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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Aug 17. 2017

08년도 임용, 기분 좋은 떨어짐

건빵의 임용고사 낙방기 3

2008년도는 파란만장한 해였다. 거시적으론 한국이란 나라도 혼란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갔고, 미시적으론 한 개체에 불과한 나도 어둠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 2008년에도 경기도에서 한문교사를 선발하니 다행이다.




암울하게 시작된 2008

     

대통령이 바뀌며 보란 듯이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대통령 부시를 위해 카트를 손수 운전해주며 굴욕적인 쇠고기 졸속 협상으로 30개월 이상 소의 뇌나 부산물까지 수입할 수 있도록 했다. 이건 미국에서 잘 먹지 않기에 미국은 한국에게 덤터기를 씌운 것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이니 굳이 ‘광우병’ 운운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우리 세대 먹을거리의 안전망이 무너졌다고 생각했고 광장으로 몰려나와 재협상을 외치며 촛불집회를 하게 된 것이다. 



▲ 굴욕 외교란 이런 것이다. 이걸 실리외교라 치장한다면, 이 세상의 가치는 남아나는 게 없을 것이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세상의 뒤숭숭함과 더불어 내 상황도 뒤숭숭하긴 매한가지였다. 호기롭게 시작한 한문학원 강사 생활이 2개월 정도 만에 끝났기 때문이다. 이 학원은 특이하게 한자 급수를 딸 수 있도록 가르치지 않았고, 사자소학 같은 전통적인 서당식 교육을 하는 곳이어서 그 부분이 무척 맘에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원장님은 갑자기 ‘학원을 인수할 생각이 있냐?’고 묻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경우엔 인수금액, 조건 등의 후속적인 말이 나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매우 특이하게도 원장님은 ‘그런 것 없이 그냥 맡아서 해볼 생각이 없냐?’라고 넌지시 묻기에, 때 아닌 갈등을 해야만 했다. 임용을 준비하여 교사가 되는 것과 학원을 맡아서 하는 것 사이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맘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몇 날 며칠을 보내고 있을 때, 원장님은 말길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반응을 보이며 잘라 버렸다. 도무지 자초지종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황당했고, 첫 강사생활이 그렇게 마무리 됐다는 사실에 기분이 나빴다.                



▲ 학원에서 만난 귀염둥이들.




어둠은 사라지고 찬란한 빛이 찾아오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임용고시반에 들어온 건 행운이었다. 보통 임용고시반은 2월에 멤버를 모집하고 8월 정도에 결원이 있을 때에만 추가 모집을 한다. 나처럼 어중간하게 들어오는 경우는 없는데, 난 무작정 교수님을 찾아가 내 의사를 표시했고 그게 잘 받아들여져 들어올 수 있었던 거다. 

거기에 덧붙여 도종환 시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시의 제목을 그대로 따와서 ‘흔들리며 피는 꽃 스터디팀’을 꾸리게 된 것도 행운이었다. 이번 경우처럼 중간에 갑자기 만들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2008년도는 암울하게 시작했지만, 그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고 말할 수 있겠다. 

어쨌든 그런 우여곡절을 경험하며 공부할 장소도 마련됐고, 스터디까지 순식간에 꾸려졌으니 내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해졌다. 그래서 상반기는 여러 일을 겪으며 느리게 지나가는 느낌이었는데 하반기는 모든 게 갖춰져 평이하게 훌쩍 지나버린 것 같이 느껴지는 것도 다 이런 상황 때문이리라. 마음이 안정이 되니 좀 더 느긋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 스터디 팀이 꾸려졌다. '흔들리며 피는 꽃'이란 이름을 가진 스터디팀. 맘을 잡게 해준 버팀목 같은 존재들이다.




2008년에 바뀐 임용제도

     

2008년부터 임용 제도는 크게 바뀌었다. 원랜 2차 시험으로 1차에선 전공과 교육학을 시험 보고, 2차에선 수업 실연과 면접, 그리고 논술을 보면 됐지만, 이 해부턴 3차로 변경되었다. 그래서 1차엔 객관식으로 출제된 전공과 교육학을 풀어 합격자의 2배수를 뽑아내고, 2차에선 단답형과 논술형으로 출제된 전공을 풀어 1.5배수로 압축한 뒤, 3차에 수업실연과 면접을 봐서 합격자를 걸러내는 것이다. 

시험 기간이 늘어나다 보니 당연히 시험을 보는 날짜도 앞당겨졌다. 원랜 12월 첫째 주 일요일에 시험을 보던 것이, 11월 첫째 주 일요일로 바뀌었다. 무려 한 달이나 시험 시간이 당겨지다 보니 수험생들은 더욱 더 긴장할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조급해지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에 반해 나는 모든 상황이 잘 정비되면서 오히려 느긋하게 행동했다. 어차피 한 달이 당겨지나 미루어지나 모두에게 시간은 동등하게 주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이든 내가 되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맘을 급하게 먹을 필요도, 무언가 부산을 떨 필요도 없다고 느껴졌다. 

2008년 임용도 경기도에서 보기로 했다. 작년에 과락이란 엄청난 충격을 받긴 했지만 심기일전 했기에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 임용제도가 바뀐다는 건, 장수생에겐 리스크가 큰 일이긴 하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기회이기도 하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더욱이 예년 임용과는 달리 경기도에서 충원이가 함께 시험을 보기에 잘 곳을 따로 구하지 않아도 됐다. 충원이가 서울에서 집을 구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함께 잠을 자고 다음 날 수원으로 함께 출발하면 됐으니 말이다. 

토요일엔 맹렬히 공부를 했고 서울로 출발했다. 내가 올라온다는 사실을 알고 세훈이도 나와 맞이해줬다. 내 생각 같아선 좀 쉬고 싶었는데, 친구들이 있기 때문에 친구들을 따라 쉬지도 못하고 돌아다녀야 했다. 첫 임용 때에 비하면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니 마음은 편하고 어색함도 덜했지만, 또한 그게 안 좋기도 했다. 저녁으로 고기까지 구워 먹고 세훈이가 가는 것을 보고 들어와 조금이라도 책을 보겠다고 펼친 시간이 거의 11시가 되었을 때였으니 말이다. 마음은 불안하지 그렇다고 몸은 내 맘처럼 안 되지 이래저래 조급증이 밀려올 것만 같았다. 그나마 며칠 전에 유정 선배를 만나 삶에 치이지 않는 방법이나 조급증이 밀려올 때 태연해지는 방법에 대해 들었던 터라, 그 말을 곱씹으며 조금이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한 시간 밖에 잠을 못 자서 컨디션이 최악이었음에도 이를 악물고 달렸더니 목적지에 도착했다던 말씀, 결국 컨디션 운운하며 시험을 잘못 봤다고 하는 것도 합리화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정 선배는 이때 한창 마라톤을 시작하여 열심히 달리던 때였다. 그래서 나를 보자마자 자신이 마라톤을 하며 경험했던 것을 썰로 풀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마도 저 일기를 쓰면서 ‘합리화하지 말자, 핑계 그만 대자’라고 속으로 외쳤던 것이고 그걸 다시 곱씹는 이 순간에도 그 말은 나에게 힘이 됐던 것이다. 그래 합리화는 이제 그만~ 정정당당하게 내 실력으로 후회없는 평가를 받아보는 거다.                



▲ 저녁까지 잘 먹고 충원이 집에 들어와 책을 펴들었다. 불안한 마음 때문에 이러고 있는 것이다.




흔들리는 마음을 멈추어 세울 수 있는 힘

     

수원으로 향하던 버스에서 본 단풍은 내 마음을 위로해주는 자연의 메시지처럼 보였다. 그래서 일기엔 다음과 같이 썼다.           



단풍도 예쁘게 물들었고, 그 고즈넉한 도외지의 풍경은 눈요기를 하기에 충분했다. 그것이야말로 말로 전해주진 않으나 가슴을 울려주는 암묵적인 위로였던 셈이다. 불끈 희망이 솟고 기분이 가벼워질 수 있었던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2008.11.09)    


      

위 일기를 읽어보면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에 안테나를 바짝 세우고 어떤 메시지라도 들으려는 마음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만큼 예민해졌다는 얘기이니 말이다. 자연과의 교감은 수능을 보러 갈 때나 첫 임용을 보러 갈 때처럼 마음이 심란하고 무언가 복잡할 때 주로 이루어진다. 

시험장에 도착해서는 한층 가열 차게 나를 비우고 오로지 후회 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나를 채근했다. 자꾸 맘은 긴장하려 하고 두려움에 떨리려 하니, 어떻게든 나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남들과의 경쟁이다. 남들보다 높은 점수를 맞아야만 내가 합격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그 결과를 이루어내기까지는 나와의 경쟁이니 말이다. 스스로 금을 긋고자하는 한계를 뛰어넘어 지금껏 내가 아는 모든 것들을 후회 없이 쏟아내고자 하는 노력, 그것이 바로 과정이라 해야 맞다. 

(중략)

지금은 그저 나도 잊고 너도 잊고 긴장을 덜고 그 빈자리에 시험지와 맘껏 소통한 흔적만을 채우면 된다. 


          

위와 같이 맘먹은 순간 적어도 난 시험을 보러 온 뭇 사람 중 한 명에 불과하지만, 그렇다고 시험을 보러온 다른 사람과는 달랐을 거라 믿고 싶다. 그건 힘이고 저력이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 힘으로 객관식으로 바뀐 첫 시험지를 열심히 풀었다.                



▲ 경기도에 첫 시험 이후로 2년 만에 다시 왔다.




과정에 만족할 수 있던 08년 임용

     

시험이 끝나고 나니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밀려왔다. 그건 재작년에 느꼈던 뿌듯함과도 같았다.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자평할 수 있을 정도로 만족스러웠으니 말이다.           



난 신중히 최선을 다했다. 경거망동은 내 스스로 금 긋는 것만큼이나 나쁘다. 어차피 객관화되지 않은 내 실력에 대한 확신일 뿐이니 말이다. 마지막까지 정말 모든 생각을 비우고 최선을 다했고, 답안지를 제출하고 나왔을 땐 왠지 모를 뿌듯함이 밀려왔다. 이 기분은 확실히 재작년에 느꼈던 그런 기분이다. 내 자신에 대한 뿌듯함이고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한 데 대한 만족이니까.      


     

그날 기분은 하늘을 날아갈 수 있을 듯이 좋았다. 모든 걸 꼭 다 이룬 사람처럼 말이다. 08년은 나에게 최고의 선물이었고, 최고의 한해였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나 낙방이었다. 결과는 아쉬움을 남겼지만 과정과 시험을 보던 그 순간의 열정은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 그래서 결과가 안 좋더라도 실망하기보단 ‘한 해 더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에 행복해했다. 



▲ 낙방이란 결과가 나온 후에 다시 수원을 찾았다. 시험을 보기 위해서가 아닌 놀기 위해서.




목차     


1. 06년도 임용내가 된다는 확신을 갖게 하다

어느덧 오수생이 되다

첫 시험에 스민 자신감, 언뜻 보이는 불안감

초심자의 행운이 따르다

첫 시험이라 떨렸을까, 너무 큰 기대가 있던 시험이라 떨렸을까

초심자의 행운, 그렇게 떠나다     


2. 07년도 임용한바탕 노닐 듯 시험 볼 수 있을까?

2007년은 변화의 때

시험으로 한바탕 노닐어 보자

광주에서의 인연, 그리고 악연

축제가 한 순간에 저주로     


3. 08년도 임용기분 좋은 떨어짐

암울하게 시작된 2008년

어둠은 사라지고 찬란한 빛이 찾아오다

2008년에 바뀐 임용제도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흔들리는 마음을 멈추어 세울 수 있는 힘

과정에 만족할 수 있던 08년 임용     


4. 09년도 임용반란은커녕 뒤꽁무니 치다

한 해 동안 잘남과 못남을 동시에 느끼다

전북에서 시험을 보게 된 이유

시험의 위력에 휘둘려 꼬꾸라지다     


5. 10년도 임용마지막 시험에 임하는 자세

임용시험 3일 전, 마지막 시험을 코앞에 둔 심정

임용시험 2일 전 아침, 사는 게 무섭지 않냐고 물어봤었지

임용시험 2일 전, ‘盡人事待天命’의 자세     


6. 10년도 임용오수생 마지막 임용시험을 보다

마지막 시험이라 외치다

파도와 같던 나의 마음을 붙잡다

온고을 중학교와의 인연

마지막 임용시험의 풍경     


7. 10년도 임용지금 행복할 수 있는가?

시험 끝나자 활기가 찾아오다

함께 모여 밥 먹을 사람이 있다는 것

10년 지기 친구와 맛난 점심을

고통인 삶, 그걸 맛들일 수 있을까?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순 없다     


8. 때 지난 임용 낙방기를 쓰는 이유

사람은 밤하늘과 같다

실패했을지라도 그것만으로 좋은 경험이다

찬란한 과거를 현재의 자양분으로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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