져야만 베풀 수 있고, 넉넉해야지만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전에 교회에 열심히 다닐 땐 ‘함께 나누며 살기 위해 많은 돈을 벌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곤 했었다. 분명히 그 땐 ‘함께 나누며’에 방점을 찍고 이런 기도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곰곰이 따져보면 그 속엔 어처구니없는 자기합리화가 숨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도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물질의 풍요=신의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기복신앙이 자리하고 있으며, 황금만능주의가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그러한 기도를 하며 많이 가지게 된 사람들은 나누려 하기보다 더 분주하게 채우려고만 한다. 2007년에 있었던 홈에버 파업사태는 종교인의 기도가 얼마나 위선이며 신의 뜻과 위배되는지 여실히 보여줬다. 이랜드 회장은 근무를 하려 할 때 직원들이 모여 큐티를 해야 한다고 강조할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인임에도, 돈 앞에선 여느 기업가보다도 더욱 악랄한 장사치였던 것이다. 



▲ 치열했던 싸움은 [송곳]이란 웹툰으로, [카트]란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런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돈이 많냐 적냐 하는 것이 나눔의 전제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눌 수 있는 마음은 돈의 양과 상관없이 그 사람의 됨됨이와 상관있을 뿐이다. 지금도 많은 교회에선 예전의 나처럼 성공하기 위해, 부유해지기 위해 열심히 기도드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때 허울 좋은 합리화(남과 나누겠다, 교회를 더욱 열심히 다니겠다, 하나님을 위해 쓰겠다)를 할 테지만, 그건 결코 순수하지도 그렇다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사모님의 마음씀씀이가 정말로 고마웠기에, 나 또한 그처럼 베풀고 함께 나누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집을 나섰다. 어제 저녁의 불안과 긴장은 눈 녹듯 사라졌고, 새 아침의 싱그러움만이 가득했다. 왠지 발걸음이 여행을 처음 시작하던 그 날처럼 가볍고 절로 신이 난다. 한참 걷다가 뒤를 바라보니 사모님이 손녀를 엎고 나오셔서 마중 인사를 해주시더라. 반가운 마음에 두 팔을 다 저으며 인사를 건넸다. 가슴 뭉클한 순간이다.                



▲ [송곳]에 대해 하종강 교수는 "살아있는 노동법"이라 했다.




어우러짐을 맛보며 걷다

     

사모님이 알려준 길은 정말로 한가로운 길이었다. 차도 거의 다니지 않고 주위에 볼거리들도 많아서 산책을 하기에도 적당한 코스였으니 말이다. 오른쪽으론 계룡산을 끼고 왼쪽으론 양화저수지를 거쳐 계룡저수지를 지나서 간다. 계룡산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기가 센 산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래서 무속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며, 인생이 답답하다고 느껴지는 뭇 청춘 남녀들이 자신의 미래를 찾기 위해 찾는 곳이라고 한다. 이 산을 오르는 건 아니지만 옆에서 보면서 걷는 것만으로도 그 기운이 전해져 왔다.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렸고 산들바람은 시원하게 불어와 내 뺨을 스쳤다. 더욱이 날씨까지 좋아서 덥지도 춥지도 않았다. 기분도 한껏 업 되어 있고, 주위의 환경까지도 완벽하니 이런 날 맘껏 걸어서 여행할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축복이다. 

계룡산자락 밑에 난 굽이길을 걷고 있으니, 꼭 원시림을 거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좋은 날씨와 한적한 코스가 한껏 어우러져 ‘최고의 순간’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사모님이 알려준 길, 그건 도보여행의 참맛을 알게 해주는 길이었고 ‘목적지에 빨리 이르기 위한 여행’에서 ‘어우러짐의 맛을 느끼는 여행’으로 성격을 확 바꾸는 길이었다.                



▲ 한적한 길을 따라 걸어간다. 걸어가는 맛이 새록새록하다.




거리의 인연 – 한국교육의 문제점헛지식 양산소 

    

그 길을 따라 가다가 중장초등학교를 지날 때였다. ‘안내’라고 적힌 띠를 두른 아이들이 교문 앞에서 봉지라면을 먹고 있더라. 쉴 시간도 되었고 그 아이들이 신기(?)하기도 해서 아이들 옆에 앉았다. 낯선 사람이 바로 옆에 떡하니 앉았는데도, 아이들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라면을 허겁지겁 먹기만 한다. 

그래서 “점심시간이 바로 코앞인데 설마 그걸로 점심을 때우려는 건 아니지?”라고 말을 붙였다. 한 아이가 “1시까지 이렇게 서있어야 해서요. 간식으로 먹는 거예요.”라고 말한다. 그 이야기를 계기로 서로 궁금한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단다. 오늘은 충남교육감 선거일이라 공주지역 학교는 모두 쉬는데 자신들은 이렇게 ‘일’을 하고 있는 거란다. 



▲ 초등학교를 지나는데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보인다. 호기심에 옆에 가봤다.



그 녀석들은 내가 국토종단을 한다는 소릴 듣고 잔뜩 신기해한다. 그래서 지도를 펴놓고 걸어온 길을 표시해가며 알려줬다. 그랬더니 일제히 “에이~ 지도를 보면서 어떻게 길을 찾아가요. 그건 말도 안 되요”라며 믿으려 하지 않더라. 하긴 나도 목포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지도를 보며 길을 간다는 게 어떤 것인지 몰랐었다. 그래서 실컷 걸었음에도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실수도 해보고, 다른 곳을 향해 가면서 제대로 가고 있다고 착각도 해보았으니, 아이들의 그런 반응이 이해가 됐다. 

그러고 보면 이게 우리 교육의 한계가 아닐까. 지도를 보며 등고선이 어떤 의미인지, 척도가 어떤 의미인지 배우고 각종 표시들이 무얼 의미하는지 배운다. 하지만 개념적인 이해에 그치고 실제로는 사용하지 않으니, 그건 ‘헛 지식’에 불과하다. 이건 단순히 지도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학교에서 배우는 대부분의 지식들이 그렇다. 배운 것도 많고, 알게 된 것도 많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남에게 으스대기 위해서,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만 필요할 뿐, 그 외엔 크게 의미가 없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한 지식, 삶을 풍요롭게 다듬는 지식은 더욱 더 요원해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늘 실제로 쓸 수 있는 실용적인 지식만 익히자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단지 어떤 것을 배웠다면 그걸 활용할 수 있어야 하며, 그걸 통해 다양한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럴 때에야 배우는 즐거움이 뭔지 제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 사회과 수업에서 척도를 배우고 지도 보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현실에서 어떻게 쓰는지 배운 나도 모르고, 가르친 사람도 모른다.




거리의 인연 – 나누는 기쁨을 아는 아이들 

    

아이들은 나의 이야기를 한참 듣더니, 자신들이 먹으려고 산 쵸코파이를 하나씩 주더라. 처음에 한 녀석이 주니깐, 그걸 보고서 몇 명이서 덩달아 줬다. 그러니 어느새 내 몫이 다섯 개나 되었다. 한참 단 게 먹고 싶을 때고 늘 양이 부족할 때인데도, 그렇게 챙겨주는 마음씨가 고마웠다. 

거기에 한술 더 떠 한 명은 아예 나에게 봉사하기로 맘먹었나 보다. 배낭에 있던 물병을 보고서 자신이 직접 물을 떠다주겠다며 가져갔으니 말이다. 나는 인심 쓴 김에 제대로 인심 쓰라며(?) 커피 심부름까지 시키는 ‘악랄함’을 발휘했다. 저번 일요일엔 교회에서 처음 보는 학생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키더니,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어찌 보면 그런 정도는 애교로 해줄 수 있는 거라 생각했기에 말한 것이다. 

물병에 물을 꽉 채워왔고 커피까지 타왔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사탕까지 한 움큼 챙겨왔다. 아주 센스가 장난이 아니다. 그래서 고맙다고 말을 하고 “너희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뭔 줄 알아? 지금부턴 너희들이 그걸 먹을 수 있게 해줄게”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무래도 쵸코파이도 받고 이런저런 환대까지 받으니, 나도 무언가 줄 수 있는 것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배낭에서 육포를 빼서 아이들에게 줬다. ‘설마 어른들이 술안주로나 먹는 것인데, 먹어 봤겠어?’라는 생각으로 그런 식으로 너스레를 떤 것인데, 아이들은 다들 먹어봤다고 하더라. 

아이들과 그렇게 몇 분 동안 이야기를 하며 한참을 놀다가 다시 출발했다. 이 녀석들에게 말을 걸지 않고 지나쳤다면 매우 아쉬울 뻔했다. 길 위에서 만나는 인연들, 어쩌면 다신 볼 수 없는 인연들이지만, 그래도 그 순간을 행복하게 만들어준 귀한 인연들이다. 



▲  길거리에서 만난 인연들. 반갑고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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