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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Dec 06. 2017

큰 문제에 닥쳐봐야 그 사람이 보인다

2017년 건빵의 이사기 2

평소에는 모르지만, 막상 어떤 일에 닥쳐보면 그 사람이 보이곤 한다. 평소엔 사려 깊고 침착하다 해도 막상 큰일을 당해보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좋을 때 좋은 사람보단, 안 좋을 때 좋은 사람이 진정 좋은 사람이라 했던 것이고, 우치다 타츠루는 『곤란한 결혼』이란 책에서 해외여행을 떠나 난처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아야 그 사람이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고 했던 것이다.  



              

▲ 올 여름에 [곤란한 결혼]을 함께 읽으며 이야기를 나눴었다. 책은 역시 읽는 맛도 있지만, 함께 이야기하는 맛도 있다.




문제에 봉착하면 그 사람이 보인다

     

주인아주머니의 “방을 빼주셔야 할 것 같아요”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어떠한 마음의 동요 없이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2년 계약의 만료일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당연히 ‘재계약하자’는 말이 나올 줄 알았고, 설혹 이사를 한다 할지라도 6년 전에 비하면 돈이 꽤 있기에 긴장되거나 걱정되진 않을 거라 여긴 것이다. 그래서 “만약 재계약이 안 된다고 해도 괜찮을 거야. 오히려 새로운 공간으로 갈 수 있고, 그 덕에 짐 정리도 새로 하고 새로운 기분으로 시작하면 되잖아.”라고 태연하게 생각했다. 누가 보면 무척 긍정적이고, 매우 통 큰 사람인 줄 알겠다. 

그런데 그런 통 큰 반응은 딱 거기까지였다. 토요일 4시 30분쯤에 울린 집 주인의 전화를 받고 언제 그렇게 침착했냐는 듯, 언제 그렇게 통이 컸냐는 듯 가슴이 뛰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집이야 어떻게든 구해질 테지만, 계약 만료까지 2주라는 시간만이 남았기에 매우 짧게 느껴졌다. 역시 상황에 닥쳐보니 나의 진가(?)가 여지없이 드러난다. 얼마나 쫄보인지, 그리고 얼마나 늘 걱정이 많았는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드러나며 조급증에 몸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 2년 간 살면서 몇 년간 더 살 수 있겠지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이곳과도 서서히 정리를 해야 한다고 하니 아쉽다.




새로 구할 집에 대한 두 가지 조건

     

월요일부터 본격적으로 집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이날은 오후에 서울시학교밖지원센터에서 진행하는 성교육을 아이들이 받으러 가는 날이다. 승태쌤이 인솔하기에 오후부턴 시간이 남는다. 그래서 1시가 약간 넘어 학교에서 나올 수 있었다. 

2년 전에 이사할 때 전셋집을 소개해준 사무실에 찾아가 “이번에 집을 이사하게 되어 알아보러 왔어요”라고 말했다. 이사를 가기까지 시간이 2주밖에 남지 않았다는 상황에 대한 설명과 함께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 번째 조건은 지금 사는 전셋집에서 이사 갈 집이 가까워야 한다는 거다. 이 조건을 제시한 이유는 이번에도 아이들과 함께 이삿짐을 나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2년 전에 이사할 땐 돈도 별로 없어 집을 고를 만한 처지는 아니었다. 5000~6000 정도이면서 지하만 아니면 어디든 괜찮다고 생각했다. 근데 무척 운이 좋게도 살던 곳에서 7분 정도 떨어진 곳에 전셋집이 나와서 일사천리로 계약을 할 수 있었다. 4년 동안 살았던 집엔 알게 모르게 짐들이 쌓였고 혼자서 나르기엔 역부족인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겨우 7분 거리 때문에 이삿짐 차를 부르는 것도 이상했다. 그래서 고민 고민하다가 아이들에게 장난스럽게 “선생님 이사하는데 짐 좀 날라줄래”라고 말했더니, 볼멘소리는커녕 흔쾌히 “좋아요”라고 대답해주더라. 그 덕에 마치 재밌는 놀이를 하듯 서로 웃고 떠들며 한 바탕 짐을 나를 수 있었다. 그때의 추억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기에 이번에도 그러고 싶어서 첫 번째 조건으로 달은 것이다. 



▲ 함께 짐을 날라주는 든든한 녀석들 덕에 15년도 이사는 즐거운 놀이 같았다.



두 번째 조건은 풀옵션이어야 한다는 거다. 아직 세탁기나 에어컨, 버너를 모두 구비하여 다니기엔 배보다 배꼽이란 크다란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문제는 월세엔 풀옵션인 경우가 많지만, 전세엔 풀옵션을 찾기가 힘들다는 거다. 그러니 이 조건만으로도 선택의 폭은 극도로 제한된다. 그러고 보면 지금 살고 있는 전셋집은 고를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음에도 풀옵션이었기에 천운 중 천운이라 할 만하다. 

이미 이 두 가지 조건만으로도 적당한 물품은 매우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데, 시간까지 촉박하니 상황은 전혀 쉽지 않았다. 이 때문인지 사장님도 난색을 표하며 “조금 더 찾아보고 연락드릴 테니 지금은 집에 가서 쉬고 계세요”라고 말하더라. 그래도 알고 있다. 어찌 되었든 2011년에 한 푼도 없이 집을 알아보러 다닐 때와 2년 전 터무니없는 돈으로 전셋집을 알아보러 다닐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걸 말이다.                



▲ 고를 수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때 나온 전셋집이 풀옵션이었던 건 정말 행운이다.




최초로 가계약이 좌초되다

     

집에 와서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바로 “괜찮은 물건이 나왔는데 한번 같이 가보죠”라고 연락이 오더라. 지금까진 두 번 이사하는 동안 바로 본 집으로 이사를 했었다. 그저 내 몸 누일 방 한 칸 있다는 것만으로 좋다고 생각했기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조금 달랐다. 처음으로 들어간 집은 무엇보다도 햇빛이 잘 들어온다는 점이 맘에 들었다. 가격은 꽤 높은 편이어서 대출을 받아야 하지만, 그래도 4층에다가 볕까지 좋으니 꽤 살만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엔 조금 저렴한(그래봐야 어차피 대출은 받아야 한다) 곳에 가봤는데 그곳은 고시원이 생각날 정도로 방도 작았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4층에 있는지라 맘에 들지 않았다. 그 다음에 가본 곳은 지금 사는 곳과 같은 주택이었는데 건물 뼈대만 놔두고 리모델링 중인지라 다 헤집어져 있었고, 내가 이사할 때엔 다 완성될 거라고 했다. 아마 수리가 완료된다면 마치 새집에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거다. 그런데 이미 두 집이나 보고 오며 눈이 높아졌던지라 한참 공사 중인 그 집을 보면서 성에 차질 않았다. 세 곳의 집을 보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더니 벌써부터 힘이 빠진다. 뭔가 선택지가 많다는 게 꼭 좋기만 한 것도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시간은 어느새 4시 3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세 곳의 집 중에서 첫 번째 집은 분명히 맘에 들었지만 그 근처가 이미 여러 건물을 짓기 위해 공사를 하고 있던 터라 시끄럽지나 않을까 하는 부분이 걸렸고, 세 번째 집은 막상 다 고쳐진 후엔 어떨지 몰라도 지금 당장은 공사 중이었기에 끌리지는 않았다. 그래도 계속 고민해봤자 머리만 아프기에 처음에 가본 집으로 계약하기로 맘먹었다. ‘이번에도 이렇게 순조롭게 풀리려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계약을 진행하려 하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일이 발생했다. 주택자금대출을 받으려면 건물이 상가가 아닌 주택으로 등록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 건물은 상가로 등록되어 있어 대출을 받을 수 없다는 거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대출 받는 거 당연히 가능해요”라고 호언장담했던 터라 그렇게 믿었는데, 이렇게 한 순간에 좌초되니 기운이 빠질 대로 빠지더라.                



▲ 처음 들어갔던 이 집은 원룸형이지만 그래도 방도 꽤 크고, 짐을 놓을 창고도 있고 채광도 좋아 맘에 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4번째 옮길 집이 결정되다

     

그쯤 되니 ‘오늘은 이 정도 한 것만으로 애썼다’는 생각이 들고 그냥 쉬고만 싶더라.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서 다른 중개소 사무실 한 곳을 더 들어가 봤다. 그래도 아직 시간은 꽤 남았으니 말이다. 

조건들을 얘기하니 아주 적극적으로 찾아주신다. 소장님의 차를 타고 3군데의 집을 보러 다녔다. 생각만큼 거리도 꽤 떨어져 있고, 방도 그다지 맘에 들지 않더라. 두 번째 들어갔던 집이 그래도 꽤 괜찮았는데, 그 분이 방을 비우는 때가 12월 말이라 이삿날이 맞지 않아 포기해야 했다. 이렇게 하루 종일 찾아다녔지만 허탕 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니 진이 다 빠지더라. 



▲ 집은 신축이라 깨끗하고 풀옵션이라 좋지만, 고시원이 생각날 정도로 방이 작다.



그런데 바로 그때 소장님이 “꽤 괜찮은 곳 내놓은 곳이 있는데, 거긴 월세거든요. 그런데 말을 잘해보면 보증금을 올리고 월세는 20까지도 낮출 수 있을 거예요. 거기 한 번 보실래요”라고 하신다. 이런 상황에선 어차피 가나 안 가나 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기에, 보러 가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본 집은 여러모로 맘에 들었다. 강동구청 바로 뒤편에 자리하고 있기에 전셋집에서 5분 거리 밖에 되지 않으며 건물도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깨끗했다는 점이 그렇다. 근데 1층이고 주방과 방이 분리형이 아닌 점과 전세가 아닌 점이 걸렸다. 그래도 이 정도면 꽤 괜찮았기에 “보증금은 최대한으로 높이더라도, 월세가 10 정도면 좋을 거 같아요”라고 마지막 조건을 제시했다. 만약 이 조건이 받아들여진다면 바로 계약을 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내일 다시 집을 알아보러 다니겠다고 맘먹었다. 그랬더니 결국 보증금 6500만원에 월세 15만원으로 정해져서 가계약을 진행할 수 있었다. 

확실히 돈이 없을 땐 그저 조건에 맞는 방이 있기만 해도 감사하단 마음으로 OK를 외치게 되지만, 돈이 조금이라도 생겨 고려할 만한 여지가 생기니 ‘이런 게 맘에 안 든다. 저런 게 맘에 안 든다’고 따지게 된다. 분명 삶은 나아지고 있는데, 삶이 윤택해지기보다 고민과 걱정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그래서 ‘형제 금덩어리를 버리다(兄弟投金)’라는 고사를 통해 돈이 어떤 해악을 낳는지, 그리고 그 돈을 감당하려면 얼마나 존재가 커야하는지 알려주고 있다. 이사를 하기 때문에 참으로 여러 감상이 생긴다. 



▲ 1층인 것만 빼면 모든 게 맘에 든다. 이렇게 깨끗한 곳에 사는 곳도 처음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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