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건빵의 이사기 3
계약 만료를 겨우 2주 남겨놓은 시점에서 걸려온 주인의 “방을 빼주셔야겠어요”라는 전화가 시발점이 되었다. 짧은 시간만이 남았음에도 운 좋게도 바로 방을 구할 수 있었고, 가계약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3번 이사를 하는 동안 이사 때문에 크게 속을 썩은 적은 없었다. 그만큼 이사 운이 좋았다는 뜻이다.
올 여름에 어화둥님 댁에서 민들레 1박 2일 모임이 있었다(실제 단일치기였지만). 우치다쌤이 쓴 『곤란한 결혼』을 읽은 소감을 나눴는데, 이번 책의 경우엔 아무래도 현실적인 결혼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른이면 흔히 할 법한 조언’이 들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조언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나는 어떤 도움도 없이 열심히 살아왔다. 그러니 너희들도 나처럼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식의 말일 것이다. 이런 말은 “나도 그 나이 때는 고생해봤어. 요즘 젊은 것들은 고생도 모르고 열정도 없다니까”라는 말과 같다. 자신의 노력 여하를 치하하려다 보니 오히려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이들을 까는 방식을 취한다. 그러니 그런 얘기를 듣고 있으면 심히 불쾌하고 짜증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 대해 요즘엔 ‘꼰대질’이라 표현하며 마마나 호환만큼이나 치를 떨어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책에도 어느 정도는 그런 ‘꼰대스러움’이 들어 있지만, 그래도 레비나스를 전공한 학자답게 ‘타자성’에 중점을 두고 결혼 이야기를 풀어가기에 충분히 읽어볼 만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특성 때문에 모임에 참여한 누군가는 “우치다 타츠루는 많은 걸 가진 사람이예요. 즉 운 좋게 태어난 거죠. 그러니 ‘ 그 운은 내 것이 아니다’, ‘내 노력과 상관없이 어쩌다 보니 획득하게 된 거다’라는 생각으로 얘기를 해줄 수 있어야 하죠. 그런데도 이 책에선 그 운이 자기 것인 양 여기고 있는 게 느껴져 그 부분이 걸렸어요”라고 말을 했던 것이다. 꼰대스러움은 살아온 인생의 과정 과정을 오로지 자신의 성취라 여길 때, 그리고 그걸 남에게 강조하며 추켜세우려 할 때 드러난다. 그럴 땐 모든 걸 자신의 입장에서만 말하게 되고, 자신의 입장과 같지 않으면 폄하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도 넘게 간섭하고 싶을 때마다, 자신만이 옳다는 생각에 갇힐 때마다 ‘여태껏 살아올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아서야’라고 되뇔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이번에 이사할 때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이사하기까지 좋은 중개소 사장님을 만났고, 좋은 집 주인을 만났으니 말이다. 그래서 실타래가 술술 풀리듯 막힘없이 일이 진행되었고,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이쯤에서 생각해보면 임용고시를 그만 두고 허허벌판에 나앉게 된 이후 단재학교에 들어오고 서울에 정착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운이 좋아서 이만큼 올 수 있었다고 회고할 수밖에 없다. 이만큼 올 때까지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우호적인 상황들을 만났으며, 중간 중간 좌충우돌하고 난관에 부딪혀 헤맬 때에도 여러 도움의 손길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게 이번 이사에서도 똑같이 드러났으니, 이쯤 되면 ‘건빵, 운 허벌나게 좋네’라고 해야 맞다.
내 삶의 팔 할은 주위 사람들의 무수한 도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렇기에 오히려 ‘나의 삶’이라 표현하기보다 ‘우리의 삶’ 내지는 ‘다함께 삶’이라 표현해야 맞다. 나의 삶이 오로지 나의 노력만으로 고생만으로 온 게 아닌, 무수한 이들이 함께 빚어내어 온 것이니 말이다. 실제로 이사할 집이 정해지는 과정 자체가 그랬고, 이삿짐을 나르는 순간도 그랬다.
2년 전에 이사할 때 처음엔 혼자 짐을 날라볼까도 생각했는데, 어느새 4년을 살며 서서히 늘어난 짐이 부담스럽긴 했다. 그렇다고 겨우 1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가면서 용달차를 부르기도 그랬다. 물론 냉장고나 세탁기와 같은 무거운 짐이 있다면야 선택의 여지가 없겠지만, 무거운 짐이 없으니 여러 생각을 해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농을 치듯 “이삿짐 한 번 날라줄래?”라고 물었다. 그건 아이들의 반응을 떠보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랬더니 아이들은 ‘그 정도쯤이야 할 수 있죠’라는 반응을 보이며 바로 승낙하더라. 그래서 그땐 아이들과 장난치듯, 서로 재밌는 게임을 하듯 4명의 학생들과 2시간에 걸쳐 짐을 날랐다. 그때의 기억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때처럼 하고 싶어, 집이 결정되기 전부터 살짝 “이번에도 쌤이 이사 가면 도와주는 거지?”라고 운을 떼어놓았다. 아이들도 벌써 2년이 지났다는 사실에 놀라며 “벌써 이사 가실 때가 된 거예요?”라고 말하며 “쌤이 이사를 간다는데 여부가 있겠습니까”라고 너스레를 떤다. 하지만 그건 집이 결정되기 전에 그냥 해본 말이기에 12월 6일에 짐을 날라놓기로 결정된 시점에선 다시 확인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아이들이 보일 때마다 “다음 주 수요일에 짐 한 바탕 옮길 건데, 그때 시간 빼둬”라고 이미 정해져있던 일정인 양 말을 건네니, 저번에 함께 날랐던 민석이나 현세뿐만 아니라 지민이와 태기, 성민이도 그러겠노라고 하더라. 이럴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일과 놀이의 구분은 한끝 차이일 뿐이다. 일도 신나게만 할 수 있다면 놀이가 되며, 놀이도 중압감이나 성과주의에 함몰되면 일이 된다. 아이들의 반응은 어디까지나 이삿짐을 나르는 일을 놀이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들의 이런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로서의 모습을 사랑한다.
막상 짐을 나르기로 한 날이 되었고 함께 한 인원은 민석, 준영, 현세, 지민, 성민 이렇게 5명이었다. 2년 전에 4명이 했던 것에 비하면 1명이 더 늘었고, 민석이와 현세를 뺀 3명이 이번에 새롭게 참여했다. 이날은 저녁에 눈이 온다는 예보가 되어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비가 오는 것보단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가 4시 30분에 끝나자마자 아이들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출입구 쪽에 쌓인 박스를 보고서 누가 먼저랄 새도 없이 하나씩 들고서 나르기 시작했다. 마치 이 일을 오래 해왔던 사람처럼 말이다. 2년 전에 비하면 겨우 한 명이 늘어났고 거리도 2분 정도만 가까워진 거리일 뿐인데도 1시간 만에 모든 짐을 나를 수 있었다. 짐을 나르는 도중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으며 곧 비로 바뀌어 살짝 긴장이 되긴 했지만, 아이들은 그런 것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잠바의 모자를 눌러쓰고 나르더라. 아무래도 짐이 무한정 있는 게 아니라,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는 게 확인되니 묘한 성취감도 느껴졌을 것이고, 머지않아 끝날 거란 느낌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짐을 모두 나르고 나니 그제야 본격적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라. 조금 옷이 젖긴 했지만, 시종 화기애애하게 웃고 장난을 치며 마칠 수 있었다. 여러모로 꿈만 같던 순간이다.
2년 전엔 통닭집에 가서 회포를 풀었지만, 이번엔 전셋집에서 둘러앉아 회포를 풀기로 했다. 이것 또한 하나의 좋은 추억이니 말이다. 특별 게스트로 이미 이번에 수능을 보느라 수고한 승빈이와 일본여행을 다녀온 건호를 초대했지만, 승빈인 아직 면접이 남아 있어 참여할 수 없다고 하더라. 그래서 함께 짐을 날랐던 6명의 인원에 건호까지 더해져 7명이 저녁을 함께 먹게 되었다. 지금껏 나의 공간에 이렇게 많은 인원이 모인 적은 처음이다. 예전 월셋집이면 방이 작아 이 정도 인원이 모이는 건 어려웠지만, 지금은 방이 꽤 크기에 단란하게 모여 앉아 이렇게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장면이야말로 늘 꿈꿔왔던 장면인데, 이렇게 현실화되었으니 행복하다.
음식은 중화요리와 치킨, 족발을 모두 시킬 생각이었는데 아이들은 족발은 빼고 중화요리와 치킨이면 충분하다고 하더라. 그래서 일차론 중화요리를 먹고 이차로 통닭을 세 마리 시켜서 먹었다. 이런 자리의 묘미는 뭐니 뭐니 해도 맛있는 음식과 함께 그간 소식만 듣고 살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 한마당을 펼친다는 데에 있다. 예전에 학교 선배가 운영하는 학원에서 강사를 할 때 그 선배와 간혹 만날 때면 그 선배는 “맛있는 걸 함께 먹는 것도 좋지만, 이런 시간에 누군가와 함께 얘기할 수 있는 게 더 좋더라구”라는 말을 했었는데, 그 말이야말로 지금 상황에 대한 정확한 말이라 할 수 있다. 단재학교라는 이름으로 모인 아이들, 함께 공부하며 시간을 공유했던 사이도 있고, 이번에 처음 만나 어색한 사이도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건 ‘단재학교’라는 공통점과 함께 이번에 이삿짐을 함께 옮기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는 공통점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우린 동떨어진 개체임에도, 어느 부분에선 공유된 것들을 함께 나누는 동체임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역시나 난 허벌나게 운 좋은 사람이다.
그럼에도 대화는 자꾸 엇나가고 서로의 감정을 긁어 평온했던 마음을 요동치게 했다. 그 중심엔 건호가 있었다. 건호는 대학에 가는 보통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뮤지션이란 외로운 길을 선택하여 연습에 매진하고 있다. 아무리 맘을 굳게 먹었다 해도 여러 감정이 수시로 일어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예전엔 꽤 시건방졌고, 꽤 자신만만했지만 최근엔 남의 눈을 피해 다닐 정도로 위축되었던 거다.
그런 건호를 보며 지금 이순간이 비루해보일 수 있지만, 잘 받아들이며 온 몸으로 감당하며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으면 했다. 와신상담과 같은 복수를 위해 인내하는 시간이 아닌, 자신의 수많은 감정 중 늘 억누르려했던 그 감정을 받아들이는 시간으로 말이다. 그래야 좀 더 품이 넓은 사람이 될 수 있고, 깊이 있는 뮤지션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홀로 여행을 떠나길 추천했던 것이다.
오늘 이 자리는 짐을 나른 것에 대한 회포를 푸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일본여행을 잘 마치고 돌아온 건호를 환영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한 달 넘게 일본을 방황하며 여러 사람을 만나고 돌아왔으니, 후배들을 만나선 선배다운(?) 모습을 보일 거라 생각했다. 패키지 여행이 아니고서야 부딪히며 하는 여행은 사람을 성장시킨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현실은 그러지 못했다. 건호는 오랜만에 보는 후배들에게 뿐만 아니라 처음 보는 후배들에게도 예전에 단재학교에 다닐 때처럼 마구잡이로 대하고, 장난스런 태도로 대하여 감정을 상하게 했으니 말이다. 특히 현세는 2012년 지리산 여행을 하며 건호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터라 건호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3년 만에 건호를 봄에도 반가워하며 “형, 내 옆 자리에 앉아”라거나, “형, 롤 언제 돌려? 같이 하자”라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건호는 장난치듯, 무시하듯, 비꼬듯 현세에게 “난 민석이 옆자리가 좋은데”. “나는 찐따라, 남과 같이 게임하는 것보다 집구석에 처 박혀 혼자 게임하는 게 더 좋아”라고 맞받아쳐 버린다. 이런 상황이 여러 번 계속 되니 당연히 아이들은 건호의 말에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런 만큼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어갔다.
물론 건호의 마음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나 또한 건호와 마찬가지로 좌충우돌하며 여러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이 정체되어 있다고 느껴질 때, 뭔가 암담하다고 느껴질 때 그 불안은 자신을 잠식하여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상처를 준다. 감정은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오히려 가장 편안한 사람,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안긴다. 독일 철학자 쇼펜 하우어는 이를 ‘고슴도치의 딜레마’라고 표현했고,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에선 이걸 극중 대사로 풀어내고 있다.
고슴도치는 상대에게 자신의 따스함을 전달하려 해도 가까이 할수록 자신의 가시로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고 말지. 사람도 마찬가지인 경우가 있어. 지금의 신지(주인공)는 남에게 미움 받을 아픔을 두려워한 나머지 겁쟁이가 되어버린 구석이 있으니까 말야. 뭐 머지않아 알게 되겠지. 어른이 된다는 건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면서 서로 상처받지 않는 거리를 찾아내는 거라는 것을... (3화)
건호도 아직은 그렇게 가시가 돋아 있는 것일 터고 상처받지 않는 거리를 찾아내는 과정일 터다. 그건 시간을 보내며, 자신을 돌아보며 서서히 찾아갈 거라 믿는다. 그때까지 아무쪼록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덜 입히길 바랄 뿐이다.
이 날 회식은 하남팀이 8시 15분에 먼저 나가며 일차가 끝났고, 건호와 민석이 지민이가 남아 1시간 15분 더 이야기를 하다가 9시 30분에 나가며 모든 일정이 끝났다. 최선을 다해서 짐을 날라주고 늦은 시간까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함께 나누다 간 녀석들이 있어, 비 내리던 12월 6일의 밤은 무척이나 따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