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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Nov 29. 2017

주거난민으로 서울에서 살아가기

2017년 건빵의 이사기 1

2011년 10월 3일에 “조금이라도 일찍 올라왔으면 좋겠다”는 준규쌤의 말에 따라 서울에 무작정 상경했고 이미 고시원에 자리를 잡아 살고 있던 욱쌤의 조언으로 ‘단재학교를 집 삼아 지내겠다’던 생각은 급하게 변경되어 나 또한 고시원에 둥지를 틀게 됐다. 이로써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 서울에서 처음으로 갖게 된 방. 이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




메마른 서울 땅에 내 터전을 마련하다 

    

그 후 한 달 반 정도가 지난 11월 22일에 단재학교에 교사로 정식 채용이 되면서 고시원이 아닌 나만의 집을 갖게 될 찬스가 생겼다. 그 해 여름 수유+너머에서 수업을 받으며 집을 떠난 사람의 ‘집 없는 설움’을 만끽했던 터라, 고작 3개월 만에 일어난 변화가 낯설면서도 축복으로 여겨지더라. 집이 없어 찜질방을 전전하던 나에서 이제 당당히 서울에 거처를 마련할 수 있는 나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그 후 12월 10일 토요일에 한 번 집을 알아봐야겠다며 부동산을 찾아가보게 됐다. 처음으로 내가 살 집을 내가 알아보는 상황도 낯설고 신기하기만 했다. 그건 그만큼 첫 경험이 주는 설렘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막 일을 시작한 나에겐 수중에 전혀 돈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고시원이 아닌 이상 단 돈 500만원이라도 보증금이 필요한데 그 당시엔 ‘어떻게든 되리라’란 생각으로 했던 것 같다. 막상 처음 들어간 ‘NEW YORK 공인중개사’ 사무실에서 500만원에 갈 수 있는 곳을 확인해보니 물품이 없어 난색을 표하더라. 그러다 잠시 물건을 찾다가 마침내 500/40인 곳을 찾아냈고, 마침 사무실 근처인지라 편안하게 가볼 수 있었다. 이곳은 원래 있던 건물을 리모델링한 곳으로 막상 들어갔을 때의 느낌은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럽다’였다. 더욱이 3층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형에게 500만원을 빌리며 계약을 완료할 수 있었고, 12월 16일에 이사를 하며 당당히 서울에 내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 지금은 없어졌지만, 이곳에서 첫 집을 얻을 수 있었다.



모든 게 우연이었고 모든 게 행운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생각을 해보자면, 애초에 풍납동 고시원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 하나의 기반이 되어 그곳 주변으로 나의 거처가 마련된 상황이었다. ‘첫 단추가 중요하다’란 말은 처음 시작할 때 신중히 선택하고 신중히 행동하란 뜻이지만, 나의 경우엔 처음 발돋움하기 시작한 바로 그곳 근처에서 생활 터전이 만들어지는 상황에 대한 말이기도 하다. 처음으로 갖게 된 집, 그것도 타지에 마련한 집은 행복 그 자체였다.                



▲ 15년 4월 4일에 찍은 사진. 처음으로 얻은 방이기에 기분이 남다르다.




운 좋게 싼 가격에 전셋집을 구하다

     

그 곳에서 무려 4년을 살았다. 처음 집을 얻을 때만해도 이렇게 오랜 시간 살 수 있을 거라고는, 그리고 단재학교에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타지 생활이 처음이기도 했고, 단재학교에의 적응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쨌든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하니 생활도 어느 정도 안정이 잡혀갔고, 학교생활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갔다. 역시나 막상 시작해보면 나름의 흐름에 따라 정착되게 마련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돈도 어느 정도 모아져 처음에 한 푼도 없이 시작할 때에 비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많은 돈이 모아졌다. 이렇게 자산 규모가 커지니 당연히 ‘이젠 월세보단 전세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어찌 보면 당연한 의식의 흐름인데, 그만큼 자신이 생겼다는 말이기도 할 터이다. 

그래서 전셋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는데, 생각만큼 쉽지는 않더라. 3500만원 정도로는 전셋집을 얻는다는 게 말도 안 될뿐더러, 그보다 7000만원 대에도 거의 찾기 힘들었으니 말이다. 어찌 되었든 전세자금대출을 받는 건 기정사실이었고 그렇다 해도 전셋집을 얻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런 상황이 되고 보니, ‘전셋집에 못 가면 월세 낮은 곳이라도 가야지’라는 절충을 하게 되더라. 

그런데 그때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내가 나가기로 하면서 새로운 세입자를 찾아야했던 집주인이 강남공인중개사에 집을 내놨는데, 바로 그곳에서 나에게 전화가 온 것이다. 요지는 ‘언제든 집을 보기 위해 찾아갈 수 있으니 양해해 달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에 덧붙여 “집은 알아보셨어요?”라고 묻더라. 그래서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전세 구하고 있고요. 대출이 된다면 6000만원에서 6500만원까지는 괜찮아요”라고 말을 했다. 이런 경우 ‘물량이 없습니다’란 반응이 나올 줄 알고 얘기한 건데, 아주 의외로 “물건이 있는데 보러 오세요”라고 하더라. 



▲ 4년 동안 살았던 집이 텅 비었다. 이 때의 느낌은 만감이 교차한다. 보금자리였던 게 이젠 남의 공간이 되었으니.



그래서 그날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을 찾아가봤다. 저번엔 원룸 형식의 집이었던데 반해 이번엔 단독주택이고 지은 지 한참 되다 보니 여러 곳이 낡았다. 그러니 막상 기회가 생겼음에도 배가 불렀는지 ‘별로다’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잠시 고민이 되긴 했지만, 곧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6500에 전세는 흔치 않고 지금은 이렇게 떡하니 물건이 나왔으니 말이다. 그날 바로 계약금을 걸 고 계약함으로 전셋집 마련도 순식간에 끝이 났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문제가 있었다.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전세자금대출’ 건이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그에 대한 기록은 이미 남겼으니 여기선 상술하지 않겠다. 하여튼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전세자금대출도 받을 수 있었고 단재학교 아이들과 함께 짐까지 미리 옮겨 놓아 이사가 훨씬 편해졌다. 

두 번째 이사는 전셋집으로 간다는 사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짐을 옮겼다는 사실로 뿌듯한 이사였다. 전셋집으로 옮겼다는 건 4년 동안 돈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는 걸 의미하고, 아이들과 짐을 옮겼다는 건 단재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며 나름 괜찮게 교사생활을 했다는 걸 의미하니 말이다.                



▲ 함께 짐을 날라주는 아이들. 그 마음이 정말 고맙고 아름답다. 그리고 표정도 어찌나 맑은지.




2년을 더 살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다

     

그렇게 2년을 살았다. 벌써 2년이 지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지만, 시간은 그토록 맹렬하게 흘러갔다. 어느덧 별로라고 생각했던 집이 늘 살던 집처럼 편해졌고 예전 원룸보다 공간도 넓어지며 여러 가재도구들도 늘어났다. 전셋집이기에 크게 전세 가격을 올리지 않는 이상 2년을 더 살고 싶었다. 



▲ 모니터도 사고, 자이글도 사고. 아무래도 공간이 넓어지니 도구들도 늘어만 간다.



때마침 이사까지 한 달 정도만을 남겨둔 11월 12일에 주인 아주머니에게 연락이 오더라. 보통 이런 경우 먼저 조건을 제시하거나 하게 마련이지만, 이번에는 특이하게 나의 의사부터 물었다. 그래서 “전세 가격을 올리지 않으면 2년 더 살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나 또한 그 다음에 주인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제스처를 취할지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올린다고 하면 고민할 여지가 생기는 거고, 그대로 간다고 하면 순조롭게 일이 해결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 두 반응이 아닌 전혀 다른 반응을 보여주더라. “일주일 정도 생각해보고 다시 연락 줄게요”라고 말이다. 참으로 그랬던 것이다. 뭔가 승낙된 듯하면서도 찝찝한 그 느낌말이다. 

일주일을 기다렸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2년이 되기까진 이제 3주 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이쯤 되니 ‘뭐 재계약하려 하니 이렇게 시간이 촉박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연락도 없는 거겠지’라는 생각이 들더라. 한 번 정도 연락해서 구체적인 상황을 묻고도 싶었지만, ‘뭐 별일 있겠냐’하는 마음으로 무작정 기다렸다. 

그러다 겨우 2주 정도를 남겨둔 11월 25일 토요일에 마침내 연락이 오고야 말았다. 예상했던 ‘재계약하자’는 반응과는 달리 집을 나가줘야겠다는 반응으로. 아예 생각해보지 않은 시나리오는 아니지만, 막상 겨우 2주 만을 남겨두고 그런 대답을 들으니 황당했고, 어안이 벙벙하더라. 그나마 희망이라고 한다면 처음에 집을 얻을 때만해도 한 푼도 없었던 것에 비해 지금은 나름의 목돈이 생겼다는 점이다. 그러니 그때에 비하면 좀 더 수월하게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막상 집을 옮겨야 된다고 생각하니, 편안하게 내려앉았던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과연 나는 이번엔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 16년 7월 12일 영화 촬영을 위해 집에 모인 아이들. 이 집과도 2년 만에 작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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