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빵의 임용고사 낙방기 8
임용시험을 처음으로 봤던 게 2006년이고 마지막으로 봤던 게 2010년이다. 한문교육과에서 들어오면서부터 모든 임고생들의 목표가 그러하듯 나의 목표도 ‘졸업과 동시에 합격’이었다. 그건 ‘그랬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이기도 했지만, ‘꼭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이기도 했다. 집에 별로 돈이 없어서 사립대학교에 다니는 것도 부담이 컸기에, 대학교를 다니는 내내 열심히 공부하여 장학금을 받고, 졸업함과 동시에 취업을 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맘과 같지 않아 연거푸 떨어졌고, 그렇게 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2010년에 마지막 임용시험을 봤으니, 그 후로 어느새 7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시험을 관둔지 일이 년의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고 7년이나 지난 이 시점에 갑자기 임용시험 때의 느낌들을 정리하고 있으니, 이 글을 보는 사람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그건 ‘때 지난 이야기를 마치 현재의 이야기’인 양 하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아, 오래 되어 물이 빠지고 해어져 너덜너덜한 옷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다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임용시험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 일까?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박하사탕’이란 영화의 명대사처럼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마음이 들어서 일까? 그 또한 아니다. 제도권 학교 교사는 되지 못했지만, 대안학교 교사로 아이들과 만나 그간 꿈 꿔왔던 교육관을 맘껏 펼칠 수 있기에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만족해하고 있으며, 앞으로 살아갈 날도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에 와서 과거의 임용 낙방기를 쓰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그 이유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돌아보고 싶어서이다. 예전에 교육학 강의를 들을 때면 전태련쌤은 매번 “삶은 꽤 정확합니다”라는 말을 하곤 했었다. 그 말은 사람을 우주적 관점에서 볼 때 이해가 되는 말이다.
우주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함께 공존한다. 지금 내 눈엔 버젓이 보이는 별이 이미 예전에 사라진 별일 수도 있다. 조선시대 때 사라진 별이 500광년 떨어져 있으면 내 눈엔 현재 실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보인다고 실존하는 것도, 안 보인다고 사라진 것도 아니며,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무수한 밤하늘의 별바다엔 모든 시간들이 뒤섞여 보일 뿐이다.
이처럼 나라는 개체 안에도 과거와 현재, 미래가 모두 들어있다. 과거에 했던 행동들이 지금의 나의 모습으로 현현되었으며, 지금 당장 하는 행동들이 미래의 나로 드러나게 된다. 그러니 현재의 내 모습 속엔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내가 함께 뒤섞여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대로 과거를 얘기하는 것은 단순한 ‘때 지난 이야기’가 아닌 현재의 나를 돌아볼 수 있게 하며, 미래의 나를 그릴 수 있게 한다. ‘오래된 미래’처럼 과거 속엔 현재의 나를 알 수 있는 단서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이번에 임용 시험 낙방기를 시간의 흐름 순으로 기술해 나가다 보니, 그 당시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도 많이 볼 수 있었고, 그게 지금의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나름 유쾌한 과거로의 여행이었던 셈이다.
또 다른 이유는 실패에 대한 이야기일지라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이렇게 생각이 바뀐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의 이야기를 글로 적을 땐 성공한 이야기, 뭔가 그럴 듯한 이야기, 남이 봤을 때 ‘잘 살고 있구나’라는 이야기만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삶이 보잘 것 없이 일상적이거나, 때론 비루하기도 하니, 굳이 실패한 이야기, 특별할 것 없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건 마치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나 정말 아무 것도 없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처럼 남루하게 보일 거라 지레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재학교에서 활동했던 이야기를 쓸 때에도 최대한 뭔가 있어 보이게 쓰려 애썼던 것이고, 학교의 여러 일과 중에 특별한 활동만을 찾아 의미를 부여하려 노력했던 것이다. 아마도 ‘지리산 종주기’나 ‘자전거 여행기’는 그런 생각 속에 탄생한 글이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생각 자체가 ‘실패를 해도 괜찮아’라고 평소의 지론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임을 최근에야 깨닫게 되었다. 나의 실패를 부끄러운 것으로만 생각하여 더 이상 고찰하려 하지도, 남에게 말하려 하지도 않으면서, 아이들에겐 “실패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었다. 아이들 나이 때(청소년기)는 수많은 도전과 실패를 하며 조금씩 배워가고 조금씩 성장해가는 거라 생각했기 때문인데, 실제로 나는 그 나이 때에 그렇게 살아보지도 못했다. 나는 늘 어긋나지나 않을까, 완전히 주저앉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어떻게든 성공하는 삶을 위해, 남들처럼 살아가는 삶을 위해 앞을 향해서만 나아가기 바빴다. 나 자신은 실패할 정도의 도전도, 또는 실패를 받아들일 배짱도 없었으면서 아이들에겐 ‘실패하라’, ‘그리고 그걸 받아들이면 큰 인물이 될 수 있다’고 외치고 있었으니, 말만 번드르르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최근에야 아이들에게 하는 말과 나의 행동 사이에 괴리가 있음을 알게 됐고, 더 이상 그렇게 말 따로, 몸 따로인 채로 살아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과거에 실패했던 경험이지만, 나에겐 너무도 소중한 경험인 ‘임용고사 낙방기’를 쓰게 된 것이다.
8월 17일부터 쓰기 시작한 ‘임용고사 낙방기’가 드디어 이 글로 마무리 지어졌다. 10일간 과거로 떠나는 여행은 때론 그 당시의 씁쓸한 기분에 외로워지기도, 때론 무언가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에 가슴 벅차지기도 하는 여행이었다.
의식적으로든, 몸으로든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새로운 환경이 주는 설렘을 느끼기 위해서도 있겠지만, 내가 지금껏 살아온 이 자리를 낯설게 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건 현실에서 더 충실히 잘 살아가기 위해 잠시 삶의 빈틈을 만드는 행위였던 것이다. 그럴 때에야 너무도 일상적이어서 어떤 감정도,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않던 것들이 전혀 다른 의미로 느껴져서 감정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니 여행은 떠난 곳에서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돌아갈 곳에서 행복하기 위해 떠나는 거라 할 수 있다.
이렇게까지 정리를 하고 보니, 이제 더 이상 임용고사에 낙방했던 일들이 아픈 과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당당하고 열심히 살았던 나의 과거였고,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는 기반이니 말이다. 그래서 나에게 임용고사에 낙방했던 매 순간들은 ‘찬란한 과거’라 할 수 있다. 그 찬란한 과거를 자양분 삼아 오늘의 현실을 재미지게, 신나게 살아보련다.
목차
어느덧 오수생이 되다
첫 시험에 스민 자신감, 언뜻 보이는 불안감
초심자의 행운이 따르다
첫 시험이라 떨렸을까, 너무 큰 기대가 있던 시험이라 떨렸을까
초심자의 행운, 그렇게 떠나다
2. 07년도 임용, 한바탕 노닐 듯 시험 볼 수 있을까?
2007년은 변화의 때
시험으로 한바탕 노닐어 보자
광주에서의 인연, 그리고 악연
축제가 한 순간에 저주로
암울하게 시작된 2008년
어둠은 사라지고 찬란한 빛이 찾아오다
2008년에 바뀐 임용제도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흔들리는 마음을 멈추어 세울 수 있는 힘
과정에 만족할 수 있던 08년 임용
한 해 동안 잘남과 못남을 동시에 느끼다
전북에서 시험을 보게 된 이유
시험의 위력에 휘둘려 꼬꾸라지다
임용시험 3일 전, 마지막 시험을 코앞에 둔 심정
임용시험 2일 전 아침, 사는 게 무섭지 않냐고 물어봤었지
임용시험 2일 전, ‘盡人事待天命’의 자세
마지막 시험이라 외치다
파도와 같던 나의 마음을 붙잡다
온고을 중학교와의 인연
마지막 임용시험의 풍경
시험 끝나자 활기가 찾아오다
함께 모여 밥 먹을 사람이 있다는 것
10년 지기 친구와 맛난 점심을
고통인 삶, 그걸 맛들일 수 있을까?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순 없다
사람은 밤하늘과 같다
실패했을지라도 그것만으로 좋은 경험이다
찬란한 과거를 현재의 자양분으로 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