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빵의 임용고사 낙방기 4
아~ 2009년을 어찌 잊으랴? 너무도 가슴 벅찬 일 년이었고, 나의 가능성을 실제로 알게 된 가슴 뭉클한 일 년이었다. 그만큼 나의 삶 중에서 가장 밀도가 높았노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다.
2009년엔 새해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용산 참사’라는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났다. 돈이 사람을 짓누르다 못해 살해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권력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기보다 돈의 흐름에 따라 생명체를 짓밟기에 이른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생각을 바로 잡아야 했고, 그저 예전에 하던 대로 ‘세상은 원래 그런 거야’라며 성공을 위한 경주마가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2007년부터 하던 대로 여러 책을 읽으며 생각을 가다듬기 시작했고, 그걸 내 삶을 통해 드러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바로 그 결단이 ‘국토종단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진 ‘나중에 임용이 된 후에 교사가 되어 방학 때 국토종단을 떠나야겠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당연하다, 무언가 이루지도 못했는데 현실을 내팽개치고 떠나는 것은 현실 도피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합격이 일 년, 이 년 길어지면서 국토종단은 허황된 꿈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것들은 ‘점점 멀어지나봐♬’라는 노래가사처럼 사라져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아래에 인용한 구절을 읽게 된 것이다.
시대의 시간과 다른 시간을 사는 것. 바로 ‘비시대성’이 타임머신 없이 시간을 여행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술이다. 미래로 떠나고 싶다면 지금 여기서 그 미래를 만들어라. 그러면 너는 타임머신에 승선하지 않고도 미래를 살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머무른 채로 떠나기’이며, ‘앉은 채로 유목하기’ 아니겠는가.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고병권, 그린비출판사, 2007년, 215쪽
니체에겐 ‘현실은 그런 것’, ‘미래를 위해 현실은 접을 수 있는 것’이란 말은 변명거리에 불과할 뿐이었다. 현실의 벽이 늘 높다랗게 드리워져 있지만 그걸 과감히 넘어서서, 지금 내가 서있는 곳에서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으며, 추구하던 이상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으니 말이다. 그가 말한 ‘초인超人’은 이런 정신을 갖춘 사람이었고 나도 그 생각에 동의했던 것이다.
바로 위에 인용한 글에서 두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든 구절은 ‘미래로 떠나고 싶다면 지금 여기서 그 미래를 만들어라’라는 부분이었다. 그 말은 달리 말하면 지금 당장 무언가를 하지 못하면서, 미래엔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비겁한 변명입니다’라고 말해주는 것과 같다.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서 미래엔 행복할 거라고 하는 것, 지금 무언가 노력하지 않으면서 미래엔 노력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것, 그 모든 건 비루한 변명에 불과하다. 그러니 미래에 무언가 될 거라 낙관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서 그걸 선취해야 한다. 그럴 때에야 현재가 바로 그렇게 꿈꾸던 미래가 되는 기적을 맛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주위 사람들에게 “국토종단을 떠날 거예요”라고 말하고 다니게 됐다.
이건 누가 봐도 미친 짓이다. 더욱이 일 년에 한 번씩만 보게 되는 임용이란 시험에 있어서, 시간은 금과 같은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어머니는 당연히 말렸고, 스터디 멤버 중 명희 누나는 곧바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어쩔 텐가, 지금 당장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으니, 하고 말아야 하는 것을. 그래서 강하게 밀어붙여 전남 목포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한 달간 국토종단을 떠나게 된 것이다.
막상 국토종단이 끝난 지금 생각해보면, 그 여행은 아주 시기적절할 때 했고, 나에겐 크나큰 변곡점이 되었다. 여행을 통해 나에 대해 좀 더 알게 됐고, ‘숨겨왔던 나의 수줍은 모든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세상은 살만했고, 생각보다 나는 훨씬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와 더불어 4개월의 짧은 연애를 하기도 했다. 국토종단은 ‘나의 장점이 부각되는 경험’이었다면, 두 번째 연애는 ‘나의 못남이 절절히 느껴지는 경험’이었다. 난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채 도망치기에 바빴고, 현실을 받아들이기보다 거부하기에 바빴으니 말이다.
그 모든 상황들이 나에게 고스란히 돌아오는 것이었으니, 역시나 삶은 돌고 돌아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깨달음을 주고 나를 성장시키게 한다는 걸 느꼈다. 희망이든 절망이든, 자신에 대한 만족이든 불만족이든 나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이니 말이다. 그렇기에 2009년은 내가 새롭게 태어난 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이런 상황에서 임용은 나에게 어떤 의미로 비춰지는 걸까?
올해는 처음으로 임용을 전북에서 본다. 여태껏 경기, 광주, 경기 총 3번의 시험을 보면서 전북에선 절대 볼 생각이 없었다. 29년간 살아왔던 전북이란 홈그라운드를 떠나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살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년에 경기도에서 떨어지면서 ‘전북에서라면 붙었을 텐데’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실제로 전북이 커트라인이 좀 더 낮아 붙을 수 있었던 점수였는데 경기도였기에 떨어졌으니 말이다. 만약이란 건 언제나 아쉬움을 토로할 때나 쓰는 것이기에, 그게 어리숙한 사람의 변명이라는 건 충분히 안다. 그러나 좀 더 가능성이 높은 곳에서 보면 나은 결과가 나올 것 같아 전북에서 보게 되었다.
더욱이 올핸 가산점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해다. 지역 가산점과 복수전공 가산점을 받을 수 있는데, 이 좋은 기회를 날릴 순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만약 이런 좋은 상황에서도 떨어진다면, 그건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내가 별 볼일 없다는 얘기겠지. 그렇다고 마냥 거만했던 것도 아니다. 기대는 품되 연이은 실패로 내 마음은 한 없이 작아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기장엔 다음과 같이 썼다.
솔직히 자신감은 별로 없다. 꼭 될 거란 생각도 없고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단지 언제고 내가 꿈꾸던 일이 이것이었기에 이 길만을 뚜벅뚜벅 걸어왔을 뿐이다. 시험에 떨어진다 해도, 이 공부의 길을 떠나진 않을 거니까(2009.11.08)
시험을 보려할 땐 언제나 같은 마음가짐이었다. 불안과 기대를 가슴 가득 끌어안고 도망치지 않고 걸어 들어가려 부단히 노력한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 ‘베토벤 바이러스’란 드라마를 보니, 강마에가 단원들에게 “가진 것 없는 사람들도 이만큼 할 수 있다. 반란을 보여 줄 겁니다. 충분히 그럴 거라고 전.. 믿습니다(ep 5)”라는 말이 나오더라. 그 말은 나를 향해 하는 말처럼 또렷또렷하게 들렸다. 내가 시험을 잘 보는 게 ‘반란’일리는 없지만 계속된 실패 속에 성공한 것이기에 충분히 ‘반란’과 같은 뉘앙스로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시험은 최악이었다. 지금껏 3번 시험을 봤지만 이번처럼 시험을 보는 내내 무기력감에 짓눌리며 시험 문제에 손을 못 대본 적도 없었다. 시험 보는 내내 울고 싶었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시험이 끝났다. 절망감이 감돌았다. 거의 대부분의 문제를 찍었으니. 시험은 끝났지만 시원하긴커녕 착잡함이 나를 짓눌렀다.
이렇듯 표현한 감정은 바로 나를 향해 퍼붓는 질타였다. 반란을 보여주진 못할망정, 뒤꽁무니 치는 모습만 보였기 때문이다. 과연 여태껏 무슨 공부를 어떻게 했으며, 무얼 얼마나 했을까? 이런 한심한 상황이었기에 어떻게든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시험 시작, 교육학도 전공도 쉽지 않았다. ‘모르는 거나 처음 보는 건, 무작정 넘어가고 나중에 다시 풀자’는 심정으로 풀었는데 그게 낭패였다. 솔직히 아는 게 별로 없이 거의 답을 적어 내려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맞다. 시험장에선 시험의 위력, 낯선 문제의 위력에 눌려서 휘둘리다 시험을 마치곤 했었는데, 바로 오늘 그랬던 거다. 시간이 자꾸 신경이 쓰였던 것도 그 이유다.
직면하지 못했고 어디든 우회로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것만 찾다 보니 시간은 흘렀고 난 비참하게 물러서야 했다. 이러고서도 한문을 공부했노라고 했다니 한심한 노릇이다. 긴장과 이완의 조화 없이 긴장감만 지속적으로 느껴야 했던 최악의 시간이었다. 그 결과 난 처참한 몰골로 고사장을 빠져 나와야 했다.
그래서 바로 집에 가지 못하고 안개가 자욱한 모악산을 올랐다. 그러지 않고선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안개는 짙어져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됐지만, 오히려 그게 더 나았다. 지금 난 어떤 것도 제대로 보고 싶지 않았고, 그저 조금씩 보이는 길을 따라 어디로든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길은 마치 천국을 향한 길인지, 지옥을 향한 길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나보고 자꾸 오라고 손짓을 하는 것만 같았다. 정상에 올라선 한참이나 그냥 멍하니 있었다. 한심함에 어리석음에, 부질없음에 몸서리치며 말이다.
목차
어느덧 오수생이 되다
첫 시험에 스민 자신감, 언뜻 보이는 불안감
초심자의 행운이 따르다
첫 시험이라 떨렸을까, 너무 큰 기대가 있던 시험이라 떨렸을까
초심자의 행운, 그렇게 떠나다
2. 07년도 임용, 한바탕 노닐 듯 시험 볼 수 있을까?
2007년은 변화의 때
시험으로 한바탕 노닐어 보자
광주에서의 인연, 그리고 악연
축제가 한 순간에 저주로
암울하게 시작된 2008년
어둠은 사라지고 찬란한 빛이 찾아오다
2008년에 바뀐 임용제도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흔들리는 마음을 멈추어 세울 수 있는 힘
과정에 만족할 수 있던 08년 임용
한 해 동안 잘남과 못남을 동시에 느끼다
전북에서 시험을 보게 된 이유
시험의 위력에 휘둘려 꼬꾸라지다
임용시험 3일 전, 마지막 시험을 코앞에 둔 심정
임용시험 2일 전 아침, 사는 게 무섭지 않냐고 물어봤었지
임용시험 2일 전, ‘盡人事待天命’의 자세
마지막 시험이라 외치다
파도와 같던 나의 마음을 붙잡다
온고을 중학교와의 인연
마지막 임용시험의 풍경
시험 끝나자 활기가 찾아오다
함께 모여 밥 먹을 사람이 있다는 것
10년 지기 친구와 맛난 점심을
고통인 삶, 그걸 맛들일 수 있을까?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순 없다
사람은 밤하늘과 같다
실패했을지라도 그것만으로 좋은 경험이다
찬란한 과거를 현재의 자양분으로 삼다